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 김홍도 (1745∼1806), 소림명월, 병진년 화첩(1796년), 수묵담채 26.7×31.6cm, 보물 782호.
호암 미술관 소장.>
* 오늘은 백중(百中)이다.
백중은 고대의 전통적인 명절 중 하나로 음력 7월 15일을 백종(百種), 백종(白踵),
또는 중원(中元), 망혼일(亡魂日)이라고 불렀다.
백중은 고래로부터 이어져 온 명절로 조선시대엔 11대 민속 명절 중 하나였다.
신라를 거쳐 고려시대부터는 국가적으로 시행해온 유서깊은 절일(節日)이다.
조선시대엔 설과 정월대보름, 음력 2월 초하루, 3월 삼질, 4월 초파일, 5월 단오,
유월 유두, 7월 백중, 8월 추석, 9월 중구, 11월 동지를 민속 명절로 기념했다.
조선시대 백중날엔 종묘(宗廟)에 이른 벼를 베어 천신(薦新)을 했다.
천신이란, 새로 농사지은 과일이나 곡식을 먼저 사직(社稷)이나 조상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바치는 의식을 말한다.
실록을 읽어보면, 백중날 천신 외에도 조선의 왕들은 새로운 곡식이나 과일이 소출되면
선왕의 신위(神位) 앞에 가장 먼저 바치곤 했다.
특히 효성이 지극했던 조선 제 25대 왕 철종은 창덕궁 후원에서 햇과일을 거두게 되면,
가장 먼저 선왕인 헌종에게 바치거나 양모인 대왕대비 순원왕후에게 올리곤 했다.
『철종실록』을 읽어보면 이런 대목이 여러 군데 나온다.
여염집에서도 잘 익은 과일들을 따서 백중날 조상의 사당에 천신을 올린 뒤에 먹는
천신 차례를 지냈다.
불자 외에는 백중이 뭔지도 모르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중국과 일본,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에선 아직까지도 백중을 큰 명절로 기념하고 있다.
백중은 외국에 많이 있는 차이나 타운의 영향으로 외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 명일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불가(佛家) 쪽 외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는 한국을 침탈한 일본이 우리의 민속 명절을 강제로 없앤 것과 무관하지 않다.
백중을 백종(白踵)이라고도 한 건 조재삼(趙在三)이 철종 6년(1855)에 저술한
『송남잡지(松南雜識)』세시류(歲時類)에 나온다.
이 책에는 중원 백종조(中元 百種條) 밑에 작은 글씨로 “승가에서는 이날 모두 발을
씻어 백종이라 했다(僧家是日皆洗足故謂白踵).”라고 쓰여있다.
또 최남선은『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問答)』에서『송남잡지』의 내용을 소개하며
백중을 발꿈치 종(踵) 字를 사용해 백종(白踵)이라고도 쓴다고 기록했다.
조선 후기에 간행 된 『동국세시기』엔 백중날, 스님들이 재를 올리고 불공을 드리는
큰 명절로 여겼다는 기록이 있다.
백중(百中)은 고려시대 이전인 고대부터 국가적인 큰 행사로 모든 백성이 참여하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명절이었다.
신라 때에는 백중을 기해서 삼(대마) 삼기가 시작됐다.
도성 안의 부녀자를 두 파로 나누고 공주로 하여금 각 파를 이끌어 한 달 동안 삼을 삼아
8월 가윗날(한가위)에 그 성적을 심사해서 진 편이 이긴 편에 한턱을 내도록 했다.
백중 무렵이 되면 삼이 자라서 그 껍질을 베끼기에 알맞게 익은 시기이다.
때문에, 직조 작업을 권장하는 뜻에서 왕녀들을 주축으로 하여 집단 작업인 두레삼
삼기를 시작하게 한 것이다.
이를 볼 때, 중국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에서 '백중'이라는 속절을 두어 잠시 농사일을
멈추고 그해에 새로 난 과일이나 농산물을 조상의 신위에 올리는 천신 의례 및 잔치를
벌여 여름철 고된 노동의 지루함을 달래고, 더위로 인해 쇠약해지는 건강을 회복하고자
의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민간의 어원을 살펴보면, 음력 7월 15일에 '호미씻이'를 하고 나면 노비들 발뒤꿈치가
하얗게 된다고 하여 백종(白踵)이라고 불렀다.
여염에서 백중을 '머슴 명일'이라고 부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논두렁을 전부 깎아서 깨끗이 만들어놓고, 더이상 논에 들어갈 필요가 없어 발뒤꿈치를
하얗게 씻는다는 뜻이다.
벼농사를 짓는 경우, 외거노비나 솔거노비들은 7월 백중 때까지 논에서 맨발로 세벌
논매기를 하는 등 힘든 일을 하다가 백중(百中) 즈음엔 발바닥이 거의 하얗게 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농가에서는 백중날이 되면 머슴을 하루 쉬게 하고 돈을 주었다.
