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 왕비가 사용했던 보물급 인장(印章) 2개가 발견됐다.
문화재청은 오늘, 경복궁 서쪽에 위치한 서울 종로구 통의동의 유적지에서
내교인(內敎印)과 소내교인(小內敎印)이 각각 1과(顆)씩 출토됐다고 밝혔다.
발굴조사 중에 내교인이 출토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국새(國璽)는 국권의 상징이자 표상으로, 왕이나 대리인이 국가적 문서에
사용했던 인장이다.
내교인(內敎印)은 내명부(內命婦)의 수장인 왕비가 사용했던 결재(決裁)
도장을 말한다.
그동안 우리나라에 있던 내교인은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된 2과가 전부였다.
내교인 2과가 발굴된 곳은 경복궁의 서문인 영추문(迎秋門) 서쪽 지역으로
서촌(西村)으로 불리는 통의동이다.
주변에는 조선 시대 관청인 사재감(司宰監) 터와 조선 제21대 왕인 영조의
사가였던 창의궁(彰義宮) 터가 인접해있다.
사재감은 조선시대에 어물, 육류, 식염, 소목, 거화 등에 관한 일을 담당했던
관청이다.
* 인장들의 인면(印面)에는 각각 <내교(內敎)>라는 글자가 전서체(篆書體)로 새겨져
있다.
전서체는 한자의 대표 서체 중 하나로 진시황제가 제정한 글씨체이다.
도장을 팔 때 많이 사용하는 서체이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14년(1761년)의 기록을 통해 '내교인(內敎印)'이 조선시대의
왕비가 사용한 도장임을 확인할 수가 있다.
자전(慈殿)에는 자교(慈敎)가 있고, 내전(內殿)에는 내교(內敎)라 일컬으며
빈궁(嬪宮)에는 내령(內令)이라 일컫는다.
이에 만약 도서(圖署)하게 되면 세손빈에도 마땅히 그 표시가 있어야 하니
내음(內音)이라 하여 체제를 백자(白字)와 같이 하고, 궤짝과 흑통(黑筒)을
갖추되 정원에서 만들어 들이게 하라.
<영조실록(英祖實錄)> 98권, 영조14년(1761) 10월 22일조>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서 소장 중인 <명례궁봉하책(明禮宮捧下冊)>과
<명례궁상하책(明禮宮宮上下冊)>에는 왕실 재산을 관리했던 명례궁에서 관리하던
물품의 종류와 지출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본문엔 먹으로 찍힌 '內敎印'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이를 통해 명례궁 지출에 대한 검수가 내명부(內命婦) 수장인 중전의 거주지 왕비전
(王妃殿)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알 수가 있다.
명례궁(明禮宮)은 조선 전기 월산대군 사저였던 연경궁(延慶宮)에 설치됐던 관청이다.
지금의 덕수궁 자리이다.
월산대군 사저는 임진왜란 당시 의주에서 환도한 선조의 행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임진왜란 이후엔 왕실의 토지와 재산을 관리하는 내탕(內帑) 역할을 하는 명례궁이
이곳에 설치됐다.
'내탕'은 조선 시대 왕의 개인적인 재산 즉 사재를 보관하던 창고인 내탕고를 뜻한다.
임금이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재물을 내탕금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조선시대엔 내수사(內需司)가 왕실의 사유재산을 관리하는 기관이었다.
1897년(광무 1) 고종이 대한제국의 법궁인 경운궁(慶運宮)을 건설하면서 명례궁은
그 규모가 축소됐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907년(융희 1)에는 궁장토의 정리 과정에서 어의궁(於義宮),
수진궁(壽進宮) 등의 궁가와 함께 역사에서 사라졌다.
위치는 현재 중구 정동에 위치한 덕수궁(德壽宮) 지역 내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
된다.
명례궁(明禮宮)에 대한 기록은 광해군대부터 고종 연간까지 꾸준히 <조선왕조실록>
에 등장한다.
이번에 출토된 '내교인'은 2단으로 구성된 정사각형의 인신(印身) 위에 뒷다리는
구부리고 앞다리는 곧게 펴 정면을 보고 있는 동물(충견(忠犬)으로 추정) 형상의
인뉴(印紐, 손잡이)가 있다.
또 위로 솟은 꼬리와 목까지 늘어진 귀에는 세밀한 선으로 디테일하게 세부 묘사가
돼있다.
이 내교인보다 다소 크기가 작은 '소내교인'도 같은 형상인데, 동물의 고개는 정면이
아닌 약간 위를 향한 모습이다.
'내교인'의 인장은 너비가 4cm×4cm, 높이 5.5cm이고, '소내교인'은 인장 너비가
2cm×2cm에 높이 2.9cm이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소장 중인 조선과 대한제국 국새를 포함한 왕실
인사의 보인(寶印, 의례용 인장)과 부신(符信)을 정리해 고종 연간 (高宗 年間)인
1902년(광무 6년) 무렵에 간행된 <보인부신총수(寶印符信總數)>에는 '내교인'과
'소내교인' 2과(顆)에 대한 도설(圖說)과 크기, 재료 등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한데, 이번에 서촌(西村) 통의동에서 출토된 내교인 2과와 그 조형적 특징이 매우
흡사해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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