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는 영조(英祖)에게 귀하디 귀한 아들이었다.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는 영조가 가장 총애하던 후궁이다.
6세 때 아기 나인으로 입궁한 것을 볼 때, 미모가 출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5~6세의 어린 나이로 입궁하는 궁녀들은 대개 고위직 궁녀들의 친인척들 중에서
선발한다.
왕과 왕비의 가장 측근인 지밀상궁(至密尙宮) 즉, 대령상궁(待令尙宮)을 만들기
위함이다.
이들은 대전(大殿)의 좌우에서 항상 대기하며, 잠시도 떠나지 않고 왕과 왕비를
모시는 궁녀들이다.
그야말로 상궁들 중 최고 실세이다.
또 승은(承恩)을 입을 확률도 다른 궁녀들보다 월등히 높다.
그에 반해 일반 궁녀들은 대부분 12~15세 쯤 입궁해 궁녀의 길로 들어선다.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는 31세라는 늦은 나이에 영조의 승은을 입었다.
2년 뒤 귀인이 됐다가, 다시 2년 뒤 내명부 정1품인 빈(嬪)의 첩지를 받아
영빈이 되고 총관(總管) 후궁이 됐다.
왕의 총애가 극진해 영조와의 사이에 1남 6녀나 두었다.
그 중 3명의 옹주는 일찍 세상을 떴다.
사도세자는 영조에게 특별한 아들이었다.
다른 후궁인 정빈 이씨가 낳은 효장세자(진종)가 10세 때 졸하고, 7년이 지난
뒤에 태어난 왕자이기 때문이다.
영조는 영빈 이씨가 사도세자를 출산할 때, 궁중의 법도를 어기고 영빈 이씨 옆을
지키고 앉아있을 정도로 왕자에 대한 기대가 컸다.
사도세자의 탄생은 온 나라가 잔치 분위기에 휩싸일 정도로 조선의 대경사였다.
41세에 아들을 얻은 영조는 왕자를 얻은 기쁨을 이렇게 표현했다.
삼종(三宗 :효종, 현종, 숙종)의 혈맥이 끊어지려 하다가 비로소
이어지게 됐으니, 돌아가서 여러 성조(聖祖)들을 뵐 면목이 서게
되었다. 즐겁고 기뻐하는 마음이 지극하고 감회 또한 깊다.
영조는 즉시 왕자를 중전의 양자로 들인 뒤 원자(元子)로 삼았다.
이듬해에는 두 살 짜리 어린 아들을 왕세자로 책봉했다.
이 원자 정호(定號)와 세자 책봉은 조선의 역사(歷史)에서 가장 빠른 기록이다.
왕자를 얻은 영조의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허나 왕세자는 어려서부터 역대 다른 왕세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성정을 보였다.
영특했지만 공부보다는 칼이나 활 등 무예에 관심과 재능을 보였다.
호방한 무인적(武人的) 기질이 강하게 나타났다.
이는 타고난 천품(天稟)이므로 이를 좋다, 나쁘다 평가할 부분은 아니다.
아버지인 영조와 '맞지 않았다.'고 표현하는 게 가장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무수리의 아들로 태어나 간난신고를 겪고 구사일생으로 왕이 된 영조는 평생을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했다.
신하들의 학문을 압도할 정도로 공부에 매진해 대학자(大學者) 소리를 들었다.
그런 아버지에게 사도세자의 성정과 행동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눅이 든 왕세자는 공부에 흥미를 잃고 점점 태만해졌다.
기록을 살펴보면, 영조는 아들을 사랑하는 것만큼 매우 엄격하게 훈육한 것으로
보인다.
대통을 이어받게 하기 위해 이른 나이부터 엄격히 제왕학(帝王學)을 가르쳤다.
하지만, 왕세자는 이를 감당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부왕(父王)의 엄격함을 견디지 못해 했다.
이로 인해 아버지와의 사이가 점점 멀어졌다.
기대가 컸던만큼, 왕의 실망도 컸다.
사도세자 또한 심리적으로 위축돼 큰 혼란이 찾아오고, 이어 정신적인 질환으로
까지 이어졌다.
결국 사도세자는 자신의 포악한 행동을 전혀 제어하지 못하게 됐다.
또 가악성(加虐性)도 극심해졌다.
심리학자나 정신분석학자들은 사료에 나오는 사도세자의 행동들을 분석한 뒤,
심각한 조현병(調絃病)과 함께 사이코패스(psychopath)를 의심한다.
조현병이란 정신분열증(schizophrenia)을 말한다.
조현병이란 병명은 2011년 있었던 <약사법 일부 개정 법률안>에 따라 명칭이
바뀐 것이다.
조현(調絃)은 '현악기(絃)의 줄을 조율한다(調)'는 뜻이다.
