和子由澠池懷舊
(민지에 있는 아우에게 답하며 옛일을 회상하다)
人生到處知何似, 應似飛鴻踏雪泥.
泥上偶然留指爪, 鴻飛那復計東西.
老僧已死成新塔, 壞壁無由見舊題.
往日崎嶇還記否, 路長人因蹇驢嘶.
~* 소식(蘇軾), 소동파 *~
인생이란 결국 무엇과 비슷한가?
눈 진창에 내린 기러기와 비슷하네.
진창 위에 우연히 발자국 남겼어도
기러기 날아간 뒤 어찌 동서 헤아리랴.
노승은 이미 죽어 새 탑으로 서 있고.
벽은 허물어져 옛 글귀 볼 길 없네.
고달팠던 지난 날 아직 기억하는가?
먼 길에 지친 사람, 절며 울던 당나귀를...
* 중국에서 '소동파'처럼 명문가 출신도 드물다.
문학인이라는 범주에서 따지자면 동파(東波) 소식(蘇軾)의 집안보다 더한 명문가를
찾기가 쉽지 않다.
아버지 소순(蘇洵)과 소식(蘇軾), 소철(蘇轍) 삼부자가 당(唐)과 송(宋) 두 왕조를
대표하는 여덟 명의 문장가, 즉 <당송 8대 문장가(唐宋八大文章家)>에 포함돼 있다.
대단한 집안이다.
이들은 북송 시대의 시인이자 문장가, 학자, 정치가로 이름이 높았다.
당시 사람들은 이 세 부자를 삼소(三蘇)라고 불렀다.
'소식'은 특히 형제애가 깊어 2살 터울인 동생 '소철'과 서간을 통해 자주 시문을
주고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형제 간에 주고 받은 시문(詩文) 중에 주옥 같은 작품들이 많이 남아있다.
문학적인 소질이 특출하고 명민했던 형제는 같은 해 진사(進士)에 합격했다.
소철은 당시 스무살이 되기 전이라, '소년 진사'가 된 셈이다.
형제 모두 당대에 유명한 수재였다.
어려운 공부를 함께 하며 같은 해 동시에 진사에 합격했던 터라 형제애가 더욱 돈독
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의 詩에서 왕일(往日)은... 과거에 응시하러 가던 때를 말한다.
또 기구(崎嶇)나 노장(路長)은... 쓰촨성(四川省)에서 삐엔징(汴京)까지 먼 길을 가서
과거시험에 응시했던 때를 회상하는 의미이다.
소식, 소철 형제는 당송8대가의 하나인 구양수(歐陽脩)의 문하에서 공부해 과거에
급제한 뒤, 일찌감치 세상에 문재를 알렸다.
소동파는 송시(宋詩)의 성격을 확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대시인이자 대문장가
였고, 중국 문학사상 처음으로 호방사(豪放詞)를 개척한 호방파의 대표적인 사인(詞人)
이기도 하다.
또 북송 사대가로 손꼽히는 유명한 서예가였고, 문호주죽파(文湖州竹派)의 주요 구성원
으로 중국 문인화풍을 확립한 뛰어난 화가였다.
한마디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소동파가 우리 문단에 끼친 영향 또한 지대하다.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소동파의 영향력을 이렇게 기록에 남겼다.
세상의 학자들이 처음에는 과거시험에 필요한 문체를 익히느라
풍월을 일삼을 겨를이 없다가, 과거에 급제하고 나서 시 짓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하면 소동파의 시 읽기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때문에 매년 과거 합격자의 방(榜)이 나붙고 나면, 사람들은
"금년에 또 서른 명의 소동파가 나왔다."고 말하곤 했다.
또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은...
신라 말에서 고려 초까지는 오로지 만당(晩唐)의 시만 익혔고,
고려 중엽에는 오로지 소동파의 시만 배웠다.
... 이렇게 기록했다.
어디 이뿐인가?
김부식(金富軾, 1075~1151)과 동생 김부철(金富轍)의 이름이 소식(蘇軾), 소철(蘇轍)
형제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정도로 고래로부터 우리나라 문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 바로 소동파이다.
소동파의 작품으로는 시문집으로는<동파칠집(東波七集)>이 있다.
또 수필집으로는 <답사민사론문첩(答謝民師論文帖>과 <제황기도문(祭黃幾道文)>,
<전적벽부(前赤壁賦)>, 황주한식시첩(黃州寒食詩帖), <제서림벽(題西林壁)>,
음호상초청후우(飮湖上初晴後雨)가 있다.
그림으로는 '고목괴석도(枯木怪石圖)'와, '죽석도(竹石圖)'가 있다.
소동파는 그림에서도 회화론(繪畵論)에 대해 철학성이 강했다.
그래서 "대나무를 그릴 때는 먼저 네 마음 속에 대나무가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대나무를 그릴려면 "개인마다 지닌 대나무를 먼저 들여다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동파는 한마디로 유교사상에 뿌리를 둔 현실참여주의자 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구제해야 한다는 지식인으로서의 사명감이 매우
투철했다
다정다감한 성품 때문에 가족이나 친구에 대한 인간적인 애정과 관심도 깊었다.
또 한편으로는 불교사상과 도교사상에서 비롯된 현실도피적 사고방식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물질세계의 허무성과 무가치성을 간파하고, 물질이 아닌 정신세계에서 노닐려는
초월적 인생관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자연을 매우 사랑했고, 나아가 스스로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의 일부가 되기를
열망했다.
세속적인 가치에 대해 초연하게 살았던 성품과 가치관 때문에, 온갖 정치적인 핍박과
환난 속에서도 항상 긍정적인 태도를 갖고 당당한 삶으로 일관했다.
특히 사상이나 철학과, 현실에서의 삶이 일치했다.
문학성으로도 뛰어났지만, 무엇보다 현자(賢者)였다.
소동파가 중국인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문학인으로 꼽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 이 글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