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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思悼世子)2 (왕세자 죽음의 비밀)

아라홍련 2015. 9. 12. 19:13

 

        

 

                        

              사도세자를 죽이라고 영조에게 읍소한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 바로 왕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이다.                              ​

  ​            그녀는 아들인 사도세자만 즉위하면 영조의 계비로 대비(大妃)가 되는 정순왕후

              못지  않은 권세를 누릴 위치에 있었다.

              어쩌면 자식도 없는 나이 어린 정순왕후보다 왕과 옹주의 생모인 영빈 이씨가 훨씬

              더 권력과 가까울 수도 있다. ​

              특히 영빈 이씨는 영조가 가장 신뢰하며 총애했던 후궁이다.

              이는 두 사람 사이에 1남 6녀를 둔 것만 봐도 증명이 된다.​(3명의 옹주는 일찍 졸했음.)

              이미 총관후궁(總管後宮)으로 후궁들을 관리 감독하는 내명부 권력자였다.

              아들의 극악무도함을 모른척 눈만 감고 있으면, 곧 대비보다 권력을 더 누릴 수 있는

              상황에서 영빈 이씨는 왕에게 "왕세자를 죽여야 한다."고 눈물로 읍소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임오화변이 일어나기 2년 전부터 왕과 왕세자 사이는 이미 틀어질대로 틀어져 있었다.

              사도세자는 9개월 간 왕에게 단 한번도 문안인사를 하지 않았다.

              성리학이 지배하던 조선시대의 극엄(極嚴)한 궁궐 법도상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조선 역사 상에는 없는 일이다.  

              음모론자들은 그 이유를 영조가 문안인사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앞선 포스팅에서 언급했듯, 이전에 사도세자가 4개월간 왕에게 문안인사를 하지

              않았을도, 영조가 신하들에게 왕세자가 문안인사를 오지 않는다고 얘기해서 기록에

              남아있는 것이다.

              영조가 사도세자의 무단 관서지방 유람을 5개월 간 전혀 몰랐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왕은 아들이 문안 인사를 안 오는 줄 알았지, 군사 요충지인 평안도로 유람을 떠난 것은

              상상조차 못했다.​

              이는 사도세자의 장인이자 영의정인 '홍봉한'이 사위를 위해 늘 비리를 덮고, 영조 귀에

              왕세자에 관한 안 좋은 소문이 들어가지 않도록 철저하게 차단하고 입단속을 시켜놓아

              가능했던 일이다.  

              하지만 사도세자의 광증(狂症)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     ​

              내관을 죽인 뒤, 머리를 잘라서 들고 궁궐을 돌아다니는 일도 있었다.

              이를 궁중 내인(內人,나인)들에게 보여주고 다녔고, 심지어 혜경궁 홍씨에게 보여주기

              까지 했다.  

              점치는 맹인과 내관, 궁녀, 의관, 가마꾼, 별감 등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죽였다.

              잔악한 살인으로 희열을 느끼는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의 모습이다.​

              또 궁녀들을 때려 피가 철철 흐르는 상황에서 성관계를 했고, 후궁인 경빈 박씨를 때려

              죽인 뒤에는 바로 다른 궁녀와 관계를 맺었다.

              이를 보면, 사도세자에겐 정신분열증인 조현증 외에 사이코패스(psychopath)의 매우

              잔인하고 가학적인 성적 취향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비구니이건 기녀이건 마음대로 궁궐에 데려와 성적 노리개로 삼은 것도 모자라, 출가했다

              과부가  친동생 화완옹주(和緩翁主)와 근친상간을 의심할 만한 일들을 자주 벌여서 

              생모인 영빈 이씨의 속앓이가 특히 심했다.

              또 공공연히 부왕인 영조를 죽이겠다고 여기저기 떠들고 다녔다.  ​

              심지어 아들을 설득하기 위해 찾아간 생모 영빈 이씨를 죽이려 한 일까지 있었다.

              부왕에 반발해 우물에서 두 번씩이나 투신자살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

              패륜과 포악한 행동이 이미 극에 달해 있었다.

                          ​

​         임오화변의 화약고가 된 것은 나경언의 고변(告變)이다.

              이전까지는 영조가 사도세자의 패륜과 흉폭함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러나 '나경언'의 고변서(告變書)를 통해 영조는 왕세자의 행적과 패륜, 극악무도함을

              일시에 알게 됐다.

              격분한 영조는 이날 밤, 홍봉한의 조언을 받고 석고대죄하러 달려온 아들에게 다그쳤다. 

                        네가 왕손(王孫)의 어미를 때려 죽이고, 여승(女僧)을 궁으로 들였으며,

                        서로(西路)에 행역(行役)하고, 북성(北城)으로 나가 유람했는데,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이냐?

                        사모(紗帽)를 쓴 자들은 모두 나를 속였으니, 나경언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이 사실을 알았겠는가?

                        왕손의 어미를 네가 처음에는 매우 사랑하여 우물에 빠진 듯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마침내는 죽였느냐?

                        그 사람이 아주 강직하였으니, 반드시 네 행실과 일을 간(諫)하다가 이로

                        말미암아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또 장래에 여승의 아들을 반드시 왕손이라고 일컬어 데리고 들어와 문안할

                        것이다. 이렇게 하고도 어찌 나라가 망하지 않겠느냐?  

              여기에서 '왕손의 어미'는 훗날 경빈 박씨로 추존된 은전군의 생모 '빙애'를 말한다.

              바로 이 부분이 汝博殺王孫之母라고 기록돼 있다.  

              박살(博殺)은​ 주먹이나 몽둥이로 때려서 죽이는 것을 말한다.

              이를 볼 때, 사도세자가 의복 시중을 들며 간언을 하던 '빙애'를 잔혹하게 때려 죽인 

              은 이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가 있다.

