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을 비롯한 중화권에서는 음력 1월 15일을 전후한 13일~14일 사이에 온
집안에 등불을 달아서 걸어두고, 식구들이 한 탁자에 빙 둘러앉아 음식(원소)을
먹으면서 서로 축하하며 즐겁게 지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중국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 역시 정월 대보름에 등불을
달고 민속명절로 보낸 것이 여러 군데서 확인된다.
도교에서는 정월 15일 대보름을 상원절(上元節)이라고 불렀다.
때문에 실록에서는 원소절 대신 '상원절'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원소절이 중국에서 풍속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한대(漢代) 초기로 알려져 있다.
기록에 의하면 한(漢) 무제(武帝) 때 한나라 왕실에서는 태일(太一)이라는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태일'은 상당히 유명한 신으로 그 지위가 오제(五帝)보다 높고,
한나라 황제들에게 많은 은덕을 입혔기 때문에 그 제사가 성대했다고 한다.
한나라 문제(文帝) 때도 원소절과 관련된 기록이 있다.
한대 초기에 막강 권력을 휘두르던 '여태후'가 죽은 후, 그의 일족이 정변을 일으켜
제위를 찬탈하려는 모의를 꾸몄다.
그러나 이 음모가 유씨 종실의 제왕인 '유낭' 귀에 들어가자 이들은 급히 손을 써서
여씨 일족을 토벌했다.
이로써 위급했던 일촉즉발의 '제여지란(諸呂之亂)'은 평정됐다.
이들은 유방(劉邦)의 둘째 아들인 유환(劉桓)을 황제로 옹립했다.
그가 바로 문제(文帝)이다.
한 문제는 즉위한 후에 '제여지란'을 진압한 날인 정월 15일을 기념일로 정한 뒤에
원소절(元宵節)이라 이름 붙였다.
이때부터 매년 정월 15일이 되면, 한나라 문제는 궁궐 밖으로 나가 백성들과 함께
원소절을 즐겼다고 전해진다.
중국은 원소절에 중국 각지에서 '위앤사오(원소, 元宵)'를 먹고 관등놀이를 하는
풍속이 있다.
원소는 찹쌀가루를 반죽하여 둥글게 만들고, 그 속에 소를 넣은 음식을 말한다.
이는 '온가족이 한자리에 모인 것'을 의미한다.
원소절에 채색 등롱을 구경하는 것은 서기 1세기 한(漢) 명제(明帝) 때 시작됐다.
그 후에 경성과 민간에서 모두 등불을 장식하는 행사를 했는데, 이를 등회(燈會)
라고 불렀다.
원소절엔 밤새도록 거리에서 꽃등을 구경하며 자유롭고 즐겁게 보냈다.
근대에도 중국에선 원소절 때 관등놀이가 여전히 성행한다.
또 지방이나 농촌에서는 불꽃놀이와 채고교, 용등춤, 사자춤, 모내기춤과 같은
오락활동을 즐긴다.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일본(日本)은 메이지 유신 후 모든 명절을 음력 아닌
양력으로 지낸다.
때문에 양력 정월 대보름을 소정월(小正月)이라고 하여 공휴일로 삼고 있다.
이는 일본이 한국이나 중국과 달리 유교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막부시대의
풍속과 섞어 지내다보니 양력으로 정월 대보름을 기념하게 됐다.
이를 통해 한국과 중국, 일본 모두 한해의 '첫 보름달 뜨는 날'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세시풍속에서도 설날 뒤에 맞는 첫 정월 보름을 '대보름'이라고 칭하며
중요하게 보냈다.
이는 정월 대보름을 한해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고 또 행복과 안녕을 기원하면서
액운을 쫓는 날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정월 대보름에는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는 세시풍속이 많이 전해진다.
우리나라 전체 세시풍속의 20%가량이 대보름날을 맞아 치러질 정도이다.
예로부터 정월 대보름에 만들어 먹는 별식을 '상원절식'이라고 하는데, 오곡밥과
약식, 귀밝이술·부럼·복쌈·진채식 등이 있다.
대보름날 새벽에는 땅콩과 잣, 호두, 밤 등 부럼을 자기 나이 수대로 깨물며 종기나
부스럼이 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원했다.
호두, 잣, 밤, 땅콩 등의 견과를 껍데기 채 "오도독" 소리가 나게 깨무는 '부럼'은
'부스럼' 에서 유래된 말이다.
또 일년 내내 기쁜 소식만 전해달라고 소원을 빌며 부녀자와 애들 모두 '귀밝이술'
(耳明酒)을 마셨다.
대보름 전날 저녁에는 쌀, 팥, 콩, 조, 수수를 넣어 오곡밥을 지어 이웃과 나눠먹고
갖가지 나물들을 삶아서 기름에 볶아 먹었다.
이런 묵은 나물을 '진채'라고 한다.
가을이 되면 호박고지, 박고지, 말린가지, 말린버섯, 고사리, 고비, 도라지, 시래기,
고구마순 등 적어도 9가지 나물들을 손질해서 겨울동안 잘 말렸다가 정월 대보름
하루 전 나물들을 삶아서 기름에 볶아 먹었다.
