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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해전(鳴梁海戰) 당시, 일본 육군 소속 지휘관들...

아라홍련 2014. 8. 16. 22:45

 

                     

                                    <판옥선(板屋船), '각선도본' 중에서/규장각 소장>

 

 

        영화 명량(鳴梁)의 흥행으로 인터넷에 온갖 허무맹랑한 정보가 난무하고 있다.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 이것 저것 짜집기를 하다보니, 황당한 얘기들이 떠돌아다녀 한마디로

        가관이다.

        거기다 인터넷 사전까지 엉망이니, 보통사람들은 정보의 진실 여부를 제대로 알아내기가

        힘들 정도이다.  ​

        특히 관련 자료를 체계적으로 공부하지 않고 입맛에 맞는 책 몇 권을 달랑 읽거나, 심지어

        소설을​ 읽고는 무책임하게 블로그에 글을 올려 '역사적 사실' 운운하다 보니, 점점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됐다.  

        ... 바로 이런 것에서부터 역사 왜곡은 시작된다.  

        오늘 한 독자가 내게 이런 질문을 해왔다.

        작가 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보니 <고산공실록>의 주인공인 '도도 다까도라'가 일본의

        수군이라고 나와있네요.

                    

                   도도(藤堂高虎)·와키사카(脇坂安治)·가토(加藤嘉明) 등 수군 장수들이 7월 14일,

                   거제도 북쪽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15일 달밤을 이용해 일제히 수륙양면 기습작전을 개시하였다.

​        이게 어찌 된 일이죠?...

 

        누군지 참 똑똑하다!

        그리고 기특하다...

        그 작가에 그 독자인 것 같아 내심 흐뭇하다. ^*^

        김시연 작가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 정도는 돼야 하지 않을까?...

        공부를 안 한 사람은 이런 질문을 하지 못한다.

        제대로 아는 게 있어야, 제대로 된 질문도 할 수 있다.

        그나저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저렇게 나와 있으니, 어제 내가 포스팅한 글을 읽었던

        독자로서는 상당히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

        이참에 한마디 덧붙이자면...

        인터넷 사전에 나오는 내용을 함부로 믿어서는 안된다.

        또 어느 단편적인 사실만 확인하고, '역사적 진실'도 운운하지도 않아야 한다.

        왜곡된 정보들이 다수 있다.

        특히 우리 역사만이 아닌, 전쟁으로 인해 적국과 연관된 역사의 경우 그렇게 단순히 진실을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반드시 양쪽 자료들을 신중하게 다각도로 확인해야만 비로소 진실에 가깝게 다가설 수 있다.

                     ​

        진실은 이렇다!...                                    

        일본의 조선 정벌군은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서 '원균'의 함대를 전멸시킨 다음날인

        (당시 일본과 한국이 사용하던 달력에는 하루가 차이남) 1597년 7월 17일, 최고위 지휘관들이

        모여 작전회의를 열었다. 

        바로 이 날, 왜군(倭軍)은 군 조직의 개편을 단행됐다. 

        승리에 고무돼 자신감이 한껏 고취된 일본군은 조선을 공격할 정벌군을 체계적으로 새롭게        

        재편성한다. 

        즉 정벌군을 육군(陸軍)과 수군(水軍)으로 양대 편성했다.

        그리고 은 다시 우군(右軍)과 중군(中軍), 그리고 좌군(左軍)으로 나누었다. 

        육지로 진격한 우군(右軍)과 달리, 바닷길로 진격한 중군과 좌군의 조직 편성은 다음과 같다.

 

​                 *  일본 조선 정벌군 육군 우군 총사령관 :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

​              *  일본 조선 정벌군 육군 좌군 총사령관 : 우끼다 히데이에(秀家)

      ​           *  육군의 중군(中軍) 편성

                        행정책임관(御奉行)  :  가께나까 아도노가미

                        중군 대장     :  가토 사마스께(加藤 左 馬介)

                        중군 대장     :  하찌스가 아파노가미

                        중군 대장     :  나마고마 아라꾸노가미

                        중군 대장     :  모리 리끼노가미

                        중군 대장     :  시마즈 마다시찌로

                        중군 대장     :  아끼쯔끼 사부로

                        중군 대장     :  다까하시 구로

                        중군 대장     :  소료 사헤이에사

                  *  육군의 좌군(左軍) 편성

        

                        행정책임관(御奉行)모리 민부대부(毛利民部 大夫)           

​                        좌군 대장      :  우끼다 주노겡

​                        좌군 대장      :  고니시 세끼즈노가미

                        좌군 대장      :  도도 다까도라

                        좌군 대장      :  하네시바 효고노가미

        자! 그렇다면 당신은 여기에서 아는 이름이 누구인가?...

