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 22대 왕 정조(正祖)에게는 왕비인 효의왕후(孝懿王后) 김씨 외에 4명의 후궁이
있었다.
바로 원빈 홍씨, 의빈 성씨, 화빈 윤씨, 수빈 박씨이다.
여러 기록들을 살펴볼 때, 정조는 여색을 탐하지 않은 듯하다.
다산 정약용이 남긴 <부용정시연기(芙蓉亭侍宴記)>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우리 성상(聖上)께서는 뜻이 본디 공손하고 검소하기 때문에 말을 달려
사냥하는 것을 즐기지 않으며, 환관(宦官)이나 궁첩(宮妾)이라고 봐주지
않는다."
정조의 총신(寵臣)으로 가장 가까이서 정조를 봐온 정약용의 기록인지라 "궁첩을 봐주지
않는다."는 기록은 상당한 신뢰성이 있다.
때문에 정조는 여색에 대해 절제력을 가지고 있었고, 후궁에게도 일면 엄격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기록상으론 정조의 증손자인 헌종(憲宗)이 공식적으로 3명의 후궁을 두어, 정조보다 적은
후궁을 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성 편력을 살펴보면, 반전이 있다.
헌종은 조선의 왕 중에서 가장 여색(女色)에 침혹한 왕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워낙 어린 나이부터 여색을 즐겨, 미모를 지녔던 궁녀들은 거의 다 승은을 입었다고 알려져
있다.
너무 많은 숫자여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헌종은 성은을 입었던 궁녀들에게 관례와 달리 직첩을
내리지 않았다.
경빈 김씨 외에 기록에 남아있는 2명의 궁녀 또한 그냥 '궁인'이라고만 돼 있다.
나머지 궁녀들은 기록에도 남기지 않았다.
여색을 많이 밝혔던 헌종은 20대 초반에 세상을 떴다.
정조는 워낙 독서량이 많았고, 집필활동도 왕성했다.
또 모든 정사를 직접 챙기는 만기친람(萬機親覽)에다 신하들을 직접 가르치는 친림시강
(親臨施講)까지 행했다.
때문에 시간적으로도 여색에 침혹할 여유가 없고, 또 관심도 적었다고 볼 수 있다.
또 골초에다 삼중소주를 즐겨 마시고, 규장각 검서관과 총신들을 많이 챙기면서 신하들과도
꽤 많은 시간을 보내는 등 군왕으로서는 지나치게 부지런한 왕이었으므로, 여색에 빠질
동기 부여가 부족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이는 여색을 밝히지 않는 성향일 수도 있다.
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문란했던 여자관계에서 교훈을 얻은 결과로도 볼 수 있다.
효의왕후(1753~1821)는 1762년 10살 때, 세손비(世孫妃)로 책봉되어 어의동 본궁에서
당시 11살이던 정조와 가례를 올렸다.
그로부터 13년 뒤인 1776년, 정조가 조선 제 22대 왕으로 즉위하자 왕비(王妃)가 됐다.
시호(諡號)를 보면 그 사람이 살아온 행적을 유추할 수가 있다.
효의왕후(孝懿王后)라는 시호를 볼 때, 그녀가 효성이 지극했고 심성이 매우 안온하면서
의연하고 또 아름다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왕의 내조를 잘한 효의왕후는 상전에 대한 효성도 지극했다.
영조 계비인 할머니 정순왕후와 시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극진히 모셔서 효부(孝婦) 소리를
들었다.
이는 타고난 천품(天稟)이 굳건하고, 삿되지 않으며, 탐욕이 적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또 왕을 따라 매우 검약한 생활을 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왕과의 금슬은 좋았지만, 소망하던 왕손은 끝내 갖지 못했다.
그럼에도 정조는 즉위하기 전까지, 효의왕후 외에는 다른 여인을 가까이 한 적이 없다.
