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진(御眞) 제작의 본래 목적은 '성자신손(聖子神孫)'과 '보은사상(報恩思想)’이다.
그러나 어진 자체가 국가를 상징하는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어진을 제작하는 것은 국가적인 큰 행사였다.
어진 제작에는 군왕 이하 여러 대신들과 당대 최고의 화사(畫師), 공장(工匠)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원이 총동원됐다.
조선 후기의 왕들은 거의 다 어진을 그렸다고 전해진다.
정조는 특별한 행사 때마다 어진을 그렸다.
즉위년, 즉위 5년, 즉위 15년에도 어진 제작이 이어졌다.
허나 다 사라지고, 현존하는 정조의 어진은 <선원보략(璿源譜略)>에 모사본이
남아있다.
그러나 30여 년 전에 그려진 엉뚱한 상상화가 현재 정조의 모습을 대신하고 있어
안타까움을 남긴다.
조현병인 심질(心疾)을 앓았던 선조는 어진 그리기를 거부해서 어진을 남기지 않았다.
일부 왕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남아있던 어진은 임진왜란 때 궁궐이 모두 불타면서
많이 손실됐다.
거기다 6.25 동란 때 전란을 피해 부산 국악원으로 옮겨진 어진들은 이곳에 화재가
나는 바람에 거의 다 소실됐다.
현재는 전주 경기전(慶基殿)의 태조 어진, 서울 창덕궁의 영조 어진, 그리고 익종의
어진과 철종의 어진이 남아있다.
익종은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이자 헌종의 아버지이다.
재위 기간이 길었던 영조는 10년마다 초상화를 그리게 해 총 7번 어진을 제작했다.
그러나 현재는 51세 때의 용안과 21세 연잉군 때의 초상화만 남아있다.
조선의 마지막 황제인 고종과 순종은 어진 대신 사진을 남겼다.
초상화는 후에 그려진 그림이다.
철종은 재위 기간 동안 총 두 번의 어진을 제작했다.
첫 번째 어진은 즉위한지 3년 되던 해인 1852년 그려졌다.
그러나 이 그림은 전해지지 않는다.
두 번째 어진이 바로 현재 전해지는 구군복(具軍服)을 입은 모습이다.
그러나 절반 정도가 6.25 동란 때 불타 사라지고, 1987년에야 복원됐다.
철종의 어진 한 본만 가지고도 이 초상화를 통해 엄청난 역사적 사실들을 찾아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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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종 어진(御眞) 완전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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