정신분열증을 겪는 환자의 상태가 마치 '정상적으로 현악기가 조율되지 못했을
때와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병명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왕의 대통을 이을 왕세자 신분으로 그런 엽기적이고 포악한
행동을 할 수가 없다.
왕세자는 세계의 왕족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난폭함과 가학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도세자가 극악무도한 행동에 탄력을 받기 시작한 것은 1760년 부터이다.
불안장애(anxiety disorder), 강박장애(obsessive compulsive disorder),
충동조절장애(impulse control disorders)에 시달리던 사도세자는 급기야
정신에 분열이 나타나는 조현병에 이르게 된다.
특히 가학성(加虐性)이 심해지면서 살인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일종의 취미였다
대상은 주로 힘없는 약자들이었다.
대부분 내시나 나인, 노속(奴屬), 그리고 여인들을 공격하고 살해했다.
후궁도 때려죽였고, 자식도 살해를 기도했다.
바로 '빙애'라는 궁녀(경빈 박씨)와 은전군(恩全君)이다.
빙애는 1757년(영조 33년)에 사도세자의 후궁이 되었는데, 당시 할머니뻘인
인원왕후殿의 나인이었다.
궁중 법도로는 윗전의 나인을 건드리는 것은 금기사항이자 불문율이었다.
이는 윗사람의 물건을 취한 것으로 간주돼 패륜처럼 여겼기 때문이다.
때문에 영조는 왕세자가 법통상 할머니가 되는 인원왕후殿 나인을 건드린
것에 대해 매우 분노했다.
영조는 이날 밤, 대신들을 소집해 급기야 왕세자에게 양위한다고 발표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도세자는 곧바로 기절했다.
사도세자는 부왕의 꾸짖음을 당할 때마다 자주 기절하곤 했다.
그로부터 4년 뒤, 사도세자는 자신의 비행과 포악한 행동에 대해 자주
간언(諫言)하는 '빙애'를 참혹하게 때려죽였다.
그리고 빙애의 아들인 어린 은전군을 칼로 친 뒤, 연못에 던져버렸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은전군의 별명이 하엽생(荷葉生)인 이유이다.
궁궐에선 '연잎이'라고 불렸다.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지어준 이름이다.
할아버지인 영조는 이 가련한 서손자를 불상히 여겨, 은전군의 字를 연재(憐哉),
즉 '가련하도다'로 지어주었다.
은전군은 철종의 할아버지인 은언군의 이복형제이다.
조현병은 걷잡을 수 없이 심해지고, 부왕인 영조와의 사이는 점점 멀어져만갔다.
왕세자는 조석으로 왕에게 문안 인사를 여쭙는 것이 법도임에도 불구하고, 4개월
동안 한번도 부왕(父王)에게 문안인사을 가지 않았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있어서도 안되는 일이었다.
이와 함께 사도세자의 가학성의 대상이 점차 확대되기 시작했다.
후궁은 물론이고 부인인 혜경궁 홍씨도 공격했고, 시강원에서 왕세자를 가르쳤던
스승의 살해를 기도한 적도 있다.
술 마신 걸 영조에게 일러바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생모인 선희궁 영빈 이씨까지 죽이려 했다.
선희궁의 나인도 죽였다.
근친 간에도 패륜을 일삼았다.
또 내의원 소속 의관(醫官)들도 죽이고, 가마꾼도 죽였으며, 내시부의 전용 부서인
액정서(掖庭署) 소속 관리들을 수없이 죽였다.
주로 부리는 만만한 사람들이었다.
나경언의 고변(告變) 후,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왜 사람을 죽이느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심화(心火)가 나면 견디지 못하여 사람을 죽이거나
닭, 짐승을 죽이거나 해야 마음이 낫습니다."
단순히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서, 또는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부리는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였다는 설명이다.
500년 조선 역사상, 왕세자가 사람을 이렇게 많이 직접 참혹하게 죽인 예는
단 한번도 없었다.
동서고금 어떤 역사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평범한 민초들조차 이런 짓은 하지 않는다.
질병이지만 사도세자의 행동은 희대의 연쇄 살인마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성질을 참지 못할 때는 창덕궁 낙선재 우물에서 자살을 기도했다.
두 번이나 투신자살 소동을 벌렸다.
1761년 봄에는 아버지 영조 몰래 관서지방(평안도)을 20일간 유람 다녀왔다.
당시 평안도는 군사적 요충지라 이곳으로의 무단 여행은 부왕과 조전의 오해를
사고도 남을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대성산 광법사에서 만난 여승 '가선'에게 반해 궁궐로 데려와서는
비구니에게 세자궁에 속한 종2품 내명부 품계인 양제(良娣)의 첩지를 내렸다.
또 평양에서 기생 5명도 궁궐로 데려왔다.
왕세자의 평안도행을 거의 5개월 후에나 알게 된 영조는 격노했다.
* 이 글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