이를 통해서도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와는 달리 여색을 즐기지 않았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정조 즉위 후 할머니 정순왕후가 언문 교지를 내려 "왕비가 병이 있어 아이를 갖지 못하므로,
후궁을 들이라."는 명을 내린 것을 볼 때, 효의왕후가 불임(不姙)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훗날 정조가 네 번째 후궁으로 들인 수빈 박씨가 낳은 아들(순조)을 자식으로 입적시켜 법통상
왕의 모후가 됐다.
정조 사후 21년을 더 살아 1821년 3월, 향년 69세를 일기로 졸했다.
원빈 홍씨(元嬪洪氏, 1776~1779년)는 정조가 정순왕후의 명을 받들어 첫 번째로 들인
후궁이다.
호조 참의 '홍낙춘'의 딸로, 당시 막강한 권력을 누리던 홍국영의 여동생이다.
정조는 재위 2년인 1778년 6월, 13세인 그녀를 빈(嬪)으로 삼아 후궁으로 들였다.
효의왕후가 왕손을 낳지 못하는데다 막강한 세도를 누리던 홍국영의 동생이기 때문에 계비
(繼妃)와 버금가는 의식을 갖춰 혼례를 올렸다.
중국의 귀비(貴妃)에 준하는 의례로 장중한 가례를 올리고, 원빈(元嬪)의 작호와 숙창궁
(淑昌宮)의 궁호를 받았다.
시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와 매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후사를 이어야 하는 책임이 막중했으므로, 조정과 약방(내의원)의 문안을 받는 등 후궁으로서는
유례가 없는 이례적인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후사는 커녕, 입궐한지 일년도 채 안된 1779년 갑자기 졸했다.
애통해하던 정조는 손수 원빈의 행장(行狀)을 썼다.
국왕이 후궁의 행장을 쓴 것은 정조가 유일하다.
<어제인숙원빈행장(御製仁淑元嬪行狀)>이 현재 '한국학중앙원'에 남아있다.
화빈 윤씨(和嬪尹氏, 1765~1824)는 정조가 두 번째로 들인 후궁이다.
판관 윤창윤(尹昌胤)의 딸이다.
궁녀 출신이라는 설도 있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원빈 홍씨 사후, 다음해인 1780년(정조 4년)에 후궁으로 간택돼 화빈의 작호와 경수궁
(慶壽宮)의 궁호를 받고 자경전(慈慶殿)에서 정조와 가례를 올렸다.
다음 해인 1781년 회임해 산실청(産室廳)이 설치됐고, 옹주를 한 명 낳았으나 요절했다.
정조 사후 24년을 더 살아, 항년 60세의 나이로 졸했다.
의빈 성씨(義嬪成氏, 1753~1786년)는 정조가 세 번째로 들인 후궁이다.
4명의 후궁 중, 유일하게 궁녀(宮女) 출신으로 확인된 인물이다.
이로 인해 순전히 정조의 의중으로 후궁이 된 것으로 전해진다.
의빈 성씨는 1782년(정조 6년) 10월 13일, 궁인 신분으로 왕자를 낳았다.
바로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1786)이다.
한 달 후인 11월 27일, 왕자가 원자(元子)로 봉해지면서 다시 한 달 후인 12월 28일
정3품인 소용(昭容)의 첩지를 받아 정식으로 후궁이 됐다.
두 달 후인 1783년, 정1품 빈(嬪)으로 승격돼 의빈(義嬪)의 빈호를 받고 총관 후궁(總官後宮)에
올랐다.
다음 해인 1784년, 옹주를 낳았지만 요절했다.
2년 후인 1786년(정조 10년), 왕실의 대통을 이을 것으로 기대를 한몸에 모으던 문효세자가
홍역으로 요절하자 충격을 이기지 못한 의빈 성씨는 그로부터 5개월 후, 셋째를 임신한 상태
에서 돌연 세상을 떴다.
정조가 총애가 깊었던 후궁인 만큼 왕의 슬픔도 컸다.
