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소개한 명성황후 관련 사진들 중엔 명성황후가 없다.
이는 일제 강점기 때 역사학자인 호암 '문일평' 선생이 명성황후로 칭해지는
사진들을 모아서, 명성황후를 직접 모셨던 상궁들에게 확인을 부탁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명성황후를 측근에서 모셨던 상궁들은 세간에 알려진 사진들 중엔 왕비가 없다고
확인해줬다.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사진의 주인공은 궁녀이거나 흥선대원군 첩인 '초선'이다.
또 일본 사진잡지에 소개된 궁녀 사진을 그림을 그리거나 석판화로 만들며 원본인
궁녀의 모습이 조금씩 달라져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심지어 합성(트리밍)한 사진까지 있다.
이런 사실들을 확인하지 않은 채, 아직도 세간에 알져진 사진들 중에 명성황후
사진이 있다고 우기는 것은 억지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사진들은 여러 기록들을 비교 분석하면 실체를 알아낼 수 있는
사진들이다.
다시 정리하면, 앞서 소개한 여러 사진이나 그림 중엔 결코 명성황후가 없다.
진위 여부를 따질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명성황후는 왜 그리 사진 찍히는 것을 싫어했을까?...
개항 후부터 을미사변 전까지 , 명성황후는 조선의 유력 정치 권력자로 서방에
많이 알려졌다.
그래서 구미(歐美)에서는 조선에 기자들을 파견해 왕비를 취재하게 했다.
명성황후는 외국 신문 특파원들의 인터뷰에 응하면서도 사진만큼은 한사코 찍으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특집 기사에도 사진을 찍지 않아 상궁의 사진이 대신 실리게
했다.
<最古 철종 어사진 기사는 오보이다.>에서 이미 언급한 바가 있지만, 고종이
퍼시벌 로웰에 의해 생애 처음으로 사진을 찍은 건 1884년 3월 10일의 일이다.
을미사변이 일어나기 무려 11년 전의 일이다.
( * http://propolis5.blog.me/220381836582 참조)
신문물을 접한 고종은 이후, 사진 찍는 것을 매우 즐겼다.
왕세자(순종)가 10살 때 농수정에서 찍은 사진을 본 왕비 또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는 <윤치호의 일기>에 그대로 기록돼 있다.
곤전(명성황후)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동궁 야야(도련님)의
어진을 보았느냐?"고 하였다.
(중략)
... 인하여 어진을 보고 물러나, 공사관으로 돌아오다.
<3월 19일자, 윤치호의 일기 중에서>
사진이라는 신문물에 대해 많은 관심과 호기심이 있었음에도 명성황후는 사진
찍히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고종이 1884년부터 사진 찍는 걸 즐겨, 다양한 사진들을 남긴 것과는 대조적이다.
또 순종비와 순헌황귀비, 덕혜옹주 등 왕실의 여인들이 다양한 사진을 남긴 것과도
확실히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명성황후는 왜 그토록 사진 찍히는 것을 싫어했을까?...
그 이유를 추측하는 여러가지 설들이 존재한다.
첫째, 암살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사진 찍히는 것을 피했다는 설이다.
명성황후 시해를 최초로 보도한 뉴욕 타임스는 1895년 11월 10일자 <조선 황후의
캐릭터>라는 기사에서, 명성황후가 암살 위협에 노출돼 침전마저 베일에 가린
이야기들을 전했다.
이 기사는 '웨스트민스터 가제트'의 기사를 인용 보도한 것이다.
기사 내용을 한번 살펴보자.
최근 시해된 조선의 황후는 아주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모든 보도가 사실이라면 그녀는 (왕비의) 자격이 없었다.
왕을 심하게 다루고, 또 돈을 받고 비싼 값에 매관매직했다.
황후는 사람들을 탄압했기 때문에 끊임없이 암살의 두려움에 떨었고, 밤을
꼬박 새는 습관이 있었다.
그녀는 오전 5시나 6시까지 침소에 들지 않았고, 몇 개의 침실이 있었기 때문에
측근 외에는 (왕비가) 어디서 자는지 알 수가 없었다.
또한 침실엔 비밀문이 있어서 비상통로로 나가면 곧바로 달아날 수 있는 운송
수단이 늘 준비돼 있었다.
그러나 (시해로 인해) 결국 이 모든 예방책이 소용없게 됐다.
둘째, 왕비를 시해한 낭인과 군인들이 일본 정부의 지시를 받아 명성황후의 사진을
모두 없앴다는 설이다.
을미사변 직후, 고종은 명성황후의 사진을 찾기 위해 거액의 현상금까지 걸었지만
끝내 명성황후의 사진은 나타나지 않았다.
외국에 명성황후의 사진이라고 알려진 사진들 또한 모두 궁녀 또는 흥선대원군의 소실
사진이었다.
왕인 고종마저도 끝내 명성황후의 사진을 찾지 못했다.
이 부분에서 한가지 유념할 부분이 있다.
고종이 명성황후의 사진을 찾았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명성황후가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왕비가 사진을 찍은 적이 없다면, 고종이 거금의 현상금을 걸면서까지 왕비의 사진을
그토록 오랫동안 찾았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명성황후 사진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셋째, 명성황후가 미모를 지니긴 했지만 천연두 자국으로 살짝 곰보였기 때문에
사진 찍히는 것을 극도로 피했다는 설이 있다.
어렸을 때 천연두를 앓아 마마 자국으로 약간 곰보였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여러 증언들을 살펴보면, 이 설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우선 종친(宗親)의 설명이다.
의친왕 손자이자 국립고궁박물관 전문위원이었던 이혜원씨는 이렇게 말한 바가
있다.
연세 여든이 넘은 집안 고모들에 의하면, 명성황후는 얼굴에 곰보 자국이
있어 나서기를 매우 싫어했다고 합니다.
마마 자국같은 게 얼굴에 있었다는 것이지요.
물론 이런 말씀을 하는 고모님들도 어릴 때 집안 어른들께 전해 들었던
이야기니까,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대대로 종친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일제가 일부러 악의적으로 소문냈다고
우기는 것은 무리이다.
명성황후가 미모는 지녔으되, 약간의 마마 자국이 있어 컴플렉스 때문에 사진 찍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명성황후의 살짝 곰보 얘기는 다른 곳에서도 전해진다.
명성황후를 모셨던 상궁들도 왕비가 살짝 곰보였다는 것을 얘기한 바가 있다.
또 한가지!
여러 기록들을 살펴보면, 명성황후는 평소 화장이 매우 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명성황후를 알현한 외국인들은 왕비의 얼굴이 창백하다 못해 항상 푸른 빛이 돌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유명 칼럼니스트였던 이규태 씨 글이나 화장 관련 책들을 보면, 명성황후가 납중독
으로 상당히 고생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또한 다양한 기록들을 찾아 인용한 것이다.
화장을 진하게 한 이유는 마마 자국을 감추기 위한 방편일 수도 있다.
명성황후가 납중독이 된 이유로 거론되는 사람은 바로 베베르 초대 러시아 공사의 부인
이다.
당시 유럽 사교계 귀부인들이 많이 사용하던 화장분을 헌상해, 이를 명성황후가 너무
과도하게 바르는 바람에 납 중독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다.
화장분으로 진주가루를 과도하게 사용했기 때문에 그 속에 함유된 연독과 납 성분으로
인한 부작용 때문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그렇다면 명성황후는 과연 사진을 찍었을까?...
아니면, 단 한번도 사진을 찍은 적이 없을까?...
이 부분은 일본측 기록들을 분석하면 알 수 있다.
다음엔 일본 기록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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