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이 알고 있는 조선 제 22대 왕 정조(正祖)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아마도 이 모습이거나...
* 또는 구군복(具軍服)을 입은 이 모습일 것이다.
이런 모습이 정조의 진짜 모습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다.
심지어 교과서에까지 이런 어진(御眞)이 수록돼 있으니 이런 모습이 진짜
정조의 모습이라고 오해할만 하다.
위의 정조 얼굴을 보면, 그의 행적에서 느낄 수 있는 왕의 총기나 카리스마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매우 평범하고 문약해 보이는 느낌이다.
심지어 드라마에서 나오는 정조의 어진 또한 매우 문약해보이는 모습이다.
위의 초상화는 <바람의 화원>에서 도화서 화원(畵員)이 그린 정조 어진이다.
그 밖에 다른 드라마에서도 정조의 모습은 전형적으로 문약해보이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바람의 화원>
<다모>
<성균관 스캔들>
... 오랫동안 이어온 이런 오해 때문에, 현재 존재하는 정조 어진을 진짜 정조의
모습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한데...
이몽 때문에 요즘 한창 역사 공부에 재미를 붙인 독자가 내게 이런 질문을 해왔다.
어진에서 나타나는 정조의 이미지와, 기록에서 나타나는 정조의 모습이 너무 달라
매치가 잘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질문을 하는 것만으로도 그가 요즘 얼마나 성실히 역사공부를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가 있다.
내가 이 바쁜 와중에 긴 포스팅을 하는 이유이다.
우리에게 알려진, 심지어 교과서에까지 기록된 정조(正祖)의 어진은 정조의 진짜
모습이 아니다!
정조의 표준 영정으로 이름 붙여진 맨 위의 초상화는 1989년, 화성행궁(華城行宮)이
있는 수원에 거주하던 이길범 화백이 상상화(想像畫)로 그린 것이다.
대저 상상화가 무엇인가?...
실물을 보지 않고 자기의 추측과 상상으로 그린 그림을 말한다.
때문에 평범하고 문약해 보이는 느낌의 정조 어진은 정조의 진짜 용안(龍顔)과는 아무
상관없는 엉뚱한 얼굴이다.
불과 26년 전에 그린 한 화백의 그림이 곧바로 정조의 표준 영정으로 지정돼 교과서에
실리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정조의 진짜 어진(御眞)으로 국민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고 만 것이다.
정조의 진짜 어진(御眞)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조의 어진은 세손 때를 비롯해 모두 3번 공식적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6.25 전란 통에 부산시 동광동에 위치한 부산 국악원 창고에 있던 <조선
왕 어진 임시보관소>에 그만 화재가 나는 바람에 모두 불타서 소실됐다.
전란 통에 어진의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관련 공직자들의 심각한
직무유기에 해당된다.
한데, 문제는 이게 아니다.
정조의 어진으로 고착화된 표준 영정에는 매우 불편한 진실이 숨겨져 있다.
<순조실록>에는 아버지 정조의 모습이 글로 상세히 남아있다.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에도 정조의 모습이 기록돼 있다.
이뿐인가?
조선시대 구황실 족보인 <선원보략(璿源譜略)>엔 정조의 용안이 어진 모사본으로
정확히 남아있다.
바로 이 그림이다!
<선원보략에 실려있는 정조의 진짜 모습>
그렇다면 이 그림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 어진은 왕실 족보에 싣기 위해, 어진을 보고 모사(模寫)한 진짜 정조의 모습이다.
이렇게 어진이 정확히 남아있음에도, 엉뚱한 그림을 그려 정조의 어진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를 추정해 볼 수가 있다.
하나는, 정조의 어진을 그리기 전 전혀 취재를 하지 않았거나 관련 전문가의 자문을
받지 않은 채 왕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것이다.
또하나는, <선원보략>에 나오는 정조의 어진이 그림 그린 화가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또는 어떤 정치적 목적에 의해 엄연히 존재하는 어진을 무시한 채, 얌전하고 문약하게
보이는 얼굴로 그렸다는 것이다.
이유가 어떤 것이든, 이는 역사적으로 대단히 심각한 왜곡이다.
왜냐하면, 존엄한 왕의 얼굴은 터럭 하나 마음대로 그리거나 고칠 수 없기 때문이다.
