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6.6>
"현존하는 국내 最古 사진은 창덕궁 철종 어진"
"1861년 서울 창덕궁에서 찍은 조선 철종의 어진(御眞)이 미국 밀워키주립대
미국지리학회 도서관에서 발견됐다.
현재까지는 1871년 신미양요 때 영국인이 강화도 광성보 전투 현장을 찍은
사진과, 같은 해 프랑스인이 역관 오경석을 찍은 사진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국내 사진으로 알려졌으나, 철종의 어진은 이보다 10년을 앞선 것이다."
<2015.6.6. 유광언씨가 미국 밀워키주립대 미국지리학회 도서관 소장품 사용>
오늘 <연합신문>이 잘못된 기사를 냈다.
한마디로 오보이다!
철종 어사진이 처음 발견됐다는 잘못된 기사를 내는 바람에, 독자들이
확인 요청을 하는 등 난리가 났다.
하지만 이는 틀린 기사이다.
어쩌다 큰 언론사의 기자가 이런 실수를 했는지 그 이유가 자못 궁금하다.
이 사진은 철종(哲宗)이 아닌 고종(高宗)의 어사진이다.
'어사진'이란 용어는 현재 국어사전에는 나오지 않지만, 1890년 대에
발간되던 <그리스도 신문>에서 처음 사용했던 단어이다.
이 사진은 지운영(池雲英, 1852~1935)이 고종을 찍은 사진이다.
비교해보라!...
똑같은 사진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위의 사진은 1884년 3월 13일, 지운영이 연경당의 농수정(濃繡亭)을 배경으로
찍은 고종의 사진이다.
지운영은 그림으로 그린 어진과 같은 분위기가 나도록 고종을 정면에 앉히고,
계단에 카펫을 깔아 실내 분위기를 연출했다.
중인 출신 지운영은 일본 유학을 한 서화가이자 사진가로, 고종의 어사진을
최초로 찍은 사진가이다.
종두법(種痘法)을 시행한 '지석영'의 형이다.
개항 이후 일본 고베에서 사진을 배운 그는 1880년대 초반 종로 마동에서
촬영국을 운영했으나, 1882년 임오군란으로 인해 문을 닫았다.
그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왕의 사진을 찍는 영광의 기회를 얻게 됐다.
지운영은 고종과 왕세자이던 순종의 사진을 각각 한 장씩 남겼다.
고종이 최초로 사진을 찍은 것은 지운영이 사진을 찍기 사흘 전인 1884년 3월
10일의 일이다.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책을 남긴 미국인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이 사진을 찍었다.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로웰(1855~1916)은 한국에서의 활동 때문에 노월(魯越)
이라는 한국 이름도 가졌다.
애리조나 로웰 천문대(Lowess Observatory)를 세운 유명한 천문학자이자
외교관으로, 명왕성을 발견한 인물이기도 하다.
조선이 1883년 미국에 보빙사(報聘使)를 파견했을 때 안내를 맡아 동행했다.
고종은 그 공을 치하하는 의미로 한국에 초청해, 로웰은 1883년 12월 20일부터
이듬해 3월18일까지 조선에 체류하며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때 고종의 사진을 처음으로 찍게 됐다.
역시 배경은 연경당(演慶堂)의 농수정이다.
이 사진이 바로 로웰이 찍은 고종의 사진이다.
지운영이 찍은 고종의 사진과 배경이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래 사진은 보빙사(報聘使) 파견 때 동행했던 퍼시벌 로웰의 모습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익숙한 사진이다.
위의 사진에 나오는 서양인이 바로 '퍼시벌 로웰'이다.
그렇다면 로웰과 지운영이 사흘 간격으로 사진을 찍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3월 5일이 왕세자(순종)의 10번째 생일이었기 때문이다.
명성황후와의 사이에 난 첫아들을 잃은 고종은, 세자가 열 살이 된 걸 무척이나
기뻐했고 궁에서는 연일 잔치가 이어졌다.
연경당 농수정에서 찍은 고종의 사진은 왕세자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촬영됐다.
이 사실은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도 기록돼 있다.
로웰은 왕보다 배경을 중시해 사진을 찍은 반면, 지운영은 전통 어진 방식으로
왕을 중앙에 앉히고 밑에 카펫을 깔은 뒤 사진을 찍었다.
배경보다는 어진처럼 왕의 모습 위주로 찍은 것이다.
지운영은 로웰보다 사흘 늦게 사진을 찍었지만, 일주일 만에 사진을 뽑아서
왕에게 바쳤다.
'사진'이란 최초의 신문물을 접해본 왕실 가족의 기쁨은 컸다.
특히 왕세자의 사진을 본 명성황후가 매우 기뻐했다.
측근인 윤치호에게 “동궁 야야(도련님)의 어진을 보았느냐?”라고 물으며 기쁨을
나타냈다.
이 사실은 <윤치호의 일기>에 기록돼 있다.
곤전(명성황후)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동궁 야야(도련님)의 어진을
보았느냐"고 하였다.
(중략) 인하여 어진을 보고 물러나 공사관으로 돌아오다.
(3월 19일자, <윤치호의 일기> 중)
'사진'이란 신문물을 접해본 왕실 가족의 기쁨이 당시 어떠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로웰은 고종을 촬영한 후 일본으로 출국해 사진 전달이 늦어졌다.
5개월 후인 8월 27일, 일본에 머물던 로웰은 사진첩을 윤치호에게 보냈고 이는
왕실에 전달됐다.
로웰이 만들어 왕에게 보낸 사진첩에는 다른 사진 등 모두 53장이 들어있었다.
사진의 매력에 흠뻑 취한 고종은 이후, 사진 찍는 것을 매우 즐겼다.
많은 사진을 찍어 각국의 외교관들에게 나눠주고, 백성들도 접할 수 있게 했다.
하나의 통치 방식으로 이용한 것이다.
선그라스를 낀 사진 등 고종의 다양한 사진들이 남아있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고종의 많은 사진은 은둔의 나라 '조선'을 세계에 알리는데 일조를 했다.
<로웰이 찍은 고종 사진(왼쪽)과 지운영이 찍은 사진들(오른쪽 2장).
오른쪽은 지운영이 촬영한 것으로 밝혀진 같은 장소의 왕세자
(순종)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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