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선왕후, 효종비/보물 1629호>
(너의) 편지 보고, 아무 탈 없이 있으니 기뻐하며, (너를) 보는 듯 반가워한다.
사연도 보고 못내 웃었다.
그만큼 하여 두면 아무리 쓰려고 한들 임자 없는 일에 뉘라서 애써 할 사람이
있겠느냐.
옷감도 지금까지 못 얻었으니 그것이 완성되기 어려울까 싶다.
너무 조르지나 마라.
숙경(淑敬)이는 내일 나가게 되었다.
그것(=숙경)조차 마저 나가면 더욱 적막할까 싶으니 가지가지 마음을 진정치
못할까 싶다.
언제 너희나 들어올까, 눈이 감기도록 기다리고 있다.
녹의인전(명나라 소설)을 다시 보내려 하니 기쁘구나.
네가 한 역할을 하는구나.
숙휘(공주)는 작은 베개에 귀여아를 수놓느라고 부산을 떠는데, 너는 어떻게 하려느냐.
(당시 숙휘공주는 임신 중이었다. 이 편지 글에도 '~'가 나온다.)
* 이 편지는 효종비(孝宗妃)인 인선왕후가 둘째 딸 숙명공주(淑明公主)에게 보낸
편지이다.
효종과 인선왕후의 숙명공주에 대한 사랑이 극진했던 듯 공주에게 보낸 편지들이
많이 남아있다.
이 편지에 나오는 숙경공주(淑敬公主)는 효종의 막내딸이다.
숙경공주는 효종 10년(1659년)에 원몽린(元夢麟)에게 출가했다.
전문가들은 인선왕후가 숙명공주에게 보낸 이 편지를 보낸 시기를 효종 10년(1659년)
부터 효종 12년(1671년) 사이인 1659년 즈음으로 추정하고 있다.
편지 내용은 막내딸 숙경공주가 혼인한 후 입궐했다가 다시 출궁할 때의 서운한
심정과, 숙명공주에게 명나라 소설을 보내는 따뜻한 친정엄마의 심정을 오롯이
담고있다.
17세기 중반 인선왕후의 한글 편지는 70여 편이 남아있다.
문장이나 서체를 정성들여 쓴 것을 보면, 조선 중기에 한글은 이미 단순한 수단이
아닌 정신적인 교류문자로서의 입지를 확실히 하고 있음을 유추할 수가 있다.
인선왕후의 글씨는 전형적인 궁서체(宮書體)를 보여주고 있다.
<명성왕후의 한글 편지, 현종비/보물 제 1220호>
글씨보고 잘 있다하니 기쁘며 친히 보는듯 반가워 백번이나 잡아보며 반기노라.
어느 때도 이리 오래 못 본적이 없더니 한달이 넘으니 더욱 섭섭하고 그립구나.
너는 주인집 극진하신 덕을 입어 역신을 무사히 하니, 세상에 이렇게 기쁜 경사가
어디 있겠느냐.
네가 효도 딸이 되어 우리를 기쁘게 하니 어여쁘기 그지 없구나.
날이 추우니 부디 조심하고 음식도 어른 이르는 대로 잘 먹고 잘 있다가 들어오너라.
타락묵과 전을 보내니 먹도록 하여라.
(타락(駝酪)은 우유를 말하는데, 조선시대에 우유로 묵을 만든 타락묵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 편지를 통해 알 수 있다. 아마도 치즈 같은 형태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 이 편지는 조선 제 18대 임금인 현종(顯宗)의 왕비 명성왕후(明聖王后)가
셋째 딸인 명안공주(明安公主)에게 보낸 한글 편지이다.
출가한 딸에 대한 친정엄마의 절절한 사랑과 따뜻함이 편지에서 물씬
묻어난다.
명안공주는 현종과 명성왕후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현종은 명선(明善),명혜(明惠),명안공주 등 세 공주를 두었고, 아들로는 숙종을 두었다.
명안공주는 숙종과 남매지간이다.
그러나 명안공주의 언니인 두 공주는 일찍 졸(卒)했다.
때문에 명안공주는 현종과 명성왕후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애지중지 자랐다.
