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에 대한 기억이 없다.
나였던 것들은 지금 어디에도 없다.
엄마 손을 잡고 불이 난 건물 계단을 내려오던 나도...
산골짜기를 헤매며 사슴벌레를 잡던 나도...
첫사랑의 열병을 앓던 나도...
흰 눈을 맞으며 펑펑 울던 나도 없다.
오직 그것들에 대한 기억만이 그것들을 '나'이게끔 한다
그런 기억은 삶을 비가역적인 무엇으로 만든다.
사랑이 불가역적인 반응인 이유도 기억(記憶) 때문이다.
사랑과 이별이 남긴 기억으로 인해, 우리는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어른이 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처음'에 대한 수많은 기억이 우리를 늙게 한다.
'첫사랑'을 다시 할 수 없고, 첫 키스를 새로 할 수 없는 이유는
이미 그것을 해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억의 퇴적층(堆積層)이다.
시간은 기억을 풍화시키고, 죽음은 마침내 기억을 소멸시킨다.
나는 한 존재가 죽음 이후에도 살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타자의
기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런 기억이 있다.
바로 생명(生命)이다.
기억의 핵심은 재현(再現)이다.
기억 속에서 사건은 재현된다.
내일 자전거를 자연스럽게 탈 수 있는 것은, 어제 자전거를 탔던 행위를
내 몸이 기억하고 그것을 재현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도...
행복했던 여행의 순간을 떠올리는 것도...
바로 '기억'이고 '재현'이다
기억이 없다면 재현은 불가능하다.
과거의 사건은 오로지 기억의 매개를 통해서만 현재 혹은 미래와 연결된다.
생명의 핵심 또한 재현이다.
생명체는 사건을 끊임없이 재현한다.
세포가 분열하여 똑같은 세포가 나오고, 그 세포들이 분열하여 다시 똑같은
세포를 만든다.
하나의 세포가 닭이 되어 하나의 세포로 된 알을 낳고,
그 알은 다시 닭이 되어 하나의 세포로 된 알을 낳는다.
아버지가 딸에게 파란 눈을 물려주고, 어머니가 다시 그 파란 눈을
아들에게 물려준다.
이 모든 과정에서 생명체는 마치 과거를 기억한다는 듯 행동한다.
세포가 분열한 후 딸세포는 다시 모세포의 모습을 되찾고,
달걀은 자신을 낳은 닭의 꼴을 갖춘다.
손자의 눈은 할아버지 눈의 색깔을 기억하는 것 마냥 푸른빛을 띤다.
생명체는 기억을 통해 본연의 삶을 획득하고,
살아 있는 한 기억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반대로 생명체의 죽음은 기억(記憶)의 끝이며, 재현(再現)의 정지다.
최초의 심장박동이 더 이상 재현되지 않을 때,
삶의 가장 찬란한 순간을 영원히 기억할 수 없는 상태가 죽음이다.
그러나 생명체의 죽음 이후에도, 기억을 매개로 생명은 이어진다.
할아버지가 죽은 이후에도 손자의 눈은 여전히 파랗다.
닭이 더 이상 달걀을 낳을 수 없게 되는 날, 그가 낳은 달걀이 닭이 되어
다시 달걀을 낳고 있다.
최초의 생명은 그 탄생 이후, 단 한순간도 재현을 멈추지 않았다.
38억 년 동안 지구 위에서 끊임없이 재현되는 기억!
생명은 바로 그 영속(永續)하는 기억이다.
<에르빈 슈뢰딩거(Erwin Schrodinger)의 '생명'에 대한 글>
* <에르빈 슈뢰딩거>(1887.8.12 ~ 1961.1. 4)
오스트리아의 이론물리학자이자 파동역학(波動力學)의 건설자이다.
원자이론의 새로운 형식의 발견을 한 <슈뢰딩거 방정식>에 관한 기여로 193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슈뢰딩거 방정식'은 파동역학의 표준 파동방정식을 말한다.
양자역학의 뼈대를 만든 과학자이다.
그의 파동역학 체계는 오늘날 양자화학, 고체물리학, 양자통계역학, 양자광학
등에서 광범위하게 쓰이면서 일반성을 인정받고 있다.
또 물리학에서의 적용 영역 또한 계속 확장되고 있다.
'슈뢰딩거'는 <상보성 원리(相補性 原理, complementarity principle)>로
유명한 '닐스 보어'(Niels Bohr,1885~1962)와 동시대에 살면서 파동물리학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던 과학자이다.
'닐스 보어'는 원자물리학에다가 고대 중국의 음양철학(陰陽哲學)을 접목하는
혁명을 시도했던 위대한 인물로 내가 좋아하는 과학철학자이다.
'슈뢰딩거'보다 11년 앞선 1922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물리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난 과학자보다 '과학철학자'를 더 좋아한다.
또 인문학자보다 '과학철학자를 더 좋아한다.
'과학철학자'들은 과학으로 무장돼 있으면서도 철학적 소양이 풍부하다.
감성과 이성이 골고루 발달했다.
특히 과학자나 인문학자들보다 '과학철학자'들은 사유(思惟)의 폭이 넓고 깊다.
무엇보다 오성(悟性)이 발달한 사람들이다.
이성(理性)은 오류를 낳을 수 있지만, 오성은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진리를
추구하기 때문에 이들은 실체에 더 근접할 수 있다.
과학철학자들이 뛰어난 업적을 이루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들은 '우주의 비밀'에 근접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우주의 비밀을 제대로 알면, 원자물리학이나 파동물리학을 과학적으로 잘 이해할
수가 있다.
또 수천 년 전부터 내려오는 고전(古典)과 경서(經書), 모든 처세서(處世書)들이
'생각이 동하는 순간, 바로 파동이 하늘과 땅에 기록되고 저장된다.'고 가르치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 '김시연' 작가의 <네이버 블로그> 주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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