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쌤! 백석은 월북작가인데 왜 남한에서 그렇게 좋아하고, 또 시집이 그렇게
비싸게 팔리나요?
詩가 워낙 좋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시인들이 백석의 시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백석이 시인인지도 모르는 북한과는 대조적이다.
2005년, 계간지 <시인세계> 여름호에서 발표한 바에 따르면 백석의 유일한
시집인 <사슴>은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거나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시집' 1위에
올랐다.
그만큼 그의 모더니즘 시는 문학성을 인정받고 또 문학인들로부터 사랑을 받는다.
특히 토속적이고 향토적인 색깔이 진한 언어를 모더니즘에 녹여 문학성 높게 승화
시킨 점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지금 읽어도 전혀 촌스럽지 않고 오히려 요즘 시보다 더 세련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시에 있어서만큼은 천재성이 돋보이는 시인이다.
또하나...
백석은 월북작가가 아니다.
북한에서 살았고, 해방 이후 조만식의 통역을 맡는 등 한때 북한에서 활발한 활동을
해서 월북작가로 아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는 본래 북쪽 사람이다.
고향이 평북 정주(定州)이다.
자기의 가족과 친구들이 있고,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북쪽을 버리고 남하하지 않았다고
그를 월북작가와 동일시하는 것은 편협한 시각이다.
백석은 오산 중학교를 졸업했고, 당시 고당(古堂)조만식과의 관계는 교장과 학생
사이였다.
중학교 졸업 후, 조만식의 주선으로 조선일보사에서 선발한 장학생으로 뽑혀 일본의
아오야마 대학(靑山學院)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5년간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후 1934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했고, 그 다음해인
1935년에 <정주성(定州城)>이란 詩로 등단했다.
그 후, 다시 북쪽으로 가서 함흥에 있는 '영생고보'의 영어 교사로 재직하기도 했다.
해방 후 정치적 격동기엔 은사인 조만식의 비서실장이 되어 중요한 정치적 협상
테이블에서 주로 러시아어 통역을 맡았다.
백석은 전공인 영어를 비롯해 일본어와 러시아어, 중국어 등 최소한 5개국어을
유창하게 하던 재능있는 인물이었다.
2. 쌤! 만약 백석이 북한에 남아있지 않고, 남한으로 내려왔다면 '자야'와의
영원한 사랑이 이루어졌을까요?
내 개인적으로 확신컨대, 그럴 확률은 전혀 없다!
원래 못 이룬 사랑이 더 애절한 법이다.
그의 염사(艶事) 행적이 증명하고 있지만 그가 여인을 보는 눈은 매우 즉흥적이고,
원초적이며, 본능적이고, 신중함도 결여돼 있다.
또 여러사람을 동시에 사랑하는 신공도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순정(純情)과는 거리가 멀다.
애정관 자체가 미성숙하고 문제가 있다.
'자야'의 백석에 대한 지고지순함과는 상당히 다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란 시를 '자야'에게도 주었고,
또 '최정희'에게도 구애를 하면서 주었다.
마치 오직 그녀만을 위해서 쓴 詩처럼...
이런 성격적 특징은 한눈에 꽃히는 이성에게 바로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적극적인
구애를 하며, 즉흥적인 사랑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또 여자에게 싫증도 쉽게 느끼는 스타일이다.
연애 상대로서는 상당히 위험한 부류이다.
한국 문학사를 뒤져볼 때, 백석처럼 여러번 결혼한 사람도 없다.
물론 부모의 뜻 때문이었다고는 하지만 북쪽에서 여러번 혼인식을 했고, 또 자야와
헤어진 빌미가 된 충청도에서의 결혼식은 실제로 10일 간이나 신혼생활을 하고
자야에게 돌아왔다.
자야와 대판 싸운 뒤 사이가 멀어진 것은 바로 이 때부터이다.
