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 마지막 공주인 덕온공주(德溫公主, 1822년~1844년) 인장(印章)이
5월 한국에 돌아온다.
지난 4월 18일, 미국의 대형 경매사인 뉴욕 크리스티(Christie's Auction)
경매장에 나온 유물이 고미술 전문가에 의해 덕온공주의 인장으로 확인이
되면서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 관계자가 뉴욕에으로 날아가서
23만 7천 5백 달러에 낙찰받았다.
이에 국보급 유물의 환수가 가능해진 것이다.
2만 달러에 시작된 경매가는 열기가 높아져 10배 이상 가격이 뛴 것으로
알려졌다.
위의 사진을 보면 공주의 인장으로는 보기 드물게 화려하고, 방울목걸이를
달고 있으며, 금속 공계기법으로는 매우 독특하고 섬세하며 생동감 있게
만들어졌다.
전문가는 "갈기와 문양까지 세밀하게 표현된 생동감은 이 시기 다른 금속
공예품에서는 볼 수 없는 뛰어난 기술적 역량을 보여 주고 있다"며 문화재
가치가 매우 높은 국보급 유물이라고 평가했다.
덕온공주 인장은 구리로 제작된 뒤 도금된 것이다.
크기는 인면(印面, 도장에서 글자가 새겨진 면)이 가로 세로 각각 8.6㎝이고,
인장의 전체 높이는 9.5㎝이다.
현재 국내에 있는 조선 왕실 공주의 인장은 고려대 박물관에 있는 효종 딸인
숙휘공주(1642~1696)의 인장과 선조의 딸인 정명공주(1603~1685)의 인장
단 2점 뿐이다.
한데, 덕온공주의 인장은 이 2개의 인장(아래 사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하고 또 정교한 금속 공예기법이 돋보인다.
사랑과 정성으로 고급스럽게 만들어져 인장에서도 권력이 엿보인다.
보존 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덕온공주 인장은 국가에서 소유하는 공주의 인장으로는 유일한 것이 된다.
문화재적 가치가 높고 중요한 학술연구 자료로 평가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일부 언론에서 인장 손잡이 역할을 하는 동물이 전설 속 동물인 해치(獬豸)
라고 보도를 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해치가 아닌 사자이다.
왕과 왕후의 어보(御寶)에 쓰이는 동물은 거북이고, 후궁과 공주의 인장에
사용하는 동물은 사자이다.
인장은 공주가 혼례를 치루고 출궁하면서 사가(私家)에 가지고 가는 물건
으로 공주의 왕실 신분을 보증하는 핵심 물품이다.
공주의 존재와 지위를 드러내는 의례용인 동시에 필요시 날인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공주는 혼인하는 즉시 남편인 부마(駙馬) 가문의 일원이 돼 외명부에 속하는
왕실 외부인이 된다.
이에 공주에게 속한 일체의 재산이나 물품은 모두 부마 가문의 소유가 된다.
때문에 덕온공주의 인장은 왕실 소유가 아닌 사가의 물품이었다.
이런 이유로 우리 정부가 경매업체에 거래 금지 요청을 하지 못한 채 직접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 참가하게 됐다.
그렇다면 덕온공주(德溫公主)는 누구인가?...
덕온공주는 조선 제23대 왕 순조(純祖)와 순원왕후 사이에 태어난 셋째딸로
2남 3녀 중 막내이다.
부모의 사랑과 총애가 극진했다고 알려진 인물로 조선시대 마지막 공주이다.
이는 화려한 인장만 봐도 증명이 된다.
'덕온'은 덕스럽고 온화하다는 뜻으로 공주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다.
오빠가 후에 익종(翼宗)으로 추존된 효명세자 '영(旲)'이다.
순원왕후는 내가 쓴 역사소설인 <이몽(異夢)>을 이끄는 주축 인물로 철종을
양자로 입적시켜 조선 제25대 왕으로 즉위시켰다.
