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식목일이자 한식(寒食)이다.
한식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엔 4대 명절에 속할만큼 큰 명절이었다.
식목일답게 오늘 온종일 봄비가 촉촉히 대지를 적셨다.
조선의 왕 중에 가장 검소한 생활을 한 임금을 꼽으라면 단연 조선 제21대 왕인
영조(英祖)와 제22대 왕 정조(正祖)이다.
두 임금은 호의호식을 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관련 전문가들은 영조가 조선 임금중 최장수를 한 것이 육식을 즐기지 않고 거친 음식
즉 채식을 위주로 수라를 저수신 것 등 검소함에 그 원인이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정조 또한 검소한 임금으로 이름이 드높다.
저자거리에서 떡 한 조각에 배불러 했던 정조는 비가 새는 영춘헌(迎春軒)에서
기거할 때는 건물을 새로 짓자는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보수만 한 채
지냈다.
또 의복에 있어서도 검소함의 극치를 보였다.
박학다식했던 정조(正祖)는 조선 최고의 조경(造景) 전문가였다.
재위 기간 동안 정조는 1200만 그루의 나무를 심은 식목왕으로 알려져 있다.
정조는 식목을 할 나무를 고를 때도 백성들이 열매를 먹을 수 있는 밤나무나 참나무,
도토리나무 같은 유실수를 선호했다.
또 옷을 해 입을 수 있는 뽕나무나, 새 불을 만들 때 사용하거나 재를 탄약으로 쓸
수 있는 버드나무 등을 많이 심었다.
버드나무는 가구와 땔감은 물론 옷고리를 만들고, 유목지(柳木紙)라는 종이를 만드는
원료로 사용됐다.
뿐만 아니라 형벌에 사용되는 형구(形具)인 곤장(棍杖)을 만들었고, 버드나무를
태우고 난 재(灰)는 화약을 만드는데 사용했다.
대신 정조는 화려한 꽃만 감상하는 화훼(花卉)의 진상을 엄격히 규제하여
최소한의 공물(貢物)만 바치도록 조치했다.
정조가 가장 좋아했던 나무는 바로 석류(石榴)이다.
정조의 석류에 대한 사랑은 아주 유명했는데, 이를 <홍재전서(弘齋全書)>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예전에 궁중에 석류화(石榴花) 5,6백 분(盆)이 있었는데, 연침(燕寢)의 뜰
가운데에 배치하되, 팔진법(八陣法)을 써서 석퇴(石堆)를 벌여놓은 형세와
다름없이 하라고 명한 것은 깊은 뜻이 담겨있다."
"나는 본래 화훼(花卉)를 좋아하지 않는다.
오직 석류만이 잎이 돋아나고 꽃이 필 때부터 열매를 맺어 익을 때까지 그 절후
(節候)의 이르고 늦음이 벼와 하나하나 부합된다.
그러므로 매우 기뻐하여 뜰 앞 계단 아래에 항상 석류 몇 그루를 남겨두었다."
"내가 왕위에 오른 뒤로 일찍이 화훼에 뜻을 둔 적이 없어서 그 공물을 없애고자
하긴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삶 또한 매우 불쌍히 여길만 하기 때문에, 형식만은 남겨둔다는
뜻으로 가을 국화와 여름 석류 약간 분(盆)을 그들로 하여금 사두도록 하면서
여염에서 빼앗아 오는 폐단을 일체 금하여 끊도록 하였으니, 이른바 동산 별감은
이름만 남아있을 뿐이다."
학명이 punica granatum인 석류(石榴, pomegranate)는 원산지가 서아시아와
인도 서북부 지역이다.
중국에는 한무제(漢武帝) 때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왔고, 우리나라는 고려 초기에 중국을
통해 들어왔다.
재위 내내 모든 일에 있어 실용성을 추구하던 정조 임금이 좋아한 석류나무는 5~7m
까지 자라는데, 아름다운 꽃뿐만 아니라 열매와 줄기, 가지, 뿌리의 껍질까지
약용으로 쓰이는 한마디로 버릴 게 하나도 없는 나무이다.
실제로 석류엔 폴리페놀(카테킨과 안토시아닌 포함)과 비타민B와 C, 칼륨 등의
성분이 많이 들어있어 현대 의학에 있어서도 강력한 항산화제로 꼽힌다.
특히 석류 쥬스에는 '푸니갈라진'이라는 성분이 많이 들어있는데, 이 성분은 해독
작용을 촉진시키고 대장암을 억제하는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성의 고충에 귀 기울이며 특히 애민(愛民) 정신이 깊었던 정조는 석류꽃이 붉게
필 무렵에 누에고치를 말리고 또 모내기를 하는 바쁜 민초들의 일상을 생각하곤
했다.
대개 석류꽃이 필 무렵 모내기를 하고, 석류열매가 익을 무렵에 벼 수확을 한다.
정조는 궁궐 뜰앞에 놓인 석류화분에서 핀꽃을 보며 모내기에 땀 흘릴 백성들을
걱정하고, 석류가 익을 무렵이면 벼를 수확하는 백성들의 노고를 떠올리곤 했다.
정조를 성군(聖君)이라고 하는 건 이처럼 백성을 측은지심으로 바라보며 민초들을
염려하고 위하는 지극한 마음 때문이다.
석류나무 열매가 익어 가는 과정은 아이에서부터 어른까지 차츰 커져가는 음낭의
크기와 그 모양이 닮아 있다.
열매의 이런 특징은 다산(多産)의 의미와 함께 음양의 상징성이 있어 석류 문양은
옛 여인들의 신변 잡품(雜品)에 다양하게 쓰였다.
조선시대 왕비의 대례복(大禮服)과 귀부인들의 예복인 당의(唐衣)는 물론, 골무와
안방 가구 등에도 석류 문양이 즐겨 사용됐다.
또 여인들은 비녀머리를 단장할 때 석류꽃 모양으로 새긴 석류잠(石榴簪)을 꽂았고,
당시 여인네들이 차고 다닌 향낭(香囊) 또한 음낭을 상징하는 석류나무의 열매
모양으로 만들었다
석류나무는 중국이나 우리 역사 속에만 등장하는 나무가 아니다.
《구약성서》 출애굽기(28장 33절)에는 대제사장이 입을 예복의 겉옷 가장자리에
석류를 수놓고 금방울을 달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석류나무는 포도와 함께 성서(聖書)에 여러 번 등장하고, 솔로몬 왕은 석류나무 과수원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기독교에서는 석류나무가 에덴동산의 '생명의 나무'로 묘사되기도 한다.
석류는 15세기 이탈리아의 유명한 화가인 보티첼리의 그림 〈성모의 석류〉소재가
되기도 했다.
이를 볼 때, 정조가 좋아했던 석류나무는 신비의 나무임이 분명하다.
<성모의 석류(石榴),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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