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晴
(맑은 가을 날에)
秋雨初晴枕簟涼 가을비 맑게 개니 베개와 돗자리 서늘하고
小窓時復閱篇章 작은 창 가에 앉아 가끔씩 시를 다시 읽는다.
吟三千首有餘樂 삼천 수를 다 읽어도 남아도는 흥겨운 여운
想五百年無此狂 오백 년을 생각해봐도 이런 미친 이 없으리라.
漢水風煙迷蝶夢 한강에 자욱한 바람과 안개가 나의 꿈 흐리고
華山雲月沁詩腸 삼각산에 구름과 달은 시심을 씻어준다.
邇來嗔客關門坐 지금까지 손님을 꾸짖다 문 닫고 앉으니
不覺莓苔侵短墻 벌써 이끼가 자라나 낮은 담장에 올랐구나.
~* 김시습(金時習, 1435~1493 ) *~
* 김시습
생육신의 한 사람.
號는 매월당(梅月堂).
승려 시절의 법호(法號)는 설잠(雪岑)이다.
조선의 '역사철학자'로 불린다.
어려서부터 '조선의 천재', '五歲 신동', '오세(五歲)'로 불렸다.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을 내쫓고 왕위를 찬탈해 조선 제7대 왕(世祖)으로
즉위하던 날, 21살의 나이로 지조의 삶을 위해 속세를 버리고 출가했다.
출가한 곳은 설악산의 오세암(五歲庵)...
그 후, 경주 남산에서 7년간 칩거하며 우리나라의 최초 소설인 <금오신화>를 썼다.
일명 '산림처사'로도 불린다.
그의 재능을 아낀 성종이 여러 차례 상경을 명했으나, 끝까지 부름에 응하지 않고
절개를 지켰다.
1481년(성종 12년), 승복을 벗고 환속했다가 2년 후 다시 집을 떠나 방랑생활을
시작했다.
9년의 만행기간 동안,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과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 등을 정리했으며, 1468년에는 <산거백영(山居百詠)>을,
1476년에는 <산거백영후지>를 썼다.
충남 부여의 '무량사'에서 생을 마쳤다.
학문과 기개가 높고 절개가 곧은 것이 훗날 높은 평가를 받아서, 1782년(정조 6년)에
이조판서로 추증됐다.
김시습은 승려이면서도 유교이념을 바탕으로 한 유불선(儒佛仙)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만큼 사유(思惟)의 폭이 넓고 다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조선의 계급 체제와 지배이념, 그리고 불교의 기복화와 정치 권력화에 대해서는
줄곧 비판적인 견해를 유지했다.
매우 현실주의적 사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도연명을 좋아해 그의 詩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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