        그 유명한 중군(中軍) 대장 중 한 명인 가또 사마스께와, 앞서 포스팅 했던 <명량해전의 일본측

        기록, 고산공실록>의 주인공인 도도 다까도라(藤堂高虎)의 이름이 금방 눈에 들어올 것이다.

        또 묵기(默記)에 나오는 좌군 행정관인 감독관 ​모리민부 대부(毛利民部 大夫)도 눈에 익을

        것이다. ​

        '가또 사마스께'와 '도도 다까도라' 이 두 장수는 <명량해전> 당시, 분명 일본 육군 소속이었다.

        한데, 저 유명한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운영하는 인터넷 사전에서는 이들을 육군이 아닌 수군

        (水軍)으로 기록하고 있다.  ​

        대체 어찌 된 일일까?...​

        내가 귀찮아도 이런 포스팅을 하는 건, 바로 이 질문을 한 똑똑한 독자 때문이다. 

                             

        '가토 사마스께'와 '도도 다까도라' 이 두사람은 정유재란 때 조선 정벌군으로 조선을 침략한

        직후부터 1597년 7월 17일 작전회의 때 새롭게 편성된 군 조직의 직전까지, 줄곧 수군(水軍)

        으로 참전했다.

        중요한 기록에 모두 그렇게 나와 있다. 

        때문에 이 두사람이 명량해전(鳴梁海戰) 때도 수군으로 참전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명량해전에 참전했을 때는 둘 다 수군이 아닌, 육군(陸軍) 소속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칠천량 해전' 이후 군 조직이 개편돼, 두 사람 모두 육군으로 편입됐기

        때문이다. 

        '가토 사마스께'는 ​육군 중군(中軍)의 대장 중 한 명으로, '도도 다까도라'는 육군 좌군(左軍)의

        대장 중 한 명으로 부하들을 이끌고 남원성(南原城) 전투와 명량해전(鳴梁海戰)에 참전했다. 

 

        ... 이런 사실을 모르고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도도 다까도라'나 '가또 사마스께, 감독관인 모리

        민부 대부가 명량해전 때 수군(水軍)이었다고 착각하고 있다.

        이는 명백한 오류이다.

        이러다 보니 앞뒤가 맞지 않아 기록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는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다.  

        바다에서 싸웠다고 다 수군이 아니다!

        명량해전 당시, 조선 정벌군인 일본 육군의 중군(中軍)과 좌군(左軍)은 수군과 함께 바다에서

        싸웠다.​ ​ 

        이는 수군보다 육군의 전투력이 훨씬 더 막강했기 때문이다. 

        수군에는 아예 좌군, 중군, 우군... 하는 편제(編制) 자체가 없다.

        오직 조선 정벌군 육군(陸軍)에만 해당되던 편제이다. 

        한데,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명량해전에 참전한 일본군이 모두 수군인 줄 알고 자료를

        해석하다 보니 오류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새롭게 조직 편성을 끝낸 일본군은 각 부대별로 전투준비를 마친 후 1597년 8월 1일, 일제히

        출격했다.

        우선 동쪽을 담당하는 우군(右軍)은 독자적으로 육지로 행군했다.

        또 육군의 중군(中軍)과 좌군(左軍)은 배를 타고 수군과 함께 바닷길로 진격했다.        

        이들은 사천에 집결했다가 8월 5일, 하동에 도착했다.

        그리고 섬진강을 따라 구례를 거쳐 11일 경엔, 남원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전투준비를 끝마친 왜군은 일제히 남원성(南原城)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남원성 공격의 선봉장(先鋒將)이 바로 육군 좌군 대장인 도도 다까도라(藤堂高虎)'이다.

        이들의 거침없는 연합 공격으로 남원성은 8월 15일, 결국 함락됐다.        

        ... 그리고 한 달 후엔, 명량해전(鳴梁海戰)에까지 이르게 된다.   

        거듭 얘기하지만,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허접한 엉터리 자료나 인터넷 사전만 읽어보고 함부로

        '역사적 사실' 운운해서는 안된다.

        단편적인 자료만 보고 진실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반드시 많은 자료들을 확인한 후  다각도로

        정보를 수집해 역사를 관통해 바라볼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진실에 가깝게 다가설 수 있다.​

​        역사공부는 일종의 '퍼즐 맞추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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