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효종 임금이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가 있을 때 장모에게 보낸 한글 편지
답상장(答上狀)
장정승(張政丞) 댁(宅) (手決)
새해에 기운이나 평안하신지 궁금합니다.
사신(使臣) 행차가 (심양으로) 들어올 때 (장모님이) 쓰신 편지 보고
(장모님을) 친히 뵙는 듯, 아무렇다 (드릴 말씀이) 없사옵니다.
청음(淸陰, 김상헌[1570~1652]의 호)은 저리 늙으신 분이 (심양에)
들어와 어렵게 지내시니 그런 (딱한) 일이 없사옵니다.
행차 바쁘고 하여 잠깐 적사옵니다.
<신사(辛巳, 인조 19년, 1641년) 정월(正月) 초팔일, 호(淏)>
이 편지는 1641년(인조 19) 효종이 23세의 왕자 시절,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가 있을 때
장모의 편지를 받고 답장으로 보낸 한글편지이다.
한자를 쓰는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으면서도 한글로 편지를 쓴 조선왕조의 왕족들이 있다.
특히 효종의 한글 편지에서 주격 조사 ‘가’가 사용된 점이 주목된다.
효종은 함께 잡혀 와 있던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로 유명한 김상헌
(金尙憲)의 고생에 대해 염려하고 있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와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다가 끌려 온 '김상헌'은 이 때
이미 72세의 나이였다.
편지 끝의 ‘호’는 효종의 이름이다.
사진을 보면, 후대에 와서 임금의 이름을 가리기 위해 휘지(諱紙)를 붙여 놓은 게 보인다.
국제적인 위기 상황에서도 나라의 위태로움과 신하를 걱정하는 왕의 마음이 한글에
오롯이 담겨 있다.
이는 조선왕조의 정신이 한글로 이어져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흥선대원군이 청나라 톈진에 인질로 잡혀갔을 때 부인에게 보낸 편지
마누라(=부인) 앞
그사이 망극한 일을 어찌 만리 밖에서 눈앞의 짧은 편지로 말하오리까.
마누라(=부인)께서는 하늘이 도우셔서 (조선으로) 돌아가셨거니와,
나야 어찌 살아서 돌아가기를 바라오리까.
(떨어져 지낸) 날이 오래되니 옥도가 엄정하시고, 태평하시고, 상감과
자전의 안부 모두 태평하시고, 동궁마마 내외 편안히 지내기를 두 손
모아 빌고 비옵니다.
나는 다시 살아 돌아가지는 못하고 만리 밖 고혼이 되니, 우리 집안 대를
잇는 일이야 양전(임금과 왕비)에서 어련히 보아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나) 다시 뵙지도 못하고 (살아갈) 세상이 오래 남아있지 않을 것
같으니 지필(종이와 붓)을 대하여 한심하옵니다.
내내 태평히 지내시기를 바라옵니다.
흥선대원군의 이 한글편지는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중국 톈진(天津)에서 유폐
생활 중 쓴 것이다.
왕족들이 부부간에도 한글로 편지를 보냈다는 것은, 한자는 이미 조선왕조의 글이
아니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하다.
단지 여성에게 배려하기 위한 차원 만이 아닌, 임금이나 왕족들마저 한글을
익숙하게 사용하는 국문자였다는 것을 한글 편지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가 있던 흥선 대원군 이하응이 부인에게 보낸 편지가
한글이었다는 사실은 부인을 배려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글이
우리나라 문자라는걸 은연중 국제사회에 드러내놓고 있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임오군란(1882년 6월) 이후 잠시 정권을 장악했던 흥선 대원군은 다음 달인 7월,
청나라로 끌려가 4년 동안 연금되었다.
이 편지는 인질로 끌려간 해인 10월에 보정부(保定府)에서 쓴 편지이다.
실권에서 밀려난 심정을 구구절절이 부인에게 한글로 표현하고 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부인에게 '마누라'라고 표현한 것은 '마누라'가 요즘과는 달리,
경칭(敬稱)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한데... 일설엔 이 편지가 부인이 아닌 며느리(명성왕후)에게 보낸 안부편지라는
주장도 있다.
이종덕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은 “부인이 아닌 며느리에게 보낸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뎐 마누라 젼’의 ‘뎐’은 대궐 전(殿)자이며, ‘마누라’는 지체 높은 사람의
부인을 높여 부를 때 사용되는 말이라는 것이다.
또 순조 임금의 딸인 덕온공주의 손녀 윤백영 여사의 글에도 ‘뎐 마누라’라는 표현이나오는데, 이는 중전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이를 볼 때나 편지 사연으로 보아도 이 한글 편지의 대상이 대원군의 부인이 될 수는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데, 이렇게 되면...
편지에 나오는 "마누라께서는 하늘이 도우셔서 (조선으로) 돌아가셨거니와,
나야 살아서 돌아가기를 바라오리까." 하는 부분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명성왕후가 언제 중국 톈진에 인질로 잡혀갔단 말인가?
이래서 역사(歷史)는 일방적인 주장을 할 수가 없다.
기록을 통한 <퍼즐 맞추기>라 앞뒤가 맞지 않으면 금방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대원군의 서화체는 유명하지만, 한글체의 조형미 또한 뛰어나다.
이 편지는 한글이 왕족들에게서 적당히 사용된 문자가 아닌, 실제로 많이 사용된
우리나라 고유의 문자였다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대원군은 특히 인질생활의 공포에 질려 죽음이 다가올 것 같은 상황을 세세히
묘사하고 있다.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 간고의 세월을 보내다가 그소회를 부인에게 쓴 대원군의
한글 편지는 조선왕족들의 피와 뼈의 의미를 지녔다고도 볼 수 있다.
한편 이 편지 내용을 통해, 대원군이 부인과 함께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부인은
먼저 풀려나 당시, 조선에 머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소설 이몽(異夢)에서 이미 다룬 바와 같이 조선 제 26대 왕인 고종의 생부는
흥선대원군이다.
하지만, 신정왕후의 양자로 입적해 왕이 됐다.
신정왕후는 순조의 아들이자, 조선 제 24대 왕 헌종의 아버지인 효명세자의 부인
이다.
조선 제 25대 왕인 철종(哲宗)은 순조 비(妃)인 순원왕후의 양자로 입적해 즉위했다.
때문에 헌종의 왕통은 끊겼다.
한데, 고종 또한 선대 왕인 철종의 혈통을 이은 게 아니라, 뜬금없이 신정왕후의
양자로 입적해 왕이 됐다.
이번엔 철종의 왕통이 끊긴 것이다.
조선왕조에서 왕통이 두번이나 끊긴 유례없는 일이 연달아 일어났다.
바로 후사가 없던 헌종과 철종... 이 두 임금이다.
이는 고부 사이인 순원왕후와 신정왕후의 권력욕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권력이란 그렇게 집요하고 끈질긴 것이다.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법과 전통으로 굳세게 이어온 왕통까지도 여인들이 그대로
끊어버린다.
권력 앞에서는 골육도... 정의도... 진실도... 왕통도... 서열도... 백성도... 심지어
삼강오륜도 없다.
안하무인이 된다.
... 인간의 탐욕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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