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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해전(鳴梁海戰)의 일본측 기록, 고산공실록(高山公実録)

아라홍련 2014. 8. 16. 00:17

 

           명량해전(鳴梁海戰)에 대한 일본측 기록을 한 번 살펴보자!

           난중일기(亂中日記)와 비교해보면, 전투상황 내용이 얼추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공개할 ​문서는 명량해전 당시 일본 기록인 고산공실록(高山公実録)의 묵기(默記)

           부분이다.

           <고산공실록>은 '명량해전' 당시, 일본 육군의 좌군(左軍) 소속 대장 중 한 명인 '도도

         다까도라(藤堂高虎)' 가문의 문서를 모아 만든 전기(傳記)이다.

          

                                                                

     ​ 默記(묵기) 

 

        (* 묵기(默記)는 일본 육군 좌군 대장 중 한 명이었던 도도 다까도라(이쯔미 사마)의 부하 중

             한 명이 '명량해전'의 전투상황 결과를 상부에 올린 보고서이다.

​             이 문서는 본래 일본 육군의 좌군 행정관모리민부 대부(毛利民部 大夫)가 작성해야 하는

             임무이다.  행정 책임관을 어봉행(御奉行)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허나 아래 보고서에서 보듯, 그는 명량해전에서 물에 빠져 부상당했을 뿐만 아니라 화살을

             무려 7발이나 맞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보고할 사람은 서열상도 그렇고 이 상황의 목격자인 육군 좌군 대장 중

             한 명인 '도도 다까도라(藤堂高虎)'가 된다.

             한데, '도도 다까도라' 역시 <명량해전>에서 팔에 화살을 2발이나 맞았다.

             때문에 묵기(默記)의 내용은 '도도 다까도라'의 가신(家臣)이나 부하 중 한 명이 대필해서,

             명량해전 결과 보고서를 만들어 상부에 올린 문서로 알려져 있다.

             <묵기> 내용이 모리민부 대부 행정관과 좌군 대장 중 한 명인 '도도 다까도라'의 이름과 상황

             을 일일이 열거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특히 보고서에서 '도도 다까도라'를 '이쯔미 사마'로 호칭한 것만 봐도 이는 증명이 된다.

             정벌군 총사령관을 거쳐 일본에서의 최상위 정보 수집자는 당연히 조선에 정벌군을 파병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이다.)

              

​        御歸陣被成候

         ​ちとまへかとにこもかいへこしなされ

          処にすいえんと申所にはんしやう十三そうい申候

          大川のせよりはやきしはのさし引御候 所にちとしほのやらき申候 

          所十三そうのふねい申候

          それを見付是ともとりよし舟手御相にてはいまのせとをこきくたし

          儀はなるましきとていつれもせきふねをかゝり被成

          さきのふねともハ敵船にあひ手負あまたいてき申候

          中にも來島出雲守殿うちしににて御座候

          其外ふねめしつれられ

          ​からうのものもくわはん手負討死仕候

          処毛利民部大夫殿せきにてはんふねへかゝり成候

          ​はん十文字のかまをかけ候処

​          はんより弓鉄砲はけしくうち申候

​          をはなれはいりなされあやうく

          処藤堂孫八郎藤堂勘解由両人船をよせ敵船をおいのけたすけ申候

          しふんよりまて御合戰にて御座候

          ​みなとのやうすはん船能存候付風能見すまし せとをめけほをひきかけ

          はし

          らせについて是非なくおつかけ申儀もまかいならす

          いつみおはせられ

                

​          <묵기(默記)> 번역.

        "(당신께서 일본 진으로) 돌아가시기 조금 전에 제포(こもかい, 齊浦鎭, 경상 우수영이
 있던 곳)

         에 가셨습니다.
         그곳에 수영(すいえん, 慶尙 右水營)이라는 곳에 적의 대장선 13척(にはん舟の大しやう分

         十三そう)이 있었습니다.
         큰 강의 여울목에서 바닷물의 간만이 빠른 해역인데, 바닷물의 흐름이 약간 약해진 구역에

         13척의 적선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꼭 쳐부숴야겠다고 수군(丹手)들과 상의하여 싸우게 된 것입니다.
         큰 배로는 지금의 좁은 해역을 저어나갈 수 없으므로, 모두 세끼부네를 마련한 후에 싸움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먼저 싸움을 시작한 수군들(さき手のふねとも)은 적선을 만나, 많은 사람들이 부상했습니다.
         그중에 '구루지마 미찌하사(來島出雲)'님은 전사하셨습니다.
         그밖에 수군들(ふね手の衆)이 잡혀갔습니다.
         부하들도 과반수는 잡혀가거나 전사하든가 했습니다. 
         모리민부 대부(毛利民部 大夫, 좌군의 행정담당관) 님이 세끼부네를 타고 적선을 공격했습니다.

         적선으로 뛰어들어가기 위해 十字 모양의 낫을 걸었습니다만, 적선으로부터 활과 총탄이

         매우 격렬하게 퍼부었으므로 배를 떠나 바다로 들어가서(船をはなれ海 ~ 御はいりなされ)

         위험하게 되었는데, (그때) '도도 송하찌로(藤堂孫八郎)''도도 강까이유(藤堂勘解由)

         두사람이 배로 다가와 적선들을 밀어제친 후, 구해드렸습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싸웠습니다.
         항구의 모습이나 적선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으므로, 바람의 방향을 잘 판단하여 그 좁은 해역

         을 벗어나 돛을 끌어당겨 달렸습니다.
         그 때문에 적도 어쩔 수 없이 더는 추격할 수 없었습니다.
         이쯔미 (いつみ, 和泉樣, 도도 다까도라를 말함, 좌군 소속 대장)께서도 팔 두 곳(手を二か所)

         을 부상당했습니다."

                    ​

​         ... 당신은 이런 기록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는가?

         이런 자료를 보면 '역사를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가?'를 절감하게 될 것이다.

         역사는 팩트이다!

         믿고 싶은대로 제멋대로 믿는 게 아니다.

         공부하고... 의문을 갖고... 자료를 찾고... 확인하고... 검증하고... 또다시 확인해 <퍼즐 맞추기>

         처럼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다.

         이런 게 바로 부끄럽지 않게 역사(歷史)를 공부하는 올바르고 바람직한 태도이다.

         작가도 이렇게 공부하거늘...!!!

 

           ​

​                                                        藤堂高虎(1556 - 1630)

 

 

     * 藤堂高虎(도도 다카도라)

         일명 이쯔미 사마(和泉樣)로도 불리는 도도 다카도라는 정유재란시 수군을 이끌고 참전해

         '원균'을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시