명안공주는 13세 때인 1679년, 판서 오두인(吳斗寅)의 아들 오태주(吳泰周)와
혼인했다.
이 때 현종이 집을 얼마나 크게 지어주었는지, 송시열 등의 고위 대신들이 일제히
상소를 올려 국고를 탕진한다고 벌떼같이 일어나 왕에게 항의할 정도였다.
그 정도로 명안공주는 현종과 명성왕후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
그러나 숙종 13년인 1687년, 아들 '오원(吳瑗)'을 출산한 뒤 23세의 나이로 훙서했다.
누이를 잃은 숙종의 애통함이 극에 달했었다고 전해진다.
<인현왕후, 숙종비>
밤사이 평안하시온지 여쭤보고자 바라오며, 어제 적어 보내신
글을 보고 친히 만나뵌 듯 든든하고 반가워서 아무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평안하지 못하신가 싶으니 민망하고 염려됨이 끝이 없어
하옵나이다.
약을 적은 목록을 즉시 가져오게 했으니 들어오거든 보내겠습니다.
* 이 편지는 숙종비인 인현왕후가 숙종의 고모인 숙휘공주가 와병 중일 때
보낸 편지이다.
숙휘공주의 와병을 염려하면서, 필요한 약 목록을 받는대로 바로 보내겠다는
내용이다.
숙휘공주의 병세가 심해지자 숙종은 직접 출궁해 병문안을 다녀오기도 했다.
<순원왕후의 한글 편지, 순조비>
<명성왕후가 오빠 민승호에게 보낸 편지/고종비>
* 이 편지는 고종비 명성왕후(明成王后)가 정적(政敵)이던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이
1873년 실각한 직후인 1874년, 오빠인 민승호(1830~1874)에게 보낸 한글
편지이다.
혼란스런 정국 때문에 심사가 괴로움을 하소연하는 내용의 이 편지는 잘 쓴 궁서체
(宮書體)로 명성왕후 특유의 날카롭고 꼼꼼한 성격을 엿볼 수 있다.
편지는 적색과 황색으로 된 청나라에서 만들어진 예쁜 색지(色紙)에 한글로 썼다.
꽃과 나비 그림이 그려진 이 아름다운 편지지엔 ‘위천연우’(渭川煙雨, 중국 시안에
흐르는 강인 위천의 안개와 비)와 ‘당호동원사어미몽헌(當湖東園寫於味夢軒)’
이라는 문장이 곁들여져 있다.
색지에 그려진 이 그림은 중국 저장성의 호수인 당호의 화가 ‘동원’이 미몽헌에서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편지지를 보면, 당시 스물 넷 한창 나이였던 명성황후의 감성적 취향이 엿보인다.
화사한 편지지와는 달리, 편지 내용은 어둡고 심각하다.
명성왕후는 오빠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혼란스런 정국으로 인한 고달픈 심신을
토로하고 있다.
10년 만에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그늘에서 겨우 벗어나기는 했지만, 당시의
어수선한 국내외 정치 상황이 왕비의 심사를 불편하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명성왕후는 편지에서...
(오빠의) 편지에서 밤 사이 탈이 없다 하니 다행이다.
주상과 동궁(훗날 순종)은 건강히 잘 지내고 계시니 좋지만,
나는 몸과 마음이 아프고, 괴롭고, 답답하다.
... 이렇게 하소연하고 있다.
글씨체를 보면 획의 돌림 등에서 날카롭고 꼼꼼한 성격이 엿보인다.
언제 쓰여진 편지인지 날짜는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짐작은 가능하다.
즉 1874년에 태어난 순종에 대해 언급했고, 오빠인 민승호는 1874년 11월 폭사
(爆死)했기 때문에, 이 편지는 그 해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고종비(高宗妃)인 명성왕후의 한글 편지는 여러 점 전해지고 있다.
<명성왕후(明成王后)가 양조카 민영소에게 보낸 편지, 고종비>
<순명효황후(順明孝皇后)의 한글 편지/순종비>
작년에 소식 들은 후 궁금하여 매양 얘기하고 있었는데, 설 쇠기를 태평히
하셨는가 싶으니 기뻐하옵니다.
