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덕궁(昌德宮)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1395년 법궁(法宮)으로 지은 경복궁에
뒤이어 10년 후, 태조의 다섯 번째 아들 태종 '이방원'이 지은 조선의 두 번째 궁궐이다.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두 번이나 '왕자의 난'을 일으킨 태종(太宗)은 형제들과 골육상쟁
(骨肉相爭)을 벌인 뒤 조선 제3대 왕으로 즉위했다.
'이방원'의 둘째 형인 조선 제2대 왕 정종(定宗)은 수도를 개경으로 옮긴 후, 2년간 왕위에
앉았다가 강압적으로 보위를 동생인 '이방원'에게 넘긴 뒤 상왕(上王)으로 물러났다.
조선 제3대 왕으로 즉위한 태종은 즉위 5년 째인 1405년, 수도를 개경에서 다시 한양으로
옮기면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경복궁은 많은 형제들을 살해한 골육상잔(骨肉相殘)의 기억이 남아있는 곳이자 정적(政敵)
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한 꺼림칙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종은 새로운 궁궐을 북악 매봉 산자락 아래에 다시 지었다.
바로 창덕궁(昌德宮)이다.
왕이 창덕궁에서 지내려고 하자 대신들은 태종(太宗)에게 법궁인 경복궁에서 지낼 것을
강력히 주청했다.
그럴 때마다 태종은 풍수지리(風水地理)를 내세우며 자신의 복잡한 심경을 신하들에게
솔직히 이렇게 토로하곤 했다.
아래는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기록이다.
내가 어찌 경복궁을 유명무실한 것으로 만들어서 쓰지 않는 것이냐?
내가 태조께서 처음으로 창설하신 뜻을 알고, 또 지리의 설(說)들이
괴상하고 헛된 것을 알고 있지만, 술자(術者)가 말하기를...
"경복궁은 음양의 형세에 합하지 않는다."라고 하니 내가 듣고 의심이
없을 수 없으며, 또 무인년 규문(閨門)의 일은 내가 경들과 말하기엔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니 어찌 차마 경복궁에 거처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규문의 일'이란, 부왕인 태조 7년에 이방원(태종)이 주도하여 조선 개국의 주역인
'정도전'과 이복동생 방석(方碩)을 살해한 사건을 뜻한다.
바로 제1차 '왕자의 난(亂)'이다.
태종은 신하들에게 탁 까놓고 자신이 행한 지난날의 악행 때문에 무섭고 꺼림칙해서 도저히
경복궁에선 살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산림(山林)이 우거진 산자락에 만들어진 산중 궁궐 '창덕궁'의 아름다움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창덕궁은 경복궁과 중국의 자금성처럼 기하학적으로 궁궐의 배치를 통제한 인위적인 건축물이
아니다.
북악을 등지고 145000여 평의 산자락에 자리 잡아 지형적 특성에 따라서 자유롭게 전각들을
배치했다.
그럼에도 지형과 건물 사이에 엄격한 질서와 균형미가 있어 절등한 아름다움이 있다.
창덕궁은 전체적으로 편안하고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그러나 경복궁과 창덕궁 등 한양에 있는 모든 궁궐은 조선 제14대 왕인 선조 25년(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서 소실됐다.
조선 제15대 왕으로 즉위한 광해군(光海君)은 창덕궁을 재빨리 재건해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후에도 경복궁은 그 터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다른 왕들 역시 재건하지 않고, 다른 궁궐들을
건축해 기거했다.
경복궁은 270년 이상 폐허로 방치되다가 고종 2년인 1865년, 조선 제26대 왕 고종(高宗)의
생부 흥선대원군에 의해 재건됐다.
창덕궁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궁궐이 됐고, 그 가치와 아름다움을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1997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영광을 안았다.
창덕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은 단연 후원(後苑)이다.
후원은 궁궐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북원(北苑), 임금 허락 없이는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
해서 금원(禁苑), 궁궐 안의 동산이라 하여 내원(內苑), 또 동산을 관리하던 아문(衙門)인
상림원(上林園)의 이름을 따서 상림(上林)으로 불리었다.
창덕궁 후원의 아름다움은 현존하는 궁궐들 중에서도 가히 독보적이다.
천년을 넘은 느티나무와 750년이 넘은 향나무, 650년은 넘은 다래나무, 400년 넘은 뽕나무,
500여 년은 족히 되었을 회화나무, 그리고 수백 년 넘은 단풍나무들이 밀밀(密密) 하다.
창덕궁은 북악산 매봉 자락에 터를 잡아 지어서 궁궐의 주요 전각들은 낮고 평탄한 남쪽에 주로
자리해있다.
반면에, 지형이 높은 북쪽 산등성이 쪽으로는 후원(後苑)이 자리 잡고 있다.
수백 년 동안 금원(禁垣)으로 산을 보호해왔기 때문에 다양한 수종과 고목들, 새들의 천국이기도
하다.
현재 창덕궁 후원의 면적은 9만 평으로 전체 면적의 60% 이상을 차지한다.
한데도 후원 모습이 산골짜기에 숨겨져 있어 외부 시선과 노출을 철저히 차단하는 절묘함이 있다.
하지만 창덕궁 후원이 처음부터 이렇게 넓었던 건 아니다.
후대 왕들이 점차 후원의 영역을 넓혀나갔다.
특히 조선 제7대 왕인 세조(世祖)가 후원의 영역을 크게 넓혔다.