그때 '자야'가 백석의 여성관이나 스타일을 비로소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만주로 도망가 함께 살자고 했을 때 '자야'는 단호히 거절했다.
기녀(妓女)라는 신분도 걸렸을 것이고, 백석의 사랑 또한 확신하지 못했던
듯싶다.
백석은 자야와 헤어진 후, 북한에서 두 번 더 결혼했다.
양다리 걸치는 남자는 항상 조심해야 한다.
그런 남자는 경멸해도 좋다!
3. 쌤! '자야'는 평생 백석 한사람만 사랑한 건가요?
'자야'와 백석의 동거 기간은 불과 일년 남짓이다.
짧다면 짧을 그 기간 동안 그렇게 사연이 많고, 그렇게 염사(艶事)가 많았다.
백석과 자야가 처음 만난 건 함흥에 있는 영생고보 영어교사일 때였다.
교사들의 회식자리에서 기녀로 동석한 '자야'를 보고 한눈에 꽂힌 백석은 상다리
밑에서 자야의 손을 덥석 잡고는, "당신은 오늘부터 내 마누라야!" 라고 했을 정도로
즉흥적인 사랑을 느끼는 달인이다.
두 사람은 경성으로 와서 일년 동안 동거생활을 했다.
'자야'인 길상화 '김영한' 보살은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결혼은 했었는지... 자식이 누구인지... 세간에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사람들은 자야의 슬하에 자식이 있는지조차 모른다.
'자야'는 한국동란으로 백석과 완전히 헤어진 후에도 '백석'을 잊지 못한 채
그리워했다.
무엇보다 그의 시에 대한 천재적인 재능을 높이 샀다.
오죽했으면 "천억이 백석의 詩 한줄만 못하다."는 명언을 남겼을까?...
그러나 백석이 남한에서 '자야'와 함께 더 오래 살았더라면 그의 애정관이나
염사의 행적들을 살펴볼 때, 그들의 사랑이 지금 전해지는 것처럼 그렇게 아름답거나
애잔하고, 또 아련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백석의 성향을 볼 때, 사랑이 오래 지속되지도 않았을뿐더러 서로에게 상처를 준 뒤
헤어졌을 게 여반장이다.
물론, 이유는 백석의 미성숙한 애정관 때문이다.
백석 같이 주위에 이성들이 많고 또 한눈에 꽂혀 사랑을 느끼는 경우, 이는 개인적인
취향 이외에도 운명적으로 타고 난 하나의 숙제라고 볼 수 있다.
아무나 그렇게 쉽게 사랑하고, 쉽게 헤어지지 못한다.
아무나 그렇게 첫 눈에 금방 반하고, 쉽게 사랑을 느끼지 않는다.
아무나 그렇게 즉흥적으로 사랑하거나 연애하고, 또 헤어지고 이혼하는 일을 계속
반복하지 못한다.
이런 부류가 따로 있다.
이들은 남이 함부로 하지 못하는 일을 아주 쉽게 한다.
때문에 이는 타고난 하나의 기질이라고 할 수 있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백석의 마지막 부인인 '이윤희'가 참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축산협동조합에 소속돼 있으면서도 일을 전혀 할 줄 몰라 조롱과 비웃음을 당했던
남편 대신,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신산하게 살았을까?
이는 80년 대에 찍은 그들의 가족사진이 증명한다.
백석보다 무려 14살이나 어린 부인의 얼굴이 훨씬 더 늙어보인다.
그럼에도 자식들을 5남매(3남 2녀)나 낳고 백석과 해로했다.
백석의 아들 중 한명은 북한에서 작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석은 1959년 평양에서 추방돼 삼수갑산(三水甲山)인 오지에서 40여 년간
양치기로 살았기 때문에, 아마도 더 이상의 염사는 없었던 듯싶다.
이들을 보면, 확실히 임자는 따로 있는 듯...!
백석의 여자에 있어서만큼은 그녀가 진정한 위너(Winner)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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