한데 놀랍게도 멀쩡히 존재하는 어진을 무시하고, 자신의 마음대로 상상해 그려낸
그림이 표준 영정으로까지 인정받게 됐다.
또 교과서에까지 실려 수많은 사람들이 정조의 어진으로 착각하게끔 만들었다.
이는 보통 심각한 일이다.
<명종실록>을 보면, 현종의 어진을 추사(追寫)한 게 잘못 됐다고 도화서 화원들을
처벌하겠다고 논의하는 게 기록에 나올 정도로 어진에 관한 한, 매우 엄격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정조의 어진이 엉뚱하게 그려진 원인이 두 번째 이유라고 생각한다.
만약, 기록에 나와있는 정조의 어진이 현대의 시각에서 잘생겼다고 하는 얄삽한
미중년의 얼굴로 그려져 있었더라면, 새롭게 초상화를 그린 이는 분명 <선원보략>에
있는 모습대로 그렸을 게 자명하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정조를 한창 개혁 군주로 새롭게 부각시키고 있는 터에, 무(武)의
기운이 강해 보이는 정조의 용안이 이에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수가 있다.
여기엔 관련 공직자이나 역사학계의 동조나 묵인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정조의 어진에 대해 모두가 침묵하고 있는 것을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는 역사 왜곡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역사왜곡이다!
정조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얼마나 기막힌 일이겠는가?...
존엄한 왕의 얼굴은 터럭 하나 마음대로 그리거나 고칠 수 없는 터에, 멀쩡하게
존재하는 어진 모사본을 무시한 채 전혀 다르게 그려진 상상화가 정조의 표준 영정
으로까지 인정받게 됐다.
또 교과서에까지 실려 수많은 사람들이 정조의 어진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실로 충격적인 일이다.
<선원보략>에 나오는 정조의 어진 모사본은, 기록과 사료에 나타나는 정조의 모습과
거의 일치한다.
정조는 대부분의 다른 임금들과는 달리, 문무(文武)를 겸비한 군주로 평가된다.
블로그에서 여러번 언급했다시피 정조는 무(武)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신하들에게
문무를 겸비해야 진정한 사대부라고 수없이 잔소리를 하고, 이와 관련된 많은 일화를
남겼다.
특히 정조는 무예가 뛰어났다.
태조처럼 신궁(神弓)으로 불릴 정도로 백발백중의 활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또 골초에 애주가였다.
담배의 폐해 때문에 백성들이 담배를 못 피우게 하자는 신하들의 빗발친 상소가
잇따르자, 정조는 이에 맞서 <담배 예찬시>까지 지어 신하들에게 읽도록 교시를
내렸다.
그 정도로 강골이었다.
뿐만 아니다.
애주가인 정조는 세 번씩 걸러내 알콜 도수를 높게 만든 삼중소주를 즐겨 마셨다.
성격 또한 다혈질이었다.
욕설은 또 얼마나 잘했던지 현대에서도 기함할 정도로 찰진 욕을 구사했다.
이는 경매에 나왔던 <정조의 어찰첩>, 즉 정조가 당시 노론 영수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확인된다.
거기다 정조는 공작정치의 달인이었다.
<선원보략>에 그려진 정조의 어진 모사본은 <순조실록>에서 정조를 묘사한 '네모난
입과 격진 턱' 과도 거의 일치한다.
실록에는 아주 단편적이지만 정조의 모습들이 슬쩍슬쩍 드러나 있다.
이마와 뒤통수가 영조를 닮았다는 것, 반듯한 이마를 가졌다는 것, 턱이 겹턱이며,
콧날이 우뚝하고, 눈자위는 펑퍼짐하며, 입이 크고 깊숙하고 네모나다는 것...
그리고 또래보다 나이가 더 들어보이는 것 등이다.
이 조각들을 세밀하게 퍼즐 맞추기로 한다면, 우리는 정조의 용모를 어느 정도 짐작해
낼 수가 있다.
어진 모사본에서 보듯 이중 턱이니 살집이 좀 있었을 것이고, 틀림없이 남성성이 매우
강한 무인형(武人形)의 용모였을 것이다.
문약해 보이는 정조의 표준 영정과 달리, 진짜 정조의 모습은 귀한 혈통과 영특함을
상징하는 반듯한 이마, 총기 넘치는 눈, 사내다운 용안, 넉넉한 체격, 카리스마
넘치는 군왕의 풍모를 갖춘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심지어 정조의 이런 모습은 그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에도 실려 있다.
