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도는 고종 代인 1884년에 제작된 서울 지도이다.
129년 만인 작년, 미국 위스콘신대학교 밀워키 도서관 부속 <미국지리사회학 도서관>에서
옛 모습 그대로 발견됐다.
이 지도의 이름은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이다.
'경조오부'는 서울의 중부와 동서남북부(東西南北部)를 뜻한다.
오부(五部)의 개념은 고구려 때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군대 행군이나 전투대형을 갖출 때 사용됐다.
위의 지도에는 총융청(摠戎廳) 같은 관아와 남산 방어용 성곽의 위치가 모두 표시돼 있다.
앞서 포스팅한 <오방색, 오간색>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지면, 군대에서의 오부(五部)나
오군영(五軍營), 오진(五陣) 등... 오(五) 자가 들어가는 단어는 고대 철학인 음양오행설
(陰陽五行說)과 연관이 있다.
조선시대의 오위도총부, 오군영, 오위장, 오군문, 오영문 등도 모두 오행(五行)에서 비롯
됐다.
군대에서 사용하는 깃발들도 오행의 방위 표시에 따라 각각 고유한 색깔로 만들었다.
앞서 포스팅에서 이미 언급했듯, 오색 무지개, 오방북춤, 오방색, 오간색, 오색경단, 오색
약수, 오방떡, 오색온천, 오색다식, 오성(五星), 오감(五感), 오장(五臟), 오덕(五德) 등도
모두 오행에서 유래된 말이다.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에는 서울 사대문(四大門)과 북악산, 남산을 중심으로 압구정,
영등포, 한강진, 용산, 노원, 안암동까지 현재의 지명들이 정확히 한글로 표기돼 있다.
정말 놀라운 일 아닌가?....
지명을 보면 감탄이 절로 터져나온다.
심지어 봉은사, 노량진, 영등포, 당산, 잠실은 물론, 외곽으로 빠져나가는 용인과 시흥길,
인천, 강화길, 가평길등 지금의 지명이 조선시대에 그대로 한글로 쓰여있다.
뿐만 아니다.
셔빙고(서빙고), 살고지벌(살곶이, 뚝섬), 박석이 고지(박석고개), 방학곳(방학동), 밤셤
(밤섬), 공덕이(공덕동), 이태원 등도 모두 1880년 대 <한글표기법>으로 기록돼 있다.
이는 지금 이 시대에 사용되고 있는 지명들이 거의 모두 조선시대 또는 그 이전에 쓰여졌던
지명 그대로라는 것을 의미한다.
정말 놀라운 일 아닌가?
그렇다면 이 지도는 대체 누가 그린 것일까?...
이 지도를 소장하고 있던 미국 위스콘신대 밀워키 도서관 부속 <미국지리사회학 도서관>
에서는 이 지도를 그린 사람을 구한말 미국 대리공사를 지낸 조지 클레이튼 포크(Foulk,
1856~1893) 美 해군 중위로 짐작하고 있다.
포크 중위는 갑신정변 직전인 1884년, 미국 대리공사로 조선에 입국했다.
조선은 1882년 5월 22일, 인천 화도진에서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후,
그 다음해인 1883년에 제물포항을 개항했다.
초대 미국 공사로 부임한 사람은 푸트(Lucius Haroaook Foote)이다.
그는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참전한 장교였다.
부임하는 미국 공사인 푸트를 태우고 온 전함 역시 강화도 전투에 동원됐던 모노카시
(Monocacy)호였다.
푸트가 특명 전권공사의 신분으로 제물포에 도착한 것은 1883년 5월 12일이다.
5월 19일에 조약에 대한 비준서가 교환됐고, 이로써 한미 두 나라 사이에는 정식으로
외교관계가 수립됐다.
바로 이 해, 조선 제 26대 왕인 고종(高宗)은 '민영익'을 단장으로 한 일행을 보빙사
(報聘使)로 미국에 파견했다.
<1883년. 전권대신 민영익(閔泳翊), 부대신 홍영식(洪英植), 종사관 서광범(徐光範),
수원(隨員) 유길준(兪吉濬), 고영철(高永喆), 변수(邊燧), 무관 현흥택(玄興澤),
최경석(崔景錫), 그리고 미국인 퍼시벌 로웰> (* 수원(隨員) : 수행원을 말함)
그리고 다음 해인 1884년, 포크(Foulk) 중위가 미국 대리공사로 조선에 입국한다.
그렇다면 푸트 공사가 1883년에 조선에 입국했는데, 다음해인 1884년에 미 해군 중위인
포크가 미국 대리공사로 부임한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의 기록을 살펴보면, 대리공사들은 주로 미국 공사가 휴가 중이거나 공석인 상태에서
잠시동안 대리공사로 와서 자리를 지켰던 것으로 확인된다.
초대 미국공사인 푸트 (Foote)의 재임기기간이 1883.5.20 ~ 1885.1.10일 까지인 것을 볼 때,
포크(Foulk) 중위는 푸트의 휴가 중, 임시 대리공사(Charge d`Affaires,ad int.)로 조선에
부임해 잠시동안 근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임시 대리공사가 왜 하필 포크 중위였을까?...
전하는 바에 의하면, 포크 중위는 한글 자모를 쉽게 쓰고 또 발음할 수 있었다고 한다.
즉 한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푸트 공사의 휴가 중, 대리공사로 발탁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서울 지도인 <경조오부도>를 포크 중위가 그렸다는 가설이 힘을 얻고 있는 것은
그가 조선을 여행하면서 그린 강화나 수원, 개성 등의 지도가 이 지도와 매우 흡사하기 때문
이다.
전문가들은 이 <경조오부도>가 포크 중위가 한양에 도착한 후, 서울 지리를 익히기 위해
<대동여지도>를 모방해 그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를 볼 때,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는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인 1884년, 그려진 지도이다.
한데, 당시의 지명이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지명과 거의 똑같다.
정말 놀라운 사실 아닌가?...
포크 중위는 이 밖에도 서울과 관련된 다양한 사료들을 남겼다.
사진이나 그림을보면 역사(歷史)가 보인다.
그리고...
역사는 기록을 토대로 한 퍼즐 맞추기이다!
<포크 중위가 직접 그린 수도권 일대 지도/ 미국 CIA 홈페이지>
<포크 중위의 해군사관학교 재학시절 모습/ CIA 홈페이지>
<맨 위 왼쪽 사진은, 30살 무렵의 고종 모습. 경복궁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맨 위 오른쪽 사진은, 서울 정동의 미국 공사관에서 임시 대리공사인 조지 포크
해군 중위가 통역관, 집사, 전령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아래 사진은 1885년에 촬영된 창덕궁 사진.
뒤쪽 발이 내려져 있는 건물이 정조 때 규장각이 들어있던 주합루(宙合樓)이다.
사진에 보이는 서양인과 여인은, 한국에 들어온 첫 개신교 선교사 알렌 박사
부부이다.
창덕궁 후원 부용지 주위를 걷고 있는 모습이다.
1884년 9월에 조선에 입국한 알렌 박사는 그 해 12월에 발생한 갑신정변 당시,
부상당한 '민영익'을 치료해 신임을 얻고 고종의 시의(侍醫)가 됐다.
왕실의 주치의인 셈이다.
1885년에는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廣惠院)을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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