순조와의 사이에 2남 3녀를 두었지만, 아들 한명은 일찍 조졸했고 효명세자도
22세로 요절했다.
딸은 명온공주, 복온공주, 덕온공주 세명이다.
덕온공주(德溫公主)는 1837년 16세 때 남녕위(南寧尉) 윤의선(尹宜善)과
혼례를 올렸다.
당시 관습과 달리 늦게 혼인한 것은 순조의 승하 때문이었다.
어머니 순원왕후처럼 책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했던 덕온공주는 혼례 후 출궁할
때 무려 4천 권이 넘는 한글과 한문 책을 가지고 갔다.
당시 덕온공주가 살던 집을 저동궁(苧洞宮)이라고 불렀다.
저동에 있기 때문에 저동궁으로 불렸다.
본래는 혼례 후 시댁으로 들어가는 것이 관례지만, 덕온공주는 시댁과 분리된
신혼집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특혜를 누렸다.
이는 몸이 약한 딸에 대한 순원왕후의 배려였을 것으로 보인다.
안동 김씨 권세의 주축이던 순원왕후는 8세로 즉위한 손자 헌종의 수렴청정을
7년 동안 한 뒤, 줄곧 대왕대비로 있었기 때문에 당시 권세가 대단했다.
그로부터 7년 후인 1844년(헌종 10), 덕온공주는 23세로 요절했다.
조카인 헌종의 후궁을 뽑는 궁궐행사에 참석했다가 점심 때 먹었던 비빔밥이
급체하는 바람에 당일 급사했다.
대왕대비인 어머니 순원왕후는 물론 조카 헌종의 슬픔과 충격은 컸다.
특히 순원왕후는 자식이 3명이나 요절하는 참척(慘慽)을 당해 그 비통함이
극에 달했다.
헌종 또한 자신의 후궁을 뽑는 문제로 입궁했다가 화를 당한 고모 일이 큰
트라우마로 남았을 것이다.
덕온공주는 비록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주위의 많은 사랑을 받고 호사를
누려 유물이 다수 남아있을 정도로 존귀한 삶을 살았다.
덕온공주가 입었던 당의(唐衣)는 현재 국가민속문화재 제1호로 지정돼 있다.
또 어머니 순원왕후가 딸에게 보낸 사랑과 애정이 넘치는 편지가 수십 점이나
남아있고, 내용 또한 절절해 막내딸에 대한 총애가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순원왕후가 덕온공주 혼수용품을 적은 한글 '혼수 발기(發記)'엔 온갖 다양한
물품들이 적혀있어서 딸과 사위에 대한 사랑이 차고 넘쳤음을 보여준다.
2016년에는 국립한글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3개월 동안 덕온공주의 미공개
덕온공주 이후에는 왕실에 더 이상 공주(公主)가 태어나지 않았다.
모두 옹주(翁主)만 태어났다.
공주와 옹주는 모두 왕의 자식이지만 정실에게서 태어났느냐, 후궁에게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그 호칭이 달라진다.
공주(公主)란 말은 주나라 선왕(宣王) 때 처음 쓰였던 명칭이다.
선왕이 딸을 시집보내면서 이 혼례를 제후인 공(公)에게 맡겼는데, 당시엔
혼례를 주관한 사람을 가리켰던 단어이다.
공주는 '공이 받들어 모신 주인'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훗날 왕 또는 황제의 딸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고려 때에는 공주가 정1품이었지만 법제화되지는 않았다.
조선시대 성종 때 이르러서야 『경국대전』 「외명부조(外命婦條)」에서
제도화시켜 왕의 정실이 낳은 딸은 공주, 후궁이 낳은 딸은 옹주로 부르기
시작했다.
<덕온공주의 당의(唐衣)/국가민속문화재 제1호/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좌 : 숙휘공주 인장, 우: 정명공주 인장/고려대학교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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