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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단오(端午)

아라홍련 2020. 6. 25. 13:58

 

* 오늘 6월 25일은 음력 5월 초닷새 단오(端午)이다.

작년 단오는 6월 7일이었다.

올해 이렇게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은 윤달 때문이다.

책력에 윤달을 끼어넣은 것은 좀 더 정확한 책력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여러 번 언급한 바가 았지만, 단오는 24절기가 아니다.

고래로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온 우리나라의 큰 명절이다.

 

단오는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4대 명절(설, 한식, 단오, 추석)

중 하나이다.

한국을 비롯해 일본에서 중요하게 지켰던 큰 명절이다.

'단오'라는 이름 외에도 수릿날(水瀨日), 천중절(天中節), 중오절

(重五節), 단양(端陽)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이런 명칭들이 어디에서 유래됐는지는 기록에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학계의 대체적인 시각은 역술(曆術)에 의해 붙여진 것으로 간주한다.

수릿날은 신라 때 단오절(端午節)을 부르던 우리 고유의 명칭이다.

고대에는 홀수를 양(陽)의 기운으로 일컬었다.

특히 홀수가 두 번 겹치는 날은 밝고, 높고, 따뜻한 것을 겹겹으로 두었다고

하여 '길살(吉祥)의 날'로 생각해 매우 경사스러운 날로 여겼다.

고래로부터 음력 1월 1일 설날과 5월 5일 단오, 7월 7일 칠석, 9월 9일

중양절을 중요한 명절로 지켜온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 중 5월 5일을 태양의 기운이 가장 센 날이라고 해서 으뜸 명절로 생각했다.

'수릿날'의 '수리(水瀨)'란 뜻은 고(高), 상(上), 신(神)을 의미한다.

일 년 중 '최고의 날'이란 뜻이다.

단오절은 농경사회에서는 파종을 하고 모를 낸 후 약간의 휴식시간이 시작되는

시점이다.

때문에 이날 하루는 남녀노소 불문하고 마음껏 놀이를 즐기며 흥겹게 보냈다.

단오날이 되면 약초를 캐거나 창포(菖蒲)를 문에 꽂아두고, 창포물에 머리를

감았다.

단옷날 창포물에 머리를 감는 것은 전국적으로 행해지던 풍습이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통해 잡귀를 쫓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

또 창포는여인의 머리 미용에도 좋았다.

단옷날 한창인 창포를 베어 머리를 감음으로써 그동안 발랐던 동백기름을

지우고 두피를 맑게 씻었다.

학자들은 당시 사람들의 이같은 믿음을 창포가 벌레를 쫓아내는 성질을

가진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다.

실제로 창포 뿌리에는 휘발성 성분인 '아사론'(asarone)과 사포린계

성분이 들어 있다.

이런 물질은 해충이나 곤충을 쫓아냈고, 이는 곧 귀신을 쫓는다는 속설로

이어진 것이라는 게 학계의 분석이다.

또 단옷날에는 창포주(菖蒲酒)나 약주를 마시고, 쑥으로 인형이나 호랑이를

만들어 문 뒤에 걸었다.

이는 약초나 창포, 쑥 등의 강한 향기와 약성으로 재액을 예방하기 위함이다.

또 차륜병(車輪餠)이라고 하여 수리취를 넣어 둥근 절편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단옷날에는 그네뛰기와 씨름, 탈춤 등 여러 가지 다양한 민속놀이가 행해졌다.

해서지방(海西地方)에서는 봉산탈춤, 강령탈춤, 은율탈춤 등 탈놀이 공연을

했고, 강릉지방에서는 남대천의 넓은 공터에서 단오굿판이 열렸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단옷날에는 궁궐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

음력 5월 초닷새 단오절이 되면 왕은 신하들에게 쑥호랑이(애호, 艾虎)를

하사했다.

쑥호랑이는 잔 짚을 사용해 호랑이 모양을 만들고, 비단조각으로 꽃을 묶어

쑥잎을 붙여서 머리에 꽂도록 만든 것이다.

중양절에 수유(茱萸)나무 가지를 머리에 꽂아 나쁜 기운을 없애는 풍속과

비슷하다.

이는 명대(明代)에 이후(李珝)가 편찬한 <세시잡기(歲時雜記)>에 "단오날

쑥을 가지고 호랑이 형상을 만들고, 또 비단을 잘라 작은 호랑이를 만들어서

쑥잎을 붙여 머리에 꽂는다."고 기록된 것을 본뜬 것이다.

 

공조(工曹)에서 단오부채를 만들어 진상하면, 왕은 각 궁의 신하와 시종

(侍從)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를 단오선(端午扇), 또는 절선(節扇)이라

불렀다.

부채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살이 흰 대나무 화살 같은 것이 40~50개나 됐다.

이것을 백첩(白貼)이라고 했고, 칠을 한 것은 칠첩(漆貼)이라고 했다.

이를 받은 신하들은 대개 이 부채에다 금강산 1만 2,000봉을 그렸다.

관상감(觀象監)에서는 붉은 부적을 만들어 왕에게 진상했다.

이를 가지고 관리들이 궁궐 안에 천중부적(天中符籍)을 문설주에 붙여 상서롭지

못한 기운을 막았다.

마찬가지로 진신대부의 집에서도 문설주에 부적을 붙였다.

내의원(內醫院)에선 제호탕(醍醐湯)과 금박(金箔)을 입힌 옥추단(玉樞丹)을

만들어 임금에게 바쳤다.

옥추단은 오색실에다 꿰어서 차고 구급약으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든 것을 말한다.

왕은 단옷날에 제호탕과 옥추단을 가까운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큰 명절인

단옷날을 축하했다.

<예기(禮記)>에는 "중하(中夏)에 함도(含桃)를 제수 삼아 사당에 천신한다"고

기록돼 있다.

여기에서 '함도'란 '앵두'를 뜻한다.

단오 때가 앵두가 익는 시기이므로 제철과일이라고 해서 사당에 천신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기록을 보면 창덕궁 후원에 있는 과실나무들에 과일이 열리면 임금은 제일 먼저

조상인 선왕들에 바치는 단오절사(端午節祀)를 지냈다.

또 임금은 측근에서 총신(寵臣)이나 측근에서 시위(侍衛)하는 신하들에게

앵두를 하사했다.

또 앵두가 익는 단오날 즈음에는 한양의 남녀 젊은이들이 과실나무가 지천인

송동(松洞)과 성북동 지역에서 모여 놀았는데, 이를 '앵두회(櫻桃會)'라고

불렀다.

송동은 서초구에 있는 능안말이라고 불리던 송동 마을을 말한다.

맨 위의 그림은 조선 후기의 화가 '신윤복'의 <단오풍정(端午風情)>이다.

단옷날 여인들이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그네를 타고, 목욕을 하는 모습이

정겹다.

조선시대의 큰 명절 중 하나인 단오(端午)는 전국이 들썩이던 큰 잔치였다.

왕부터 민초에 이르기까지 서로 정을 나누고, 흥겹고 떠들썩하게 보냈다.

예전엔 지금처럼 세상이 혼탁하지 않고 살기(殺氣)도 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순박한 마음으로 자연에 순응하고 또 하늘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24절기와 명절을 기념하며 왕과 백성이 인정을 나누던 아름다운

풍습이 있었다.

살벌한 이 시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 믿고 읽는 김시연 작가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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