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국신문 기사에 나오는 명성황후 모습
<1903년 11월 28일, 러시아 신문 ‘노보예브레먀’(신시대)가 명성황후 초상화라고
보도한 삽화. 1895년 2월, 일본 사진잡지에 실렸던 '조선 궁녀'의 사진 중 얼굴
부분만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오른쪽 문서는 1903년 고종 즉위 40주년 축하사절로 한국에 왔던 러시아 특명전권
공사가 본국에 보낸 ‘1898년 전후 한국에 대한 보고서’ 중 일부이다.
이 문서는 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에 보관돼 있다.>
<을미사변이 일어나기 일년 전인 1894년 11월, '드모리스트
패밀리 매거진'의 명성황후 특집 기사에 실린 사진.
사진엔 ‘시중드는 조선 왕비의 상궁(The Queen Of Korea’s
Chief Lady In Waiting)’이란 제목이 붙어있음에도, 한국엔
이 사진이 명성황후라는 주장이 줄기차게 있었다.
같은 해 일본의 사진 잡지에 소개됐던, 신발을 신지 않고
버선발로 앉아있는 조선의 궁녀 사진을 그대로 실은 것이다.>
(사진: 한국해연구소)
<1895년 프랑스의 '일루스트라시옹'에 실린 명성황후 사진이다.(사진 맨 왼쪽)
중간의 사진은 1895년 11월, 스페인 화보 신문인 '라일루스라시온 에스파뇰라
이 아메리카'에 실린 명성황후 삽화이다.(사진 가운데)
둘 다 일본의 사진 잡지에 실렸던 궁녀 사진을 다시 그리거나 또는 석판화로
본떠 삽화로 사용했다.
오른쪽 사진은 1904년, 이탈리아 외교관인 까를로 로제티의 책인 '꼬레아 에
꼬레아니'에 '궁중 여인'이란 이름으로 실려 명성황후로 널리 알려졌다.
이 사진은 합성이라는 문제가 있는 사진이므로, 좀 더 큰 사진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사진 : 한국해연구소)
책 '꼬레아 에 꼬레아니'(1904)에
'궁중 여인'이란 이름으로 실려있다.배경을 합성(트리밍)해 마치 새로운 사진처럼 만들었다.
널리 알려졌던 사진이다. 이를 한국에서 명성황후 사진 운운하며 논란을 벌이는 것
자체가 창피한 일이다.>
<논란을 일으키는 여러 명성황후 사진의 원본이 된 궁녀 사진.(1904)>
<1894년 9월 20일자 명성황후와 시녀(원문엔 노비라 칭함.) 삽화를 게재한 '제임스
타운 위클리'. 중국옷을 입은 것으로 그린 상상화하다.
기사엔 "활달한 성품의 왕비는 코가 긴 편이고 단호한 턱선과 광대뼈가 도드라진
모습이다. 머리칼은 부드러운 갈색이고 눈도 그렇다. 입은 약간 큰 편이지만 풍부한
대화를 할 때는 최고의 경주마들이 달릴 때처럼 콧구멍이 넓어지기도 한다."...
이런 내용이 실려있다.> (사진: 미의회도서관 DB)
<명성황후 시해 후 엿새가 지난 1895년 10월14일, '워싱턴 포스트의 이브닝
스타'에 실린 명성황후 삽화. 이 또한 상상화이다.
이 기사에서 기자는 "조선을 꼭두각시로 만들기 위해 일본에서 파견된 외교관들이
명성황후에게 꼼짝없이 당한 적이 있다."며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을 상세하게
보도했다.> (사진: 미의회도서관 DB)
<고종과 명성황후 삽화를 게재한 '하와이안 가제트' 기사.
역시 중국옷을 입혀놓았다. 이는 서방에 조선의 궁중 여성
복식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895년 10월 20일 자 '에버빌 프레스 앤 배너'의 기사에 나오는
명성황후로 그린 삽화. 역시 중국옷을 입은 상상화이다.>
(사진 : 미의회 도서관 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