노비들은 그 돈으로 장에 가서 술 마시거나 음식을 사먹고, 물건도 사는 둥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마음껏 보냈다.
‘百中장’이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바쁜 농사를 끝내고 하는 농군의 잔치였기 때문에 ‘호미씻이’라고도 불렀다.
그러나 제주도에서는 달랐다.
오히려 백중날, 일손을 쉬지 않고 바다에 나가 더 많은 일들을 했다.
백중날 살찐 해산물들이 많이 잡힌다고 생각해, 밤에 횃불을 들고 밤늦도록 해산물을
잡았다.
또 한라산엔 ‘백중와살’이라는 산신이 있어 백중을 고비로 익은 오곡과 산과(山果)를
사람들이 따가면 허전하여 샘을 내고 바람을 일으킨다고 해서 산신제(山神祭)를
지냈다.
성현(成俔)이 쓴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음력 7월 15일인 백중을 “백종(百種)
이라 칭하며, 망친(亡親)의 영혼을 제사한다.”라고 기록돼 있다.
백중을 '망혼일'이라고도 부르는 이유이다.
백중을 백종(百種)이라고도 부른 유래는 음력 7월 15일 무렵엔 과실과 소채(蔬菜)가
풍성해서 백가지 곡식의 씨앗(種子)을 갖추어 놓았다고 해서 비롯된 명칭이다.
이를 통해 백중이 농업 생산 활동과 관련이 깊은 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중을 중원(中元)이라고 부르는 것은 도가(道家)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도교에서는 천상(天上)의 선관(仙官)이 일 년에 세 번, 인간의 선악을 살핀다고
했다.
그때를 ‘원(元)’이라고 부른다.
즉 음력 1월 15일을 상원(上元), 10월 15일을 하원(下元), 그리고 그 중간인 7월 15일을
중원(中元)이라고 했다.
이 세 절일을 삼원(三元)이라고 하면서, 고대부터 초제(醮祭)를 지내는 세시풍속이
있었다.
백중(百中)은 중국의 전통 명절인 중원절(中元節)의 시작이다.
백중은 도교와 불교에서 유래한 것으로, 위진남북조 시대에 형성돼 중국 문화권 전역으로
전파됐다.
타이완이나 싱가포르, 홍콩, 말레이시아 등에서는 아직도 중원절을 큰 명절로 기념하고
있고, 일본에선 오봉(お盆)이라고 부르며 백중을 큰 명절로 지낸다.
양력 8월 15일을 전후한 오봉은 신정(新正)과 함께 일본의 2대 명절에 속하는 국가적
최대 명절이다.
대신 일본은 한국과 달리, 추석을 따로 쇠지 않는다.
예전엔 중국과 일본 모두 한 달 정도를 쉴만큼, 백중을 중요한 명절로 지냈다.
중국에선 고래로부터 전통적으로 음력 7월을 ‘귀신의 달(鬼月)’ 혹은 ‘귀신의 계절(鬼節)’
이라고 불렀다.
이는 음력 7월 보름이 되면, 저승의 문이 열려서 혼령들이 이승을 떠돌아 다닌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차이나 타운의 영향으로 백중날이 외국에서 “Ghost Festival”로 알려진 것은 바로
이런 이유이다.
중국 사람들은 중원절 기간 동안 조상에게 음식을 공양하고 제사를 지낸다.
백중을 망혼일(亡魂日)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또 거리에서는 종이로 만든 가짜 돈을 태우거나, 배고픈 영혼을 위해 음식을 놓아둔다.
돈이나 공양물을 태우는 것은 조상이나 영혼들이 내세에서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중원절은 혼령이 직접 살아있는 사람을 찾아오는 시기로, 이 무렵 중국에서는 이사나
또는 새로운 일 등을 진행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불가(佛家)에선 백중을 우란분재(盂蘭盆齋), 우란분회(盂蘭盆會)라고 하여
지금도 매우 중히 여긴다.
승가(僧家)에서는 사월 초파일과 함께 백중을 최고의 명절로 치고 있다.
그래서 백중을 오미백과(五味百果)를 공양하는 재일(齋日)로 삼고 있다.
『불설우란분경(佛說盂蘭盆經)』은 우란분재의 근거가 되는 경전(經典)이다.
우란분경에는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신통력이 가장 뛰어났다고 알려진 목련(目連)
존자의 고사(故事)가 기록돼 있다.
이로 인해 돌아가신 부모님을 비롯해 조상님들을 위해 백중날까지 49일 동안 천도재를
올리는 풍습이 조선시대 이후, 현재까지도 사찰에서 시행되고 있다.