              후궁 살인으로도 화가 덜 풀린 사도세자는 '빙애'가 낳은 어린 아들 은전군을 칼로 친 뒤

              연못에 던져버렸다.

              은전군은 연못에 그득한 연잎 때문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

              세상에 엽기도 이런 엽기가 없다.

              정조의 이복형제인 은전군이 정조왕 때 역모와 관련됐다며 지속적으로 구설에 올랐던건,

              아마도 억울한 죽음을 당한 모친의 한()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

​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기 하루 전 날 밤, 드디어 일이 터졌다. ​  

              칠흑같은 밤에 사도세자가 아버지를 죽이겠다며 영조가 머물고 있던 경희궁(慶熙宮)

              몰래 가기 위해 창덕궁 수구(水口, 하수도 구멍)를 통해 나가다가 여의치 않자 다시

              돌아온 초유의 일이 발생한 것이다. 

              사도세자의 패악과 패륜, 잔인무도함에 치를 떨던 영빈 이씨는, 급기야 아들이 지존의

              몸인 왕까지 죽이려 시도하자 종사(宗社)를 위해 뼈아픈 결단을 내렸다.

              영조를 찾아가 울부짖으며 이젠 왕세자를 '대처분'해야 한다고 눈물로 읍소하기에 이른

              것이다.

                        

                             병이 점점 깊어 바랄 것이 없사오니, 소인이 차마 이 말씀을

                             정리(情理)에 못할 일이오나 이는 성궁을 보호하고, 세손을 건지며,

                             종사를 평안히 하는 일이 옳사오니 대처분을 하소서!

              대처분!

              이는 왕세자를 죽이라는 뜻이다.​

              그동안 광증으로 온갖 극악무도한 짓을 무수히 했지만, 이제는 왕까지 죽이려 하는 급박한

              상황이 됐으니 더 이상 자신의 아들인 왕세자를 살려두어선 안 된다고 주청(奏請)

              했다.

              왕세자를 죽이는 길만이 왕을 보호하고, 세손(世孫)을 건지는 일이며, 또 종사를 평안하게 

              하는 일이라고 울부짖었다.

              여기에서 세손은 훗날 정조(正祖)를 말한다.   ​

              상황을 파악한 영조는 사도세자를 불러와 자신의 긴박한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變在呼吸之間! (변란이 호흡의 사이에 있다!)

              그리고 칼을 주며 자결을 명했다. 

              사도세자는 이를 거부하고 목을 매려 했다.

              신하들이 달려들어 만류하자, 이번엔 이마를 바닥에 짓찧기 시작했다.

              이를 본 영조가 뒤주를 가져오라고 했다.   ​

              신하들이 작은 뒤주를 가져와 사도세자가 들어가지 못하자, 이번엔 큰 뒤주를 가져

              오라고 명한 뒤 왕세자를 뒤주에 넣었다.

              사도세자는 뒤주를 발로 차며 나오려고 했다.

              영조는 신하들이 뒤주에 갇힌 왕세자에게 곡기를 넣어준다는 것을 알게 되자 격노하며,

              좀 더 튼튼하게 뒤주를 봉하라고 명했다.

              초경(初更)에 이르자 영조는 직접 나서 "아버지, 임금님! 저를 살려주소서!"라고 울부짖는

              아들을 뒤주에 넣고 직접 널판지를 대고 대못을 박은 뒤, 새끼줄로 다시 묶어 봉했다.

              이는 승정원 주서 '이광현'이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던 날을 기록한 <승정원 일기>

              내용이다.

​         방종과 패륜이 극단에 이른 아들의 훈육을 위해 뒤주에 가둔 영조는, 뒤주를 세손강서원

              (世孫講書院)에서 지키게 했다.

              세손강서원은 조선시대에 왕세손(王世孫)의 교육을 담당하던 관청이다.

              <영조실록>의 윤 5월 13일 기록엔 이 날의 상황이 짤막하게 적혀있다.

                                 세자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안에다 엄히 가두다.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힌지 8일 만에 세상을 떴다.

              누구보다 왕세자의 죽음을 슬퍼했던 영빈 이씨!...

              영빈 이씨는 사도세자의 3년상을 끝내고 난 뒤, 세상을 떴다.

              법도 상 궁궐 안에선 왕과 왕비, 왕세자 부부, 왕세손 이외에는 누구도 죽을 수가

              없으므로, 왕의 극진한 총애를 받던 영빈 이씨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세상을 뜨기 직전, 궁궐을 뒤로 한 채 궁 밖으로 나와 졸했다.

              슬픔에 젖은 영조는 후궁 제일의 의식으로 예를 갖춰보내고, 시호(諡號) 내릴 때도

              친히 집전했다. 

                       

 ​         이처럼 사도세자의 죽음에는 어떤 정치적인 이유나 당쟁이 연관돼 있지 않다.

              왕세자의 광증과 잔악무도함, 그리고 더이상 아들의 포악함과 극악무도함을 간과할 수

              없던 영빈 이씨가 왕과... 세손... 그리고 종사를 살리기 위해 왕에게 간청해 일어난

              일이다. 

              오랫동안 역사의 진실이 왜곡돼 알려진 것은 돈을 목적으로 하는 음모론자들의 주장이

              역사에 무지하고 성향 상 음모론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먹혀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도 사도세자를 왜곡한 책과 영화, 드라마가 계속 나오고 있다.   ​

​         비록 사도세자의 삶은 비극적으로 끝나고 왕 또한 되지 못했지만, 아들인 정조부터 순종에

             이르기까지 왕실 법통상으로는 모두 사도세자의 후손으로 조선을 마무리했다.

                        

 

              *  이 글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