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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청명(淸明), 한식(寒食)

아라홍련 2022. 4. 5. 23:17

 

* 오늘은 식목일이자 24절기 중 다섯 번째 절기인 청명​(淸明)이다.

청명은 춘분(春分)과 곡우(穀雨) 사이에 있는 절기로 태양의 황경(黃經)이 15°일

때이다.

2022년 청명 입절 시각은 04:20:15였다.

청명은 삼라만상이 화창해져 만화방창(萬化方暢) 한때인지라 나무 심기에 적당한

시기다.

최근 강원도의 화재로 상상을 초월하는 나무들이 사라진 것은 재앙이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데 100년이 필요하다는 전문가들의 분석이 나왔다.

안타까운 일이다.

방화하는 자들은 엄벌에 처해야 한다.

방화 자체가 극명한 정신병적 기질이다.

 

내일은 한식(寒食)이다.

한식은 24절기가 아닌 명절(​名節)이다.

한식은 고대 민속신앙에서 비롯된 날이다.

중국에서 들어온 절기였으나 우리나라에 토착돼 큰 명절로 자리 잡았다.

고래로부터 한식은 설, 추석, 단오 명절과 함께 우리 민족의 큰 명절 중 하나였다.

특히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국가에서 인정하는 7대 명절 또는 4대 명절에 속해서

한식날엔 관리들에게 휴가를 주고 국가적인 여러 행사가 시행됐다

청명과 한식은 하루 정도 차이가 나거나 겹치기 때문에 흔히 병칭(竝稱) 된다.

조선시대에는 이 시기가 되면 오래된 불을 새 불로 바꾸는 국가적인 행사를 실시했다.

조선 순조 때 학자 '홍석모'가 지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이 시기가 되면

"버드나무와 느릅나무를 비벼 새 불을 일으켜 임금에게 바친다"라고 기록돼 있다.

궁궐 안에 설치돼 시위와 의장을 담당하는 병조(兵曹) 소속 내병조(內兵曹) 군사들이

느릅나무나 버드나무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 안으로 끈을 강하게 통과시킨다.

삼으로 만든 끈은 워낙 튼튼해 군사들이 양쪽에서 톱질하듯 서로 세게 잡아당겨도 오래

버틸 수가 있다.

그렇게 밀고 당기면서 빠르게 마찰시키면 불이 붙게 된다.

바로 이때가 새봄이 시작되는 절기이므로 불을 일으켜 만물이 왕성하게 일어나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행해진 국가적인 행사이다.

조선 정조 때 문신 김매순이 1819년에 한양의 연중행사를 기록한 책인 <열양세시기

(洌陽歲時記)>에는 <동국세시기>와는 달리, 불을 나누어주는 행사를 행사를 '한식조'

(寒食條)에서 기록했다.

대신 청명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청명과 한식의 세시풍속이 겹치기 때문이다.

임금이 군사들이 만든 불을 홰에 붙이는 의식을 행하면, 그 불을 정승과 판서를 비롯한

문무백관, 그리고 360 고을의 수령(守令)에게 나누어 주었다.

수령은 다시 백성들에게 불을 나누어 주었다.

이는 온 백성이 한 불을 씀으로써 같은 운명체로서의 국가 의식을 다진다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꺼지기 쉬운 불은 습기나 바람에 강한 불씨 통인 장화통(藏火筒)에 담아서 조선 팔도로

보내졌다.

장화통은 뱀이나 닭 껍질로 만든 주머니이다.

불은 보온력이 강한 은행이나 목화 씨앗 태운 재에 묻어서 운반했다.

조선시대에는 이를 사화(賜火)라고 불렀다.

바로 이때가 새봄이 시작되는 절기이므로 불을 일으켜 만물이 왕성하게 일어나기를 기원

하는 의미에서 병조(兵曹) 주관으로 내병조(內兵曹)에서 행했다.

간혹 역사 드라마에서 왕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찬수 개화식 등 불을 바꾸는 행사를 계절에

맞지 않게 행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명백한 역사 왜곡이다.

