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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思悼世子)5 (아버지와 아들)

아라홍련 2015. 9. 16. 07:16

    

 

                         

          조선 제 22대 왕 정조(正祖)는 사도세자가 10년을 길렀고, 할아버지 영조가 14년을

            길렀다.

             때문에 할아버지 영조(英祖)영향을 훨씬 더 많이 받았다.

             역사학자들은 만약 정조가 사도세자의 양육만 받고 자랐거나 또는 영조가 세손(世孫)을 

             관엄()함을 가지고 극진히 손자 교육을 시키지 않았다면, 아마도 연산군 못지 않은

             폭군이 됐을 것이라고들 말한다.

             정조에 관련된 사료를 많이 읽어온 나는 이 의견에 동감한다.    

 

             정조는 어린 시절에 겪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 때문에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힘들게 살았다.

             사료에 나타나는 때때로 이해 못할 정조의 격한 과잉 감정의 표출을 보면, 일면 이해가 

             간다.

             하지만 조부인 영조가 사랑으로 교육시킨 영향을 더 많이 받아서 훌륭한 왕의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는 즐겼으되 색()엔 침혹하지 않았고, '정약용'이 기록한대로 내관이나 궁녀들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또 그들의 수작에 넘어가지도 않았다. 

             특히 경술(經術)에 밝기만 하면, 양반이나 서얼을 가리지 않고 인정해 그들의 학식과

             능력을 높이 사서 두루 적시적소에 활용했다.

             호학왕(好學王)으로 불릴 만큼 책을 좋아하고 ,평생 열심히 공부했으며, 선조인 효종(孝宗)

             으로부터 정치하는 법을 배웠다.

             정조가 공작 정치에 능한 건 이 때문이다.

 

             '정조시대의 판도라 상자'로 불리우는 <정조 어찰첩>이 2009년, 처음으로 '동아시아

             학술원'을 통해 공개됐을 때 많은 사람들이 기함했다.

             <비밀 편지>를 통한 정조의 막후정치와 공작정치의 진면목이 백일하에 드러난 때문이다.

             어찰 내용은 21세기인 지금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을 공작정치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한마디로 정조는 '편지를 통한 막후정치'의 달인이었다.

             그동안 정적(政敵)으로 알려지고, 정조를 독살한 장본인으로 억울한 누명까지 썼던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는 사실상 정조의 심복이었음이 <정조 어찰첩>을 통해 밝혀졌다.

 

                     

          

            <K옥션 경매에 나왔던 297통의 정조 어찰첩. 시작가 12억 원에 낙찰됐다.>

 

             역사학자들은 정조의 이런 정치 행태효종으로부터 배웠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효종은 북벌을 모의하는 과정에서 '송시열'과 비밀편지를 주고받으며 막후정치를 펼친

             바 있다.           

             정조는 승하하기 며칠 전까지 자신의 병세를 상세히 적어, 심환지에게 비밀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정조가 찰진 욕을 잘 구사한다는 사실도 이 <정조 어찰첩> 때문에 밝혀졌다.​

             심환지에게 보낸 이 비밀 편지엔, 왕의 최측근인 '서영보'를  "호로자식"이라고 욕하고,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학자인 '김매순'을 "입에서 젖비린내 나고 미처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한 놈"이자 "경박하고 어지러워 동서도 분간 못하는 놈"이라면서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린다."고 혹평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온갖 찰진 욕설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정는 편지를 보낼 때마다 "이 편지를 보고 나면 즉시 찢어버리든지 세초(洗草)하라"고 

             엄명을 내렸지만, 심환지는 단 한 통의 편지도 버리지 않고 고스란히 숨겨두었다가 결국

             후손들에게 남겼다.

             심지어 정조에게서 편지를 언제, 어디서 받았는지까지 정확하게 기록해놓았다.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이 비밀편지들이 돌고 돌아 경매에까지 올라오게 됐다.

             덕분에 <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같은 공식 사료에선 맥락을 자세히 알 수 없는

           역사적인 사건들과 정치적 이면(裏面), 또 정조의 속내와 인간적인 면모까지 상세히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사료를 수백 년 세월을 뛰어넘어 접하게 됐다.   

              <정조 어찰첩>이 '정조시대의 판도라 상자'로 불리는 이유이다. ​

 

              현재 정조의 표준 영정으로 이름 붙여진 문약해 보이는 초상화는 정조의 용안이 아니다.

              이 초상화는 1989년 이길범 화백이 상상화(想像畵)로 그린 것이다.

              배우 '이서진'이나 '배수빈'를 생각하고 정조의 용안을 상상해서는 안된다.

              또 교과서에 나오는 정조 초상화를 보고도 정조의 용안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정조의 실제 용안(龍顔)과는 정반대의 이미지이다.    

                                  *http://propolis5.blog.me/220300717649 참조

​                                      (정조 어진은 정조가 아니다.)

​                                      

              그렇다면 정조의 본래의 모습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당연히 있다!

              정조의 용안은 기록에 분명하게 나와있다.

              그것도 조선시대 구(舊) 황실 족보인 <선원보략(璿源譜)>과 <홍재전서(弘齋全書)>

              에 정조 용안이  어진 모사본으로 정확히 남아있다. ​

​   바로 이 초상화이다! 