세조 8년(1462년)엔 매봉의 맥(脈)을 후원 안으로 넣기 위해 후원 동쪽에 인접한 민가(民家)
73채를 철거했고, 이듬해엔 후원 북쪽에 있던 민가 58채를 추가로 철거했다.
특히 화려한 것을 좋아했던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은 후원에 영산홍 1만 그루를 심게 해 장관을
이루었다.
조선 제16대 왕인 인조(仁祖)는 창덕궁 후원에 많은 정자를 지었다.
후원 가장 깊숙한 곳에 바위를 깎아 옥류천을 만들고, '옥류천(玉流川)'이란 글자를 써서 바위에
새기게 했다.
또 산수가 빼어난 곳마다 정자(亭子)를 지었다.
현재 창덕궁 후원에 남아있는 고색창연한 정자는 대부분 인조 때 만들어진 것이다.
창덕궁의 아름다움은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만들어져 나갔다.
조선 제23대 왕 순조(純祖) 때에는 대리청정을 하던 효명 세자가 단청을 하지 않은 '의두합'과
'연경당'을 질박하게 지어서 창덕궁 후원의 운치(韻致)를 완성시켰다.
조선시대의 많은 왕들이 물이 흐르는 골짜기를 따라 연못을 파고 또 적당한 언저리에 정자를 지어
자연을 벗했다.
격무에 지친 왕들은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기 위해 후원을 즐겨 찾아 거닐며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
하고 또 시인이 되어 많은 詩를 남겼다.
특히 연하지벽(煙霞之癖)이 있던 조선 제19대 왕 숙종(肅宗)은 풍광 좋은 곳에 정자를 만들고
경치를 감상하며 많은 시를 지었다.
창덕궁 후원은 춘하추동 변화에 따라 각기 개성 있고 고유한 아름다움을 뽐내서 많은 왕들의 사랑을
받았다.
특히 한겨울 눈이 내리는 설경(雪景)이 왕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그렇다면 조선의 왕들은 창덕궁 후원 어느 곳에서 눈 구경하는 걸 즐겼을까?...
바로 능허정(凌虛亭)이다.
이는 왕들이 남긴 시(詩)를 통해 확인할 수가 있다.
능허정은 빽빽한 나무들에 둘러싸여 외부와는 격리된 비밀스러운 공간에 위치해 있다.
능허정은 숙종 17년(1691년), 창덕궁 후원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해발 90미터에 이르는 곳에
단순하고 소박하게 만들어진 정자이다.
후원의 가장 깊고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능허정에 우뚝 서면 한양 전체가 한눈에 다 내려다보인다.
능허(凌虛)란, "하늘을 오른다", "허공에 오른다"라는 뜻으로 후원의 가장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또 '정신세계가 세속을 초월한다.'라는 깊은 의미도 내포돼 있다.
'능허'란 단어는 중국 위(魏) 나라의 시인 조식(曹植)의 詩 <칠계(七啓)>에서 유래했다.
화려한 전각이 구름에 닿고, 나는 섬돌이 허공에 오르네.(凌虛)
아래로 흐르는 별을 내려다보고, 우러러 팔방을 바라보네.
한겨울 함박눈이 펄펄 내리기 시작하면 임금들은 창덕궁 후원에서 가장 높은 '능허정'에 올라가서
눈 덮인 산과 한양의 설경을 감상하며 저마다 시를 남겼다.
숙종(肅宗)은 능허정에 올라가 눈 그친 경치를 보며 <능허정제설(凌虛亭霽雪)>이란 詩를 남겼다.
하룻밤 바람이니 눈빛이 가득하여,
눈 밟고 누(樓)에 오르니 개인 경치가 새롭구나.
무엇보다 상림(上林)의 비할 데 없이 기이한 경치는
수많은 바위와 나무가 모두 은(銀)과 같구나.
조선 제22대 왕 정조(正祖)도 한겨울 능허정에 올라 <능허정모설(凌虛亭暮雪)>이란 제목으로,
해 저물 무렵 능허정에서 바라보는 눈 내리는 경치를 詩로 읊었다.
세모는 완연하고 해는 저물려 하는데,
펑펑 쏟아지는 눈 예쁘기도 하구나.
잠깐 사이 산과 들에 뿌리고 지나가니,
눈 덮인 나무가 아름다운 꽃이 되어
앞뒤로 감쌌네.
조선 제23대 왕 순조(純祖)도 능허정에서 설경을 보며 <능허설제(凌虛雪霽)>란 제목으로 詩를
노래했다.
옥 같은 눈 쌓인 곳에 번거로운 세상은 씻어지고,
눈 개자 날씨는 차고 달빛은 새롭다.
능허정에 앉아 바라보노라니...
도성(都城)의 나뭇가지 모두 은빛이로세.
이처럼 많은 왕들이 능허정(凌虛亭)의 아름다운 설경을 노래한 詩를 남겼다.
이를 통해 조선시대엔 눈이 내리면 임금은 으레 창덕궁 후원의 정상에 있는 능허정에 올라가서
눈 구경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궁궐 후원의 가장 높은 곳 능허정에 우뚝 선 왕들은 눈 덮인 산과 나뭇가지에 만발한 눈꽃들과
상고대, 그리고 순백의 눈 속에 파묻힌 한양의 여염(閭閻)을 내려다보며 저마다 시인(詩人)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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