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와 사진...
이 두가지를 생각하면, 난 자동적으로 한 일본인이 떠오른다.
일본의 사진작가 무라카미 덴신(村上天眞)!
을미사변이 일어난 1895년 당시, 이 자의 직책은 조선 왕실의 '촉탁 사진사'였다.
명성황후의 사진을 찍었던 유일한 인물이다.
1894년부터 1895년 을미사변 직전까지 왕실의 촉탁 사진사로 활동한 '무라카미
덴신'은 왕실과 중요 사건 등의 사진을 찍었다.
특히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인 녹두장군 전봉준의 유일한 사진을 찍은 인물로 유명하다.
'무라카미 덴신'은 남산에 있는 일본 영사관 옥사에서 조선 법부로 호송되는 전봉준의
사진을 촬영했다.
바로 이 사진이다!
그렇다면 무라카미 덴신(村上天眞)은 누구일까?...
이 자는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육군에 종군해, 1894년 9월에 있던 평양
공격에 참가한 뒤 귀국했다.
그리고 아사히 신문의 전신인 <메자마시 신문>의 특파 사진사가 되어 조선에
입국했다.
그 후 조선 왕실의 촉탁 사진사가 되어 왕실과 관련된 주요 사진들을 촬영했다.
이쯤되면, 당신은 1895년 10월 8일 오전 6시 30분 경, 600여 명의 일본 군인과
수십 명의 낭인들이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일제히 경복궁에 난입한 <여우사냥>
작전이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또하나...
일본 폭도들의 인솔자가 왕비(명성황후)의 인물 사진 한 장을 들고 건청궁에 진입한
뒤, 궁녀들을 위협해 얼굴 하나하나를 확인하며 왕비를 찾는 참혹한 장면이 연상될
것이다.
이 사진은 낭인들이 왕비의 실제 얼굴과 대조하기 위해, 당시 조선 왕실의 촉탁
사진사로 활동하던 일본의 사진작가 무라카미 덴신으로부터 미리 입수한 것이다.
사진과 궁녀들을 일일이 대조한 끝에 일본 무뢰배들은 마침내 사진 속 인물을 찾아내
시해하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
바로 을미사변이다.
<여우사냥> 작전이 종료되는 순간이었다.
객관적인 판단을 하기 위해 당시, 주한 영국 총영사 힐리어(Hillier)가 네 명의 주요
목격자들로부터 들은 증언을 토대로, 현장 상황을 북경 주재 영국 공사 오코너(Oconer)
에게 긴급 보고한 보고서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네 명의 주요 목격자들이란... 왕비 피살 현장을 직접 목격한 궁녀와 늙은 의녀, 그리고
한국군 연대장 '현흥택'과 역시 현장을 목격한 궁중의 하급관리이다.
일본군 엄호 아래 건청궁의 앞뒷문을 통해 침입해 들어온 민간 복장의 일본인들에
대해, 한 무리의 한국군 복장을 한 군인들과 일본인 장교 및 사병들이 경비를 서
주었다. 그들은 곧바로 왕과 왕비의 처소로 가서 몇몇은 왕과 왕태자의 측근 인물
들을 붙잡았고, 다른 자들은 왕비의 침실로 향했다.
이미 궁내에 있던 궁내부 대신 이경직은 서둘러 왕비에게 급보를 알렸고, 왕비와
궁녀들이 잠자리에서 뛰쳐나와 달아나 숨으려 하던 순간이었다.
그때 살해범들이 달려들자 궁내부 대신은 왕비를 보호하고자 그의 두 팔을 벌려
왕비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살해범들 중 하나가 왕비를 수색하고자 손에 왕비 사진을 갖고 있었던 데다가,
그의 보호 행위는 살해범들이 (왕후를 알아볼 수 있는) 단서가 됐다.
(Hillier to Oconer Inclosure I in NO.IIIm Seoul, Oct. 11, 1895 F.O.405)
여러 상황들을 살펴볼 때, 일본 폭도들이 왕비를 찾기 위해 조직적으로 미리 왕비의 인물
사진을 준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명성황후의 사진을 넘긴 자는 당시 조선 왕실의 촉탁 사진사로 명성황후의
인물 사진을 찍었던 무라카미 덴신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해 일본의 기록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은 조선의 왕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지른 뒤, 국제사회의 따가운 질책과 비난을
받았다.
이에 '우치다' 영사는 미우라 공사 및 본국 외무성과 협의해 가며, <여우사냥> 작전과
연관이 있는 일본 민간인 48명에게 퇴한(退韓) 긴급 조치를 내린다고 10월 14일에
발표했다.
그리고 1차 퇴한(退韓) 대상자들을 10월 20일, 여객선인 '쓰쿠고가와마루' 편으로 귀국
시킨다.
한데 6일 전인 10월 14일, 비공식적으로 인천에서 군용선(軍用船)인 '오와리마루(尾張
丸)'를 타고 황급히 한국을 떠난 자들이 있다.