               

             

                           <선원보략에 실려있는 정조의 진짜 모습>

 

               

                   <정조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에 수록된 정조의 모습>

 

            정조(正祖)의 진짜 모습을 보고 당신은 무슨 생각이 드는가?...  

               이렇게 멀쩡히 어진 모사본이 남아있음에도, 26년 전에 한 화가가 미중년의 모습으로
               그린 상상화를 
표준 영정으로 이름 붙여 정조로 둔갑시킨 것은 아직도 미스테리이다.

​          어진 모사본을 보면, 전형적인 호방한 무인형(武人形)이다. 

               그리고 무예에 능통했던 사도세자를 많이 닮았다는 생각도 든다.  ​

​          실제로 정조는 조선에서 가장 뛰어난 무사(武士)였다.  

               특히 정조의 활쏘기 실력은 신궁(神弓)으로​ 불릴 정도로 조선에서 비교할 자가 없었다.  

​          <어사고풍첩(御射古風帖)>에는 정조가 활쏘기 연습을 하는 모습이 기록돼 있다.  

​          이를 보면 정조는 50발 중 49발을 명중시키고, 마지막 한 발은 맞추지 않는 관례에

               따라서 일부러 맞추지 않았다고 한다.

               마치 누가 옆에서 도와주기라도 하듯 백발백중인 놀라운 실력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

               무예에 능통한 정조 모습은 <정조실록>에도 나온다.

                               사격거리 145m에 50발을 거의 매일 다 명중시켰고, 더 정교한

                               과녁으로 부채(小扁) 곤봉, 또는 편곤(片棍)을 이용했다.

               정말 대단한 실력 아닌가?...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던 아버지 사도세자를 많이 닮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조가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한 것도, 아버지 사도세자의 유업을 이어받은 것이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향을 받아서 아버지 사도세자와는 달리 문무(文武)에 모두 뛰어났다.

               그래서 신하들에게 "문무는 수레의 두 바퀴나, 새의 두 날개처럼 조화를 이뤄야 한다."

                  고 늘 문무겸전(文武兼全) 중요성을 늘 강조하곤 했다.

               인간은 ()에 치우치면 심약하고, (武)에 치우치면 무모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장을 아름답게 꾸밀 줄 알면서 활을 쏠 줄 모르는 건, 문무를 갖춘 재목이 아니다." 

               라고 단정하면서, 총애하던 규장각 검서관이나 총신(寵臣)들을 닦달해​ 강제로 활쏘는

               연습을 시키곤 했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1775년, 82세의 연로한 영조몸져눕게 되자 대리청정을 하게 된 왕세손(정조)은

               조부의 병구완에 전심전력했다.

               마침내 영조의 병세가 호전되자, 상복처럼 흰 옷에 흑대(黑帶)맨 왕세손은 조부에게

               상소를 올렸다.

               아버지 관련 기록 일체를 할아버지가 직접 삭제하여, 훗날 있게 될지도 모를 후환을

               미리 없애달라고 읍소했다.

               손자의 구구절절한 상소를 읽고 눈물범벅이 된 영조는, 사도세자가 대리청정했던 시절

               (1745~1762) <승정원 일기>를 모두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 손자와 더불어 사도세자의 비행이 적힌 관련 기록들을 일일이 찢어 없애버렸다.

               역사 조작을 시도한 것이다!

                        ​

                          <삭제된 승정원 일기(영조 38년(1762) 5월 29일 기사)>

            240여 년 전, <승정원 일기>는 정조 때문에 이렇게 난도질당했다. 

               모두 100 군데가 넘는다.

               전체 페이지가 사라진 곳도 무수하다.

               모두 사도세자의 비행이 기록돼 있던 부분들이다.

               정조의 극진한 효심은 아버지를 연쇄 살인범, 희대의 살인마로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도세자의 비행이 기록된  <승정원 일기>는 오려지고, 통째로 찢겨져 나가고,

               또 세검정에서 세초돼 사라졌다.

               규장각에 보관돼 있는 <승정원 일기>는 유독 사도세자 관련 부분에서만 너덜너덜하다.

               그리고 곳곳엔 이런 글이 적혀있다.

 ​
                                                                   此下一張刀削 丙申因傳敎洗草

                                                                      (이 아래 한 장은 칼로 삭제됐다.

                                                       병신년 전교로 인해 세초됐다.) 

               대신, 정조는 아버지 문제를 불문에 붙일 것을 할아버지에게 맹세해야만 했다.   

               또 아버지의 이복형인 효장세자(진종)의 아들로 입적한 후에야 조선 제 22대 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조가 즉위하면서 첫 번째 한 말은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였다.

               왕이 되는 순간, 할아버지와의 약속을 저버린 것이다.

               즉위 후에도 정조의 아버지에 대한 효성은 사그러들지 않았다.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극진한 효심을 보였다.

         정조는 <현륭원지(​顯隆園誌)>를 작성하면서도, 끝내 단 한군데에서도 사도세자의 

         비행을 언급하지 않았다.

               *  이 글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