또 이 날은 세 집 이상의 남의 집 밥을 먹어야 그 해 운이 좋다고 하여 이웃간에도
서로 오곡밥을 나누어 먹었다.
배추잎이나 김, 또 참취나물 이파리를 넓게 펴서 쌈을 싸 먹는 복쌈(복리:福裏)은
한 입 가득 복을 싸 먹으면서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던 풍습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밖에도 정월 대보름에는 여러가지 풍속이 있었다.
더위먹지 않고 여름을 무사히 보내기 위해서, 보름날 이른 아침 친구에게 찾아가
이름을 불러 대답하면 "내 더위 사가라."고 말하는데 이를 '더위 팔기'라고 한다.
농사가 잘되고 마을이 평안하기를 기원하면서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지신(地神)
밟기'와 '차전(車戰)놀이' 등을 벌이고, 한 해의 나쁜 액을 멀리 떠나보내는 의미로
연줄을 끊어 하늘로 연을 날려 보내는 풍속이 있다.
저녁에 대보름달이 솟아오르면 횃불을 땅에 꽂고 합장하며 저마다 소원을 빌면서
논과 밭의 두렁에 불을 질러 잡귀와 해충을 쫓는 '쥐불놀이'를 했다.
또 한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달집 태우기'와 부녀자들의 집단적 놀이인 '놋다리
밟기',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집 근처의 다리로 나와서 다리를 밟으면 한해의 액을
막고서 복을 불러들인다고 믿던 '다리 밟기' 놀이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엔 정월 대보름인 상원절과 관련된 이런 기록들이 있다.
1412년 1월 15일(태종 12년),
태종이 태일(太一)에 제사지내는 상원절(上元節)이므로 금중(禁中)에 등(燈)을
매달았다.
내자시(內資寺)·내섬시(內贍寺)에서 각각 종이 등(燈) 5백 개를 바치고 또 용봉
(龍鳳), 호표(虎豹)의 모양으로 섞어서 만든 것이 또한 많았다.
처음에 등(燈)을 달고자 태종이 15일에 예조 참의(禮曹 參議) 허조(許稠)를
불러서 고전(古典)에 상고하고 하윤(河崙)에게 물어서 아뢰도록 하였다.
허조(許稠)가 아뢰기를 “문헌통고(文獻通考)에 상고하여도 없고 오직 고려국
상정례(詳定禮)에만 나와 있는데, 그 기원(起原)은 한(漢)에서 태일(太一)을
제사지냄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하였다.
내자시, 내섬시에서 각각 한 사람을 불러 말하기를 “정월 보름 상원절(上元節),
7월 보름 백중 중원절(中元節), 10월 보름 하원절(下元節)인 3원절(三元節)에
연등(燃燈)하는 것을 대략 사림광기(事林廣記)에 모방하여 되도록 간이(簡易)한
데 따르고 용봉, 호표의 괴이한 모양을 만들어서 천물(天物)을 지나치게 허비하지
말라.” 하니 좌사간 대부(左司諫大夫) 윤회종(尹會宗)이 나와 “궁중에서 연등
하는 것이 성인의 제도가 아니니 원컨대 파하소서.”하니 태종이 “내가 연등행사를
크게 행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궁중에서 잠깐 시험하는 것뿐이다.”하였다.
하루 앞서 태종이 “정월 보름 상원절에 연등하는 것이 한(漢)부터 시작되었으니,
폐할 수는 없다.”하고 비로소 북쪽 궁원(宮苑)에 연등하는 걸 구경하고 등(燈)을
만든 장인(匠人) 26인에게 사람마다 쌀 1석을 내려 주었다.
1770년 1월 14일(영조 46년),
영조가 상원절(上元節)에 민간의 광통교(廣通橋)를 중심으로 하여 열 두 다리를
밟으면 그 해의 재액(災厄)을 면한다 하여 달 아래에서 즐거이 놀던 답교(踏橋)를
하기 위하여 의금부에 명하여 밤에 통행 금지를 해제하게 했으니, 백성들과 나라가
안정되어 아무 걱정 없고 평안한 태평(太平)을 같이 즐기는 뜻을 보인 것이다.
1771년 1월 15일(영조 47년)
영절(令節)에 성문을 열어서 야간의 통행금지를 해제하는 방야(放夜)를 하도록
명하였는데, 정월 대보름날 상원절(上元節) 밤에 답교(踏橋)하는 놀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1781년 1월 17일(정조 5년)
한성부에서 정조에게 아뢰기를 “매 년 상원절(上元節) 전야(前夜)가 되면 각
동시(洞市)의 아이들이 으레 모여서 체용(體俑)을 두드리는 놀이를 합니다.
이번에는 동임(洞任)들이 모여서 두드리는 놀이를 하지 말도록 여러 가호(家戶)에
지휘하여 마치 금령(禁令)이 있는 것처럼 했기 때문에 자못 소요가 이는 폐단이
많았습니다. 이미 상사(上司)의 지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가 여리(閭里)에
소요가 일게 하였으니, 청컨대 해당 각 부(部)의 그 날 입직(入直) 관원(官員)들을
모두 잡아다 추문하여 감처하소서.”하였다.
* 믿고 읽는 김시연 작가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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