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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思悼世子)3 (왕세자가 죽인 사람들)

아라홍련 2015. 9. 13. 17:20

 

      

  

                           

           사도세자가 훙서하고 불과 이틀 뒤, 영조(英祖)가 이런 지시를 내린 게 기록에 나온다.

                            

                                                        上命擧全後被殺宦寺恤典

                             (왕이 전후로 피살된 환관들에게 휼전을 내리도록 했다.)      

                                                <영조 38년 윤 5월 23일>

​         <영조실>의 이 기록을 통해, 몇 가지 추론(推論)이 가능하다.

           첫째, 사도세자가 뒤주가 갇히기 직전에 수많은 환관(내시)들을 죽였다는 사실이다.

           왕세자의 최측근 거리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바로 내관(內官)이다.

           가장 만만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또한 내시이다.

           때문에 가장 많은 피살자들이 내관이라는 사실을 파악한 영조가 휼전 지시를 내린

           것으로 보인다.    ​

           휼전을 받은 사람들은 사도세자가 성질이 폭발할 때마다 분불이로 때려죽이거나 또는

           칼로 찔러죽인 내관들 가족이다.

           뿐만 아니라 사도세자로부터 폭행이나 칼부림, 불고문인 낙형(烙刑)을 당해 장애인이 

           된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다.  ​

           둘째, 가장 많이 피해를 본 관리들은 바로 내시부(內侍府) 소속 내관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도세자가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지만, 그 중에서 특히 내시부 소속 환관들이

           가장 많이 피살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왕세자가 죽은지 불과 이틀 만에 영조가 피살된 내관들 가족에게 휼전(恤典)

           내린 것만 봐도 추정할 수 있다.

     ​

           셋째, 앞선 포스팅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영조는 나경언의 고변이 있기 전까지는

           사도세자의  잔악무도함을 미처 잘 몰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피살자들이 그렇게 많은지도 몰랐을 것이다.  ​

           기록을 살펴보면, 영조는 나경언의 고변(告變)과 사도세자 생모인 영빈 이씨가 왕세자를

           대처분하라는 주청이 있은 후에야 사도세자의 패륜과 패악, 행적, 흉악무도한 만행, 그리고

           피살자들에 대한 숫자와 상황들을 비로소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왕세자를 뒤주에 가두기 전, 격노한 영조가 사도세자의 죄상들을 열거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

           그렇다면 영조가 왕세자의 행적을 늦게서야 파악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왕세자가 오랫동안 문안인사를 하지 않을 정도로 부자 간의 사이가 틀어져 있어

           전혀 소통이 되지 않았고, 또 왕세자의 장인인 홍봉한과 신하들이 사도세자의 패악이

           왕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철저히 차단하고 입단속을 시켰기 때문이다.

           이는 왕세자가 무단으로 관서지방(평안도)를 20일 동안 여행을 다녀온 사실도, 영조가

           무려 5개월 후에나 알게 된 것에서도 증명이 된다.

           사도세자의 살인 행각은 <영조실록>과 <한중록> 이외의 다른 기록들에서도 나타난다.

           <승정원 일기>, <대천록>, <임오일기>, <이재난고>, <현고기>, <홍재전서> 등에서도

           찾을 수 있다.

           기록들을 살펴보면 후궁도 죽였고, 당번 내관들을 무수히 죽였으며, 궁녀들도 죽였다.

           심지어 생모인 영빈 이씨의 궁녀도 죽였다.

           이는 패륜으로 간주되는 중대한 사건이다.

           또 내수사 담당관 '서경달'이 물품울 늦게 가져온다고 죽이고, 맹인에게 점을 치게 하곤

           그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죽였다.

           그밖에도 의관(醫官)과 연관(輦官,가마꾼). 액속(掖屬,액정서 소속 수행원), 별감,

            노속(奴屬) 등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죽였다.

           분풀이로 약자들에 대한 살인을 일삼다가 나중엔 결국 즐기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사도세자의 무단 평양 유람 당시, 왕세자를 수행했던 세자궁의 중관(中官, 내시) 중

           '유인식'도 죽었다. 이유는 불명이다.

           그동안 사도세자가 죽였다는 심증은 있었지만, 물증이 없었다.