청명과 한식 즈음에 오래된 불을 새 불로 바꿔 조선 팔도에 보내는 행사나 또는 절기가 바뀔

때마다 불을 바꾸던 행사인 '찬수개화식(鑽燧改火式)'은 반드시 절기에 맞게 시행하던

국가적인 행사였다.

결코 왕이 아무 때나 불을 바꾸고 싶다고 바꿀 수 있는 행사가 아니다.

조선시대에는 한식 날, 종묘(宗廟)와 각 능원(陵園)에 제향을 보내고, 관공리(官公吏)

들에게 공가(公暇)를 주어 성묘하도록 했다.

또 어떤 죄수에게도 형을 집행하지 않도록 금지시켰다.

한식 날 민간에서는 조상들에게 한식 차례를 올리고 성묘를 했다.

사초도 하고, 상석이나 비석을 세웠다.

이는 한식 날이 일명 '손 없는 날', 또는 '귀신이 움직이지 않는 날'이라고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왔기 때문이다.

여염(閭閻)에서는 한식 날 흙으로 만들어진 부뚜막을 손질하거나 벽을 고치거나 또는

방바닥을 손질하는 등의 일들을 했다.

한식일(寒食日)은 불을 금하는 날이기 때문에, 지상을 통제하고 다스리는 지신(地神)들이

별로 할 일이 없다는 이유로 천상에 있는 옥황상제가 지상에 있는 모든 지신들을 소집시켜서

명령을 하달하는 날이라 지상(地上)을 감독하는 지신이 없는 틈을 타서 몰래 살짝 하는 것이

무해 무탈하다는 전설이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왔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문신인 김종직(金宗直)은 <한식 촌가(村家)>라는 시에서 한식을 이렇게 노래했다.

禁火之辰春事多    불을 금하는 때(한식)에는 봄 일이 많으니

芳菲點檢在農家    방비를 점검하는 것도 농가에 있다.

鳩鳴穀穀棣棠葉    비둘기는 국국 아가위 나뭇잎에서 울고,

蝶飛款款蕪菁花    나비는 훨훨 장다리꽃에서 나네.

帶樵壟上烏犍返    검은 황소는 땔나무 싣고 언덕으로 돌아오고

挑菜籬邊丫髻歌    울타리 가에서는 나물 캐는 소녀들이 노래를 부른다.

有田不去戀五斗    내 밭이 있어도 다섯 말 녹봉이 그리워 떠나지 못하니

元亮人笑將柰何    도연명이 비웃어도 어쩌지 못하겠네.

한식(寒食)의 기원은 중국 진 나라의 충신 '개자추'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서라고 전해진다.

'개자추(介自推)의 전설'에 의하면 중국 춘추시대의 공자(公子)인 중이(重耳)가 망명해

유랑 생활을 할 때, 공자가 굶주림에 시달리는 것을 본 '개자추'는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바쳤다.

'중이'는 진나라의 문공(文公)이 된 뒤, 충신들을 포상했다.

한데, 충신 속에 '개자추'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를 부끄럽게 여긴 '개자추'는 깊은 산중에 들어가 숨어버렸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문공은 잘못을 뉘우치고 뒤늦게 '개자추'를 찾았다.

그러나 '개자추'가 끝까지 산에서 나오지 않자 문공은 산에다 불을 놓으면 밖으로 나올

것으로 생각해 불을 질렀다.

그러나 '개자추'는 끝내 나오지 않고 홀어머니와 함께 꼭 껴안은 채 버드나무 밑에서 불에 타

숨진 채 발견됐다.

이때부터 '개자추'를 애도하는 의미로 한식(寒食)에는 불을 쓰지 않고 찬 음식을 먹는 풍속이

생겼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한식을 냉절(冷節)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한식의 의미를 고대 종교적 의미로 해석하면, 매년 봄에 국가에서 새 불(新火)을 만들어

쓸 때 그에 앞서 어느 일정 기간 동안 묵은 불(舊火)을 일체 금지시키던 예속(禮俗)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또 중국 옛 풍속엔 이때쯤 풍우(風雨)가 심해 불 사용을 금하고 찬밥을 먹는 습관이 있었는데,

바로 여기에서 '한식'이 유래됐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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