때문에 총기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평범한 얼굴에 피곤에 지친듯한 정조의 표준 영정은
정조의 진짜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한마디로 정조의 어진으로 둔갑된, 상상화에 세뇌돼 미중년으로 그려진 정조의 모습은
결코 진짜 정조의 모습이 아니다.
<선원보략>에 그려진 늠름하고 활달하며, 무사의 기상이 강하게 뿜어져 나오는
호인다운 용안이 진짜 정조의 모습이다.
앞서 언급했듯, 정조는 모두 3번 어진이 그려졌다.
조선시대에는 선조 때부터 10년에 한번씩 어진을 그려서 남겼다.
정조는 대리청정을 하던 왕세손 때 한 번 그렸으나, 비슷하지 않다며 버리게 했다.
그리고 즉위 후엔 2번 어진을 남겼다.
첫 번째인 1773년, 왕세손이던 시절 그려진 어진 당시의 감조관(監造官)은 김두열
이었다.
주관화사(主菅畵師)는 변상벽, 동참화사(同參畵師)는 김홍도, 수종화사(隨從畵師)은
신한평, 김후신, 김관신, 진응복이었다.
주관화사는 왕의 용안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인 얼굴 쪽을 맡은 화사(화가)를 말한다.
동참화사와 수종화사는 주관화사를 도와주는 역할을 맡았던 도화서 화원들이다.
두 번째인 1781년엔, 정조의 어진과 함께 영조 80세 어진의 모사가 이루어졌다.
이 때 주관화사는 한종유, 동참화사는 김홍도, 수종화사는 김후신, 김응환, 신한평,
장시흥, 허감 등이었다.
신한평은 신윤복의 아버지다.
'화사'는 조선시대 도화서에 속한 종팔품 동반(東班)의 잡직을 말한다.
세 번째인 1791년, 또다시 정조의 어진이 그려졌다.
이 때 주관화사는 이명기, 동참화사는 김홍도, 수종화사는 허감, 한종일, 신한평,
김득신, 이종현, 변광복이었다.
당대의 최고 화원(畵員)들이 총망라돼 있다.
조선시대엔 10년에 한번씩 어진을 그려야 하기 때문에, 정조의 경우 승하한 다음
해인 1801년이 세 번째 어진을 그려야 하는 시기였다.
만일 이 때 세 번째 어진이 그려졌다면.... 그리고 부산의 <어진 임시보관소>에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50대의 개혁군주 정조의 어진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은 분명 <선원보략>에 나오는 바로 그 용안(龍顔)이었을 것이다.
정신분열증인 심질을 앓아 어진 그리는 것을 질색했던 선조(宣祖) 와는 달리, 정조는
도화서 화원들이 어진 그리는 것을 즐겼다.
이는 의궤를 비롯해 모든 것을 기록과 그림으로 남기는 것을 원칙으로 한 정조의 평소의
소신이나 신념과 깊은 연관이 있다.
재미로 현대의 유명 인사들 중, 정조의 모습과 가장 닮은 얼굴을 찾아본다면 과연
어떤 얼굴일까?
족보에 실려 있는 어진 모사본(模寫本)이나, 기록에 나와 있는 여러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조선 제 22대 왕 정조와 가장 닮은 얼굴은 바로 이 얼굴이다.
<이해영 감독>
* 혹은 이런 얼굴일 수도...!
<임꺽정 배우, 정홍채>
* 역사를 논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항상 사료가 가장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
돈벌이를 위해 되지도 않은 음모론이나 개인적인 취향이나 해석을 통해 역사를
떠벌리는 건, 결코 올바른 역사관이 아니다.
이미 여러번 언급했지만, 역사(歷史)는 취향대로 또는 마음대로 재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정조의 잘못된 어진에서 보듯, 사료를 무시한 채 개인적인 취향으로 역사를 해석
하거나 또는 다른 목적을 위한 동조나 묵인을 통해 고의적으로 역사를 왜곡할 때,
훗날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게 된다.
... 진실은 때로, 이렇게 불편할 수도 있다.
이 포스팅에서 보듯...
역사의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여러 방면의 다양한 지식과 사료들을 모두 종합해서
섬세한 퍼즐 맞추기를 해야만 한다.
또 때로는 용기도 필요하다.
* 이 글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