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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양반은 어떻게 여름을 보냈을까?

아라홍련 2023. 7. 10. 03:49

* 조선시대 양반들은 여름을 어떻게 보냈을까?...

기록을 살펴보면 양반들의 피서법 또한 현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는 양반들이 지은 한시(漢詩)들을 보면 확인된다.

시() 쓰는 게 일상화됐던 양반들은 여름에 보낸 피서법들을 매우 소소한 것까지 자세히

기록했다.

지금처럼 선풍기나 에어컨은 없었지만 대신 '부채질하기'와 '등목하기'로 더위를 식혔고,

여름엔 임금으로부터 부채나 얼음을 하사받기도 했다.

해외여행 대신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유람했고, 벗들과 함께 시회(詩會)를 열어 연꽃을

감상하며 무더위를 식히고 시심(詩心)을 일으켰다.

또 당시 귀한 과일이었던 참외를 안주로 삼아 술을 마시며 더위를 식혔다.

이는 한시에 나타난 양반들의 피서법(避暑法)이다.

조선 양반들 가운데 여름철의 경물(景物)과 서정(抒情)을 한시로 잘 읊은 이를 꼽으라면

단연 다산 '정약용'이다.

워낙 글을 많이 남겼기 때문이다. 

정조 승하 후, 1801년 형제들과 함께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귀양을 가기 전까지 다산은

시 동호회인 <죽란시사(竹欄詩社)> 동인들과 함께 여름을 노래한 연작시를 지었다.

또 전라도 강진으로 귀양 간 뒤에도 여름철의 정취와 풍류를 담은 시를 많이 썼다.

다산 '정약용'은 1801년 3월엔 지금의 포항시 남구 장기면인 경상도 장기현(長鬐縣)으로

유배되었다가 그해 11월, 전라도 강진으로 이배(移配) 됐다.

그로부터 18년 후 귀양이 풀린 후에는 소내(召川), 즉 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머물며 저술활동에 매진했는데, 특히 여름날의 정취와 풍류를 즐긴 시를 많이 남겼다.

다산은 여름 더위가 심해지자 '더위를 물리치는 여덟 가지 멋진 일'을 구상하여 '더위를 식힐

8가지 방법'(消暑八事)을 기록에 남겼다.

첫째, '松壇弧矢'(솔둑에서 화살을 쏘는 놀이를 즐기며 더위를 식힌다),

둘째, '槐陰鞦遷' (회화나무 그늘에서 그네를 타면서 여름 무더위를 거뜬히 보낸다),

셋째, '虛閣投壺' (넓은 누각에서 즐겁게 투호놀이를 하면서 더위를 이긴다),

넷째, '淸簟奕棊' (깨끗한 대나무 자리에 앉아 바둑 두기를 하면서 여름날의 무더위를 쫓는다)

다섯째, '西池賞荷' (연못에서 연꽃 구경을 하면서 더위를 식힌다)

여섯째, '東林聽蟬' (숲속에서 매미소리를 들으며 더위를 이겨낸다)

일곱째, '雨日射韻' (비 오는 날에는 시를 지으며 시간을 보낸다)

여덟째, '月夜濯足' (달 밝은 밤에는 개울가로 가서 발을 담근다)

다산은 이에 그치지 않고 그 후에도 더위를 잊게 할 연작시(連作詩)를 계속 썼다.

 

* 조선시대 한여름엔 양반은 물론 여염집들까지 왕으로부터 얼음을 하사받았다.

19세기 서울의 관청, 궁궐 풍속 등을 정리한 <한경지략(漢京識略)>의 궁궐 각사 조항을 보면

조선시대의 빙고(氷庫)에 대한 내용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빙고'는 조선시대 개국 초부터 설치돼 얼음을 저장하고 공급하는 일을 맡았던 관청이다.

조선시대엔 겨울철 한강의 깨끗한 얼음을 떠서 '동빙고(​東氷庫​)'와 '서빙고(西氷庫)'에 보관

했다.

이 둘을 합쳐서 외빙고(外氷庫)라고 불렀다.

