醉花陰
(꽃 그늘에 취해)
薄濃雲愁永晝 안개 옅어지고 구름 짙어지면 근심에 긴 낮
瑞腦消金獣 용뇌향도 쇠 향로에서 사라지고
佳節又重陽 계절은 좋아 다시 중양절인데,
枕紗廚 옥베게에 명주 장막
半夜涼初透 한밤 찬기운이 처음으로 사무치네.
東籬把酒黄昏後 동쪽 울타리에서 술 마시다 황혼이 지나니
有暗香盈袖 은근한 향기 소매에 차네.
莫道不消魂 정신 아득하지 않다 말하지 마라.
簾捲西風 주렴을 걷으면 서풍 불어
人比黄花痩 사람이 노란 국화꽃처럼 여위네.
<이청조(李淸照)>
* 오늘은 중양절(重陽節)이다.
중국이 자랑하는 최고의 여류 문학인이자 송대를 대표하는 여류 사인(詞人)
수옥 이청조의 사(詞) '취화음'에도 나오는 중양절은 음력 9월 9일이다.
9가 두 번 겹친다고 하여 중구절(重九節), 또는 '중굿날'이라고도 칭한다.
홀수는 양(陽)의 기운을 의미하기 때문에 양수(陽數)라고 일컫는다.
한데 양수가 두 번 겹치니 밝고, 높고, 따뜻한 것을 겹겹으로 두었다고 생각하여
고래로부터 더욱 경사스러운 날로 여겼다.
고대에서 음력 1월 1일 설날, 5월 5일 단오, 7월 7일 칠석, 9월 9일 중양절 등
등 홀수가 두 번 겹치는 날을 국가적인 큰 명절로 지낸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중양절은 우리나라 고유 명절이 아닌, 중국 한족(漢族)의 전통 명절이다.
중국에선 한나라 이래로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당대(唐代)에
들어와 중양절을 큰 명절로 지내기 시작했다.
중국 고대(古代)의 중양절은 중추절보다 더 큰 명절로 생각해 국가가 들썩일 정도로
정도로 큰 절일(節日)로 보냈다.
그런 만큼 음력 9월 9일을 지칭하는 명칭도 다양하다.
삼삼일(三三日) 또는 국신(菊辰)이라고도 하며, 진(晉)나라 환온(桓溫)이 막료
들과 함께 용산(龍山)에 오른 적이 있다 하여 중양절을 용산지회(龍山之會)라고도
불렀다.
속설에는 제비가 3월 3일에 왔다가 중양절에 강남으로 떠난다고 한다.
이때가 바로 첫 서리가 내리는 상강(霜降) 때 쯤이다.
올해는 10월 23일 월요일이 상강이었다.
중국 고대사회에서는 9를 양수의 극(極)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9를 길상(吉祥)의 숫자로 여겼다.
특히 9월 9일은 9가 겹쳐 최고의 '길상(吉祥)의 날'로 여겨, 중국에선 10월 10일
쌍십절과 함께 큰 명절로 지냈다.
세시풍속인 등고회(登高會)는 중양절의 중요한 행사 중 하나이다.
'등고'란 산수유 열매를 담은 붉은 주머니를 팔뚝에 걸고 높은 산에 올라가
국화주를 마시며 재액을 소멸시키는 풍습을 말한다.
이에 관한 풍속은 선인 비장방(費長房)에서 유래한 것이다.
산수유 나무는 나쁜 기운을 물리친다는 속설이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왔다.
중국은 중양절에 우산(牛山)에 올라 눈물을 흘렸다는 제나라 경공(景公)에 대한
기록을 근거로 중양절이 이미 전국시대부터 행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양절은 '취화음"을 쓴 수옥(漱玉) 이청조가 활동한 송대(宋代)에도 중요한 명절
중 하나였다.
기록을 보면, 우리나라는 신라시대부터 중양절을 명절로 지내기 시작해 조선
말기까지 중요한 절일(節日)로 지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때는 국가적인 큰 행사로 중양절을 보냈다.
이때는 궁궐에서 큰 잔치를 베풀어 군신(君臣)이 더불어 즐거움을 함께 했다.
조선시대에도 중양절을 큰 명절로 지냈다.
조선 제4대 왕인 세종(世宗)은 삼월 삼짇날(음력 3월 3일)과 음력 9월 9일인
중양절을 명절로 공인했다.
또 연로한 대신들을 위한 잔치인 기로연(耆老宴)을 추석에서 중양절로 바꿨다.
이 날 왕과 신하가 모여 시조를 짓는 백일장을 열어 군신 간의 친목을 도모했다.
반면에, 백성들은 이날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거나 성묘 또는 시제를 지냈다.
이는 음력 9월 9일이 되면 천국(天國)의 문이 열려, 혼백들이 구천에서 즐겁게
노니는 혼백들의 명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중양절에 국가 의례인 둑제(纛祭)를 시행했다.
둑제는 조선시대에 군대를 출동시킬 때 군령권을 상징하는 둑(纛, 지휘부 깃발)에
지내는 국가 차원의 제사를 말한다.
소사(小祀)로 분류되기 때문에 왕 대신, 왕명을 받은 병조판서가 주관해 제사를
지냈다.
일 년에 두 번, 음력 2월인 경칩(驚蟄)과 음력 9월 9일인 중양절에 병조판서가
왕을 대신해 둑제를 올렸다.
국방을 담당하는 병조(兵曹)의 둑제는 중요한 국가적 행사 중 하나였다.
중양절 즈음은 국화(菊花)가 만발하는 시기이다.
때문에 민간에서는 중양절 날 산에 올라가 국화주를 마시며 詩를 읊거나 풍광이
아름다운 수려한 산수를 즐겼다.
이날 각 가정마다 '유자 화채'와 '밤단자'를 만들어 먹고, 또 국화전(菊花煎)을
부쳐서 먹었다.
국화전은 찹쌀가루를 반죽해 빚은 다음, 그 위에 노란 국화 꽃잎을 얹어 기름에
지진 음식이다.
삼월 삼짇날에는 진달래로 꽃달임을 해먹었고, 중양절에는 노란 국화 꽃잎으로
국화전을 해먹었다.
또 수유(茱萸)나무 가지를 머리에 꽂아 나쁜 기운을 없애는 등고(登高)라는 풍속도
풍속도 행했다.
중양절은 자연을 소중히 생각하고, 자연을 벗하며, 자연을 존중하고, 또 자연의
순환인 사계절을 순리대로 순응해 풍류를 즐기며 살았던 옛사람들의 아름답고
멋스러운 세시풍속이다.
이런 중양절의 아름다운 세시풍속(歲時風俗)은 조선 말기 한양의 연중행사를
기록한 책《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 기록돼 있다.
열양세시기는 1819년(순조 19) 김매순(金邁淳)이 저술한 한양(漢陽)의 연중
행사를 기록한 책이다.
열양(洌陽)은 한양, 즉 지금의 서울을 뜻한다.
또 중양절에 대한 세시풍속은 순조 때 학자인 도애 홍석모(洪錫謨)가 조선 후기
연중행사와 풍속들을 정리하고 설명한 세시풍속집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에도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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