여기서는 (옛날) 지내던 생각이 지난 때에 미치면, 이 몸이 없어지고자 하는
말씀을 한 붓으로 다하기 어렵사옵니다.
요사이는 상감께서 두루 평안하시고, 세자도 걸음걸이는 끝내 불편하시나
그 외는 모두 평안하시니 축하드리옵니다.
나는 신병(身病)이 성한 날 없사오며 (병세가) 내내 (잘 낫지 않고),
오래 끌어 대강만 적사옵니다.
정월(正月) 이십삼일
* 이 편지는 1904년 1월, 순종비(順宗妃)인 순명효황후가 황태자비 시절에 위관(韋觀)
김상덕(金商悳, 1852~1924)에게 보낸 편지이다.
때문에 이 편지에 나오는 상감은 고종을, 세자는 순종을 뜻한다.
김상덕은 세자(순종)의 스승이었다.
청나라 것으로 추정되는 꽃병 그림의 붉은 편지 봉투와 국화꽃이 인쇄된 화려한 시전지
(詩箋紙)에다가 쓴 편지에서 세자빈은 남편의 스승에게 안부를 전하고, 황실의
근황을 전하면서 자신의 신병을 토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병상에서도 아픈 속마음을 한글로 표현한 순명효황후의 이 한글 편지를 통해, 한글이
조선왕조의 궁실 문자로 최대한 심미적 위치에서 자리잡고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순명효황후는 병세 악화로 황후의 자리에 오르지도 못한 채, 그 해 33세의 나이로
훙서했다.
기록을 살펴보면, 순명효황후의 시집살이는 눈물없이는 볼 수 없을 정도로 혹독했다.
한마디로 가혹했다.
그만큼 시어머니인 민비가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며, 교묘하게 며느리를 괴롭혔다.
심지어 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에도 아침에 문안인사를 하러 가면, 방 안에 있으면서도
며느리의 인사를 일부러 받지 않아 세자빈이 그 추운 겨울에 문 밖에서 서서 어둠이
내려앉은 밤이 될 때까지 하루종일 서있게 만들곤 했다.
도저히 정상적인 성격이라고는 할 수 없을만큼 악질적으로 며느리를 벌을 세우며 괴롭힌
것이 기록에 여러번 보인다.
민비의 성품이 얼마나 날카롭고, 잔인하며, 가혹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거기다 남편인 세자(순종)는 자폐증 환자여서 말이 없고, 편지 내용처럼 걸음마저
불편하는 등 육신이 건강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 가녀린 세자빈은 대저 누가 보호하고, 또 어디에 마음을 붙일 수 있었겠는가?
거기다가 을미사변 때는 시모인 민비를 보호하려고 일본 낭인들에게 필사적으로 항거
하다가 심하게 다쳤다.
그 후유증으로 인해 이후, 순명효황후는 줄곧 투병생활을 했다.
인생이 한없이 서글프고 애잔한 세자빈이었다.
명성왕후와 순명효황후의 글씨체를 한번 비교해보라!
명성왕후의 글씨체는 강하고, 날카롭고, 꼼꼼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순명효황후의 글씨체는 유약해 보인다.
극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성품 또한 그만큼 극과 극이었다.
때문에 의도적으로 며느리를 괴롭힌 민비 때문에, 세자빈은 생전에 엄청난 고초를
겪었다.
순명효황후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것은 시모에게 혹독하게 시달린데다가,
을미사변 때 민비를 보호하려다가 일본 낭인들의 폭력에 의해 크게 다친 게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歷史)는 미화시킨다고 미화되는 게 아니다.
기록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돈벌이를 위해 뮤지컬이나 영화, 드라마에서 명성왕후를 미화시키는 건 엄연한
역사왜곡이다.
기록에 나타난 역사적 사실들과 전혀 다르다.
때문에 영화나 드라마는 그냥 영화나 드라마로만 봐야 한다.
역사와 결부시켜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면 결국 역사에 대한 무지가 드러나게 된다.
역사는 그냥 역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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