동빙고는 지금의 옥수동 한강변 '두모포'에 있었고, 서빙고는 지금의 서빙고동 둔지산(屯智山)

자락에 있었다.

이와 별도로 왕실 전용 얼음 창고로 궐내에 내빙고(內氷庫)를 두어 운영했다.

창덕궁의 요금문(曜金門) 안에 있었다.

조선시대엔 겨울이 되면 먼저 '난지도' 등지에서 갈대를 가져다가 빙고의 사방을 덮고 둘러친 뒤

한강이 네 치 두께로 얼은 것을 확인하면 비로소 얼음을 뜨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동빙고'에는 종묘 등 궁궐의 제사에 쓰는 얼음을 보관했고, 서빙고에는 벼슬아치인

백관(百官)들에게 나누어 줄 얼음을 보관했다.

그러나 점차 얼음의 수요가 늘어나 공급이 부족해지자 18세기 경에는 장사로 얼음을 공급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어 한강 근처에만 30여 개소의 빙고가 설치됐다.

조선시대엔 얼음 창고인 '빙고'를 매우 중시했다.

빙고를 관리했던 관청은 바로 <빙고전(氷庫典)>이다.

<세종실록>엔 세종이 힘든 노동인 얼음을 캐고 저장하는 사람들인 장빙군(藏氷軍)들에게

술 830병, 어물 1.650마리를 내린 기록이 남아있다.

그 밖에도 자주 하사품을 내리며 힘든 노동을 하는 이들을 격려했다.

워낙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얼음을 빙고에서 처음 꺼내는 음력 2 '춘분'에는 개빙제(開氷祭)를 열었다.

얼음은 3月 初부터 출하하기 시작해 첫 서리가 내린다는 10 상강(霜降) 때 얼음 공급을

마감했다.

백성에게는 음력 5월 보름부터 7월 보름까지 두 달간 얼음을 풀었다.

서빙고의 얼음은 종친과 벼슬아치, 퇴직 관리, 활인서, 심지어 의금부 죄수들에게까지 얼음을

골고루 나눠 주었다.

 

 

양반들은 삼복더위 혹서기(酷暑期)에 차가운 샘물, 또는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얼음 물에

국수말아먹었다.

조선시대엔 밀가루가 귀해서 이 국수는 왕을 비롯해 왕실 가족만 먹었고, 양반은 주로 메밀

국수를 차게 해서 먹었다.

지금은 메밀이 비싸고 밀가루가 싸지만, 조선시대엔 상황이 달랐다.

양반에겐 임금으로부터 귀한 얼음을 하사받아 냉면을 먹는 일이 큰 기쁨이었다.

때문에 옛 선비들은 그 즐거움을 많은 시()에다가 다양하게 남겼다.

또 선비들은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즐기기 위해 잎이 큰 식물인 연꽃이나 오동나무,

파초를 심어서 여름날 소나기와 장맛비 소리를 즐겼다.

바로 파초 우성(芭蕉雨聲)이다.

조선시대엔 풍류(風流)와 낭만이 있었다.

또 정취를 아는 양반들은 피서음(避暑飮)을 즐겼다.

술로 더위를 잊으려 한 것이다.

운치(韻致)를 아는 사람들은 당나라와 원나라 때 유행한 피서음을 본떠 술잔을 연꽃과 연밥,

연잎을 이용해 만들어 술을 마셨다.

이런 술을 벽통주(碧筩酒)라 했고 또 이런 풍류를 벽통음(碧筩飮)이라고 불렀다.

기록을 살펴보면 더위를 물리치는 조선시대 양반들의 피서법은 현대의 피서법보다 훨씬 더

고상하고 멋들어져 보인다.

아마도 지금보다 사람들의 심성이 덜 타락하고 덜 각박해 선비들이 고상하고 진정한 멋을

알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양반들의 피서법에서는 진정 멋과 정취를 아는 고상함과 유유자적함이 느껴진다.

                                     * 믿고 읽는 '김시연' 작가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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