의빈 성씨 사후, 정조는 20여 일 동안 정사를 돌보지 않았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가 총애하던 할머니 영빈 이씨의 예를 따라서, 의빈 성씨를 일등
후궁의 예를 갖춰 보냈다.
또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의 무덤에 각각 죽음을 애도하는 어제 신도비(御製神道碑)를 내렸다.
의빈 성씨는 정조의 두 여동생인 '청연군주'와 '청선공주'와 함께 소설 <곽장양문록>을 필사
했다고 알려져 있다.
드라마를 보고 의빈 성씨를 다모(茶母) 출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한마디로 무지의 소치이다.
궁녀와 다모의 신분은 하늘과 땅의 차이 만큼이나 크다.
궁녀는 언제든 승은을 입을 수 있는 전문직 여성 공직자들이고, 다모는 관비(官婢) 즉 관(官)에
속한 기녀 출신 노비로 천민 신분이다.
노비는 후궁이 될 수 없다.
상의원(尙依院)에 소속된 침선비(針線婢) 또한 궁녀가 아니라 기녀 출신 노비이다.
조선시대엔 지방 관아에 소속된 기녀들 중에서 바느질 솜씨가 좋고 미모를 지닌 기녀들을
중앙으로 뽑아 올려 궁궐 상의원 소속 침선비로 삼았다.
그러다 궁궐에 행사가 있을 땐 연회에 참석해 춤이나 노래를 부르게 했다.
이들을 옥당기생(玉堂妓生)이라고 불렀던 이유이다.
권력과 가까운 곳에 있어 모든 기녀들의 부러움을 사며 롤모델이 되기도 했던 일패기생들이
바로 이들이다.
인터넷에 떠돌아 다니는 허접한 글들이나 보고, 다모나 침선비를 궁녀로 생각해선 안된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역사(歷史)를 논하는 것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다.
수빈 박씨(綏嬪 朴氏, 1770~1822년)는 정조의 네 번째 후궁이다.
정조의 대통을 이어 조선 제 23대 왕이 된 순조(純祖)의 생모이다.
명문가인 반남(潘南) 박씨으로, 좌찬성 박준원의 딸이다.
의빈 성씨 사후 다음해인 1787년, 수빈(綏嬪)이라는 빈호와 가순궁(嘉順宮)이라는 궁호를 받고
18살의 나이로 정조와 가례를 올렸다.
명문가 출신답게 평소 예절이 바르고, 검약한 생활을 했으며, 성품 또한 안온하여 '어진 후궁'
이라는 뜻의 현빈(賢嬪)으로 불렸다.
3년 후인 1790년, 문효세자에 이은 정조의 두 번째 아들 순조를 낳았다.
다시 3년 후엔 숙선옹주(淑善翁主)를 낳았다.
대통을 이을 왕세자를 낳은 만큼, 수빈 박씨는 조정과 왕실의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그럼에도 예절이 워낙 바르고 효성 또한 지극해 왕비인 효의왕후를 공경했고, 정조 승하 후에
아들이 보위에 오른 후에도 대왕대비인 정순왕후와 시어머니인 혜경궁 홍씨, 왕대비가 된
효의왕후 김씨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해 당대에 칭송이 끊이지를 않았다.
1822년, 창덕궁 보경당(寶慶堂)에서 향년 53세를 일기로 졸했다.
'현목'의 시호를 받아 현목수빈(顯穆綏嬪)이 되었으며, 1897년 고종에 의하여 <大韓帝國>이
개창된 후 남편인 정조가 황제로 추존됨에 따라 1901년 현목수비(顯穆綏妃)가 됐다.
친남매인 순조와 숙선옹주의 사이는 매우 좋았다.
때문에 순조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출가한 여동생인 숙선옹주 사저에 가서 쉬고 오곤
했다.
홍선표의 <조선요리사>를 보면, 숙선옹주가 아버지를 위해 무를 썰어 만든 요리를 만들어 올렸다
크게 칭찬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게 바로 깎두기의 시작이라고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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