           한데, 실록을 보면 영조는 그 와중에 '유인식'에게도 휼전을 내린다.

           이는 영조가 '유인식'이 사도세자에게 살해당했다고 인정했음을 뜻한다. 

                        ​

           조선의 역사에서는 연산군이 가장 혼군(昏君)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의 후궁인 엄귀인과 정귀인을 폭행은 했으되, 직접 죽이지는

           않았다.

           전쟁도 아닌 평시에 왕세자가 직접 사람을 죽인 일은 조선 역사상 오직 사도세자가 

           유일하다. ​

           세계의 왕족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렇다면, 사도세자는 대체 몇 명을 죽인 것일까?...

           <영조실록>에서는 이에 대해 정확한 기록을 하지 않았다.

           너무 끔찍해 사관들도 차마 숫자는 기록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록과 <한중록>만 살펴봐도 사도세자로부터 피살당한 사람들의 숫자가

           수십 명에 달한다.

 ​       한데, 피살 당한 사람의 숫자가 기록된 책이 하나 있다.

           정조 때의 문신 '박하원'이 써서 정조에게 바친 <대천록(待闡錄)>이다.

           이 책을 통해 사도세자가 죽인 사람들의 숫자를 추정할 수가 있다.   

           '박하원'은 정조와 정치적 이념을 함께 하고, 또 사도세자를 동정하고 옹호하는 주장을

           펴던 남인 계열 시파(時派)로, 정조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던 인물이다.   

 

                     ​

 

                                世子戕殺中官內人奴屬將至百餘 而烙刑等慘

                   ​"세자가 죽인 중관(中官), 내인(內人), 노속(奴屬)이 거의 백여 명

                         이르고, 낙형 등이 참혹하고 잔인한 모양이 말로 다할 수가 없다."  

         낙형​(烙刑)이란, 단근질을 말한다.

           즉 불에 달군 쇠로 몸을 지지는 참혹한 형벌을 말한다.

           사도세자는 닥치는대로 때려죽이고, 칼로 찌르고, 그것도 모자라 단근질까지 했다.

           바로 불고문이다.   ​    

           <대천록>을 통해서 사도세자가 단지 분풀이 차원이 아닌, 즐기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살해하고 또 고문을 통해 희열을 느끼며 수많은 관리들을 장애인으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내용은 <한중록(閑中錄)>을 비롯해 다른 기록에도 동일하게 나온다.                           

                                              

           사도세자를 동정하고 옹호하는 취지로 쓰여진 <대천록>의 본래 이름은 ​<천유록(闡幽錄)>

           이다.

           책을 읽은 정조는 매우 흡족해하며, 아직은 책을 낼 때가 아니라면서 친히 책의 제목을

           '때를 기다린다.' 뜻의 <대천록(待闡錄)>으로 바꿔주었다.

           이 책에 나오는 피살자 숫자가 100여 명이다.

           한마디로 세계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연쇄 살인마이자 사이코패스이다. ​

           그렇다면 사도세자를 동정하고 옹호하는 시파에서 100여 명이라고 밝힌 것은 실제의

           숫자를  줄인 것일까, 아니면 늘인 것일까?

           당연히 최소한으로 줄인 숫자일 것이다.

           만일 숫자를 늘였다면 정조로부터 살아남지 못했을 게 자명하다.

           정조는 사도세자를 옹호하고 피살자의 숫자를 줄인 것에 흡족해 제목까지 <대천록>으로

           새로 지어주었다.

           정조가 기록에 남아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엽기적인 행적들을 없애기 위해 동원했던

           수많은 다양한 방법과 노력들을 감안할 때, 사도세자가 죽인 사람들의 숫자는 <대천록>

           에서 밝힌 것보다 최하 갑절에서 수백 명에까지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오죽하면...

           통상 이름난 학자들이 쓰는 묘지문을, 사도세자 훙서 후 자리 보존하고 누운 영조가 직접  쓴

           <어제사도세자묘지문(御製思悼世子墓誌文)>에 이런 구절이 나올까?...

 

                                "아! 자고로 무도한 군주가 어찌 없다 하리오만,

                                         세자 시절에 이런 자... 나 들어보지 못했노라."  

            *  이 글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