이들 모두 을미사변과 깊은 연관이 있는 자들이다.
주한 일본공사관에서 본국 정부와 주고받는 전신을 암호로 전달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던
우편 전신 서기(書記) 두 명도 동시에 '오와리마루'에 승선했다.
한데, 바로 여기에 조선 왕실 촉탁 사진사로 활동하던 민간인 무라카미 덴신도 포함돼
있었다.
만일 조선 왕실 사진사인 무라카미 덴신이 <여우사냥> 작전과 직접 연관이 없었다면,
또 명성황후의 사진을 찍어 공사관에 넘긴 자가 아니라면... 1차 퇴한 명령 대상자로
지목된 자들보다 6일 전에 여객선도 아닌 군용선을 타고 가장 먼저 도망치듯 한국을 떠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이에 관련된 기록을 한번 살펴보자!...
이 보고문은 '오와리마루'가 입항하는 히로시마 우지나 항(港)의 나가타 중좌가 데라우치
대본영 운수장관에게 보낸 전문(電文)이다.
<NO.330 10월 16일, 우지나의 나가타 중좌가 데라우치 소장에게>
오와루마루 승선자들은 법부고문 호시 도오루, 법부고문 보좌관 히라야마
가쓰쿠라, 무라카미 덴신, 호시의 종복 후하 미쓰토테, 우편전신 서기인
히라마쓰 리이치도, 대본영부 우편전신 서기 도기와 치카히데... (중략)
13인 외에 삼등군의 요코이 다다쿠니의 종자 1명임.
이번엔 을미사변 당시, 사진을 손에 들고 왕비(명성황후)를 찾아다니는 일본인 난입자가
있었다는 객관적인 기록들을 한번 살펴보자.
여인들이 살해된 직후, 일본패의 두목(오카모토)은 주머니에서 사진 한장을
꺼내 확인한 뒤, 시신들 중 둘을 밖으로 내가도록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이어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이 두 시신 중 하나는 왕비였으며...
(North China Herald, Oct.25. 1895 in Park Il-Keun, ed, op, cit
p.1307)
또 다른 기록은 일본 도치기 縣 사노(佐野) 市 향토박물관에 보관 중인 '스나가 하지매'의
기록이다.
<스나가 노트>에는 훗날 일본에 망명하는 우범선이 사건 당일 건청궁에 도착했을 때
목격한 상황을 이야기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왕비는 이를 향해 쓰러진 채 후우후우 숨을 쉬고 있었다.
그때 경무청 촉탁 의사인 '사세 구마데츠'가 와서 수건으로
상처난 곳의 크기를 쟀다.
장사(낭인)들은 사진과 왕비의 얼굴을 대조해 보고 있었다.
왕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스나가 하지매의 '스나가 노트'>
위에서 언급한 을미사변 당시 '사진'에 관한 3건의 객관적인 기록들을 살펴볼 때,
명성황후가 사진을 찍은 것은 사실로 보인다.
때문에 고종이 거액의 현상금을 걸고 명성황후의 사진을 그토록 오랫동안 찾았던 것이다.
당시 조선 왕실에서는 무라카미 덴신이 왕비의 사진을 일본 공사관에 넘긴 사실도,
또 이 자가 사변 직후 군용선을 타고 일본으로 도망쳤다는 사실도 전혀 몰랐을 것이다.
아니 의심조차 못 했을 것이다.
이는 무라카미 덴신이 그로부터 2년 후, 다시 조선에 입국해 경성에 대형 사진관을
열어 호황을 누린 사실로도 증명이 된다.
일본측 입장에서 보자면, <여우사냥> 작전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명성황후의 사진이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다.
때문에 조선 왕실 촉탁 사진사로 활동하던 '무라카미 덴신'이 왕비의 사진을 찍도록
만들고, 그것을 일본 공사관에서 넘겨받아 사건 당일 폭도들에게 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지 않고서는 민간인 사진사를 1차 퇴한(退韓) 대상자들보다 6일 전, 비공식적으로
여객선도 아닌 군용선을 태워 도망치듯 황급히 한국을 떠나게 했을 이유가 없다.
무라카미 덴신은 을미사변이 일어난 지 2년 뒤인 1897년, 일본의 조선 왕비 시해
사건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줄어들자 다시 조선에 입국했다.
그리고 경성 한복판에 자신의 이름을 딴 덴신도(天眞堂)라는 큰 사진관을 열었다.
유명 사진작가가 운영하는 사진관으로 유명했던 덴신도는 조선인과 일본인은 물론,
외국인들의 호평을 받으며 나날이 번창해 호황을 누렸다.
이는 고종과 조선 왕실이 무라카미 덴신을 전혀, 단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다는 걸
의미한다.
사업에 성공한 무라카미 덴신은 <在조선 내지인(內地人) 실업가 인명 사전>에
수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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