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늘은 첫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다는 상강(霜降)이다.
상강은 24절기 중 가을의 마지막 시기로 열여덟 번째 절기이다.
가을에 해당하는 절기는 입추(立秋)부터 시작해 처서(處暑), 백로(白露), 추분(秋分),
한로(寒露), 그리고 상강(霜降)이다.
그다음은 입동(立冬)으로 이때부터 겨울 절기로 들어간다.
올해 임인년 입절(入節) 시각은 오후 7시 36분이다.
상강은 태양의 황경이 210°되는 때이다.
낮에는 날씨가 쾌청하지만, 밤에는 기온이 매우 낮아져 수증기가 지표에서 엉겨서
서리가 내리는 늦가을이기 때문에 '서리' 상(霜) 字, '내릴' 강(降) 字를 써서 '상강'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계절로는 늦가을로 만추(晩秋) 또는 심추(深秋)에 해당한다.
중국은 2016년, 24절기를 유네스코(UNESCO) 문화유산에 신청했다.
이에 2016년 11월 30일,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열렸던 제11차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보호 협약 정부 간 위원회 회의>에서 중국이 신청했던 24
절기가 심의를 통과해 '인류 문화유산'에 등재됐다.
당시 국제 기상학계는 24절기란 역법(歷法) 체계에 대해 '중국의 5대 발명품'이란
칭호를 부여했다.
또 유네스코는 24절기가 "계절과 천문학, 자연 현상의 세밀한 관찰을 통해 중국의
전역과 주변국에 적용됐다"면서 "지금까지도 농업인에게 중요한 지침이 되고 있다"
고 높이 평가했다.
조선시대엔 일 년에 두 번, '경칩'과 '상강'에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소사
(小祀)로 규정된 둑제(纛祭)를 지냈다.
조선팔도 군이 주둔하던 여러 곳에 둑소 즉 둑신사(纛神祠)를 마련해 매년 정기적
으로 제사를 지냈다.
둑제는 조선시대에 군대를 출동시킬 때 군령권(軍令權)을 상징하는 큰 깃발 대장기
(大將旗)에게 지내는 제사이다.
둑(纛)은 왕의 대가(大駕) 앞이나 군대 대장 앞에 세우던 대형 군기(軍旗)인 깃발로
군 통수권(國軍統帥權)의 상징이다.
둑(纛)이란 단어를 해자(解字) 하면, 독극물을 뜻하는 '독(毒)' 자와 매달 '현(縣)'
자가 합쳐져 만들어진 글자이다.
둑제는 군신(軍神), 즉 '전쟁의 신'을 상징하는 깃발에 지내는 제사의식으로 고대부터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둑'에 제사를 지낸 데서 유래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에 처음으로 둑기의 모습이 확인된다
그러나 당시 둑제의 시행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둑제는 승리의 신(神)인 '치우'의 머리를 형상화한 것으로 소 꼬리나 검은 비단으로
만들어 ‘대조기(大早旗)’라고도 불린다.
고려 시대에도 시행됐던 둑제는 조선왕조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국가 의례로 정비됐다.
둑제는 문신들의 석전제(釋奠祭)에 비견되는 무신(武臣)들의 유교의식이다.
둑제는 소사(小祀)라 중앙에서는 경칩인 음력 2월과 상강일(霜降日)인 음력 9월,
이렇게 일 년에 두 번씩 왕을 대신해 병조판서(兵曹判書)가 주관하여 둑소(纛所)에서
제사를 지냈다.
무관(武官)인 병조판서가 왕을 대신해 지냈던 유일한 국가적 제사이다.
각 지방에 있는 군 지휘관들 또한 일 년에 두 번, 즉 음력 2월 경칩과 음력 9월 상강일에
지방의 둑소인 둑신사(纛神祠)에서 대장기인 둑(軍旗)에 대해 제사를 지냈다.
여러 기록들을 통해 중앙에서 병조판서가 둑제를 지내는 것 외에 각 지방에서도 군의
지휘관들이 둑제를 지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둑제에서는 잔을 올릴 때에는 납씨가(納氏歌)를 불렀다.
그리고 간척무(干斥舞)와 궁시무(弓矢舞), 창검무(槍劍舞) 등의 춤을 추었다.
간척무는 제사 초헌(初獻) 때 왼손엔 방패 오른손엔 도끼를 들고 추는 춤을 말하고,
궁시무는 아헌례(亞獻禮) 때 활과 화살을 들고 추던 춤을 말한다.
창검무는 둑제의 종헌(終獻) 때 창과 칼을 들고 추던 춤이다.
때문에 둑제는 음악과 무용, 의식(儀式)이 함께 어우러진 종합예술에 가까웠다.
서울의 '뚝섬'은 이 둑제를 지내던 둑신사(纛神祠), 즉 사당이 있던 곳이다.
뚝섬이란 지명은 바로 이 둑제에서 유래한 것이다.
조선조에 들어와 둑제가 처음 시행된 기록은 건국한 지 7개월 만인 1393년(태조 2)
1월 16일로 확인된다.
당시 둑제는 둑신(纛神)이라 불리는 '홍둑(紅纛)'과 '흑둑(黑纛)'을 대상으로 정월에
지내는 제사였다.
1394년(태조 3) 1월 27일에 다시 지낸 것으로 기록돼 있다.
1421년(세종 3)에 이르러서 본격적으로 국가의 사전(祀典)으로 정비됐고, 1474년
(성종 5)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가 편찬되면서 길례(吉禮)의 소사 가운데 하나로
둑제(纛祭)가 확립되었다.
둑제의 중요성은 임진왜란(1592~1598)의 와중에도 계속된 것을 보아도 증명된다.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亂中日記)』에서 임진왜란 당시 둑제를 세 차례나 지냈다고
기록했다.
『난중일기』를 살펴보면, 1593년(선조 26) 2월 초 5일 경칩에 비가 오는 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장군은 둑제를 시행했다.
또 1594년(선조 27) 9월 9일엔 장흥 부사를 헌관(獻官)으로, 또 흥양 현감을 전사관
(典祀官)으로 삼아 둑제를 시행했다.
1595년(선조 28) 9월 20일엔 사경(四更, 새벽 1~3시)에 둑제를 행했는데, 사도
첨사(蛇渡僉使) 김완(金完)을 헌관으로 삼아 지냈다고 기록돼 있다.
기록을 보면, 둑제는 새벽 1~3시경에 시행한 것으로 확인된다.
『난중일기(亂中日記)』를 보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제관(祭官)을 하되, 인근 지역
수령들이 헌관이나 집사관(執事官)으로 참여했다.
이때 "왜적을 무찌르게 해달라"는 출사 제문(出師祭文)을 지어 읽었다.
또 1618년(광해군 10)엔 명나라를 돕기 위해 떠나는 도원수(都元帥, 총사령관)
'강홍립' 장군을 위해 둑제를 지낸 기록이 나온다.
둑제는 국가의 존립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국방의 중요성 때문에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국가 행사 중 하나였다.
때문에 경칩과 상강, 일 년에 두 번씩이나 둑제를 지냈다.
둑제는 1894년 갑오개혁으로 인해 담당 부서가 예조에서 궁내부로 바뀐 뒤, 조선시대
말기까지 계속 시행됐다.
그만큼 둑제는 국가 통수권을 상징하는 국가적 중요한 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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