백중날, 불자들은 한여름의 풍성한 햇과일이나 햇곡식을 들고 절을 찾아 승려들에게
공양하거나 조상 천도를 위한 제사를 올린다
스님에게 공양을 올리는 우란분재는 동아시아의 농경사회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조상을
섬기는 유교적 전통과 결합된 것이다.
중국과 한국 등 유교 문화권에서는 다른 문화권에 비해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수직적 혈연 전승이 강한 편이다.
주역(周易)에 나오는 계지자선(繼之者善)이라는 말처럼, 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혈맥(血脈)을 특히 중요시하는 것이 바로 유교 윤리의 중요한 근간인 효(孝)이다.
우란분재는 불교가 융성했던 신라나 고려 때에는 일반인까지 참여하는 큰 행사였으나
조선시대 이후로 사찰에서만 행해지고, 민간에선 소멸됐다.
백중의 절기 음식은 일반적으로 여름철 농작물과 깊은 연관이 있다.
백중 즈음엔 밭작물인 밀과 보리, 수수나 감자 등을 수확한다.
그래서 백중날 여염(閭閻)에서는 밀가루로 만든 부꾸미인 밀전병과 밀개떡을 해 먹었다.
또 수수나 감자로 떡을 만들어 먹거나 부침개를 해 먹고, 제철인 호박으로는 호박부침이나
또는 썬 호박에 밀가루를 묻혀 기름에 지져먹거나 호박, 돼지고기, 흰떡을 섞어 푹 쪄서
먹었다.
양반가의 백중날 절기 음식은 이보다 훨씬 고급스럽다.
양반들은 계삼탕(鷄蔘湯)이나 깻국탕(荏子水湯), 민어 매운탕과 화채 등을 먹었다.
임자수탕은 개성의 양반들이 삼계탕 대신 즐겼던 음식이다.
흰 참깨(荏子)와 영계를 재료로 해서 만든 냉 깻국탕을 말한다.
민어 매운탕은 서울 양반들의 인기있는여름 보양식이었다.
큼지막한 민어를 손질해 토막 내고 애호박과 파, 마늘, 생강으로 양념한 뒤 고추장으로
간을 해 얼큰하게 끓인 매운탕이다.
예로부터 민어는 식욕을 북돋아주고, 배뇨를 돕는 등 여름철 기력을 찾는데 매우 유용한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정약전이 쓴『자산어보(玆山漁譜)』엔 '민어는 입과 비늘이 크며, 맛이 달다. 익히거나
회로 먹는다.'고 쓰여있다.
말린 감을 가루로 내어 떡으로 만든 석탄병(惜呑餠)은 백중(百中)의 대표적인 음식이다.
석탄병은 한자 뜻 그대로 '삼키기 아까운 떡'이란 의미이다.
감은 처음에는 진노란색을 띠지만, 말리면 검은 자주색으로 변한다.
또 말리는 과정에서 떫은 맛도 없어지고 단맛이 가미돼 맛과 향이 오히려
제철 감 못지 않다.
이런 재료로 떡을 만들었으니, 삼키기가 애석할 정도라는 뜻의 ‘석탄병’이라는
이름이 붙게 됐다.
석탄병(惜呑餠)은 조선시대 중기의 살림살이 백과였던 『규합총서』를 비롯해
『시의전서』,『부인필지』,『간편 조선요리 제법』에 등장하는 음식이다.
조선시대의 조리법에 따르면 석탄병은 감가루에다가 멥쌀가루, 계피가루, 또
사탕가루나 꿀(생청)을 섞어 체에 쳐낸 후, 그 위에 가늘게 썬 귤병(꿀에 졸인
귤)과 민강(생강 저민 것), 대추와 황률(말린 밤), 잣가루 등을 고물로 얹어서
쪄냈다.
드디어 스님이 돌아왔다!
일면식도 없는 분이지만, 음력 4월 15일 하안거(夏安居)에 들어갔던 그가 정확히
3개월 만에 다시 블로그를 시작했다.
백중(百中)인 매년 음력 7월 보름은 스님들이 여름 안거(집중 수행 기간)를 끝내는
해제일(解制日)이다.
늘 열정적으로 수행에 정진하는 승려답게 그는 블로그를 3개월 동안 끊었다.
혹여나... 하며 오랫동안 그의 블로그를 지켜보았지만, 수행에 정진하는 승려답게
그는 단 한번도 자신의 블로그에 자취를 남기지 않았다.
결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수행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익숙한 것으로부터 단칼에 멀어지는 것!...
오욕칠정(五慾七情)으로부터 자신을 끊어내는 것!...
세속과 자신을 언제든 매정하게 차단시킬 수 있는 것!...
이런 훈련과 수행이 반복되지 않는다면, 결코 진정한 성직자나 수행자라고
말할 수 없다.
백중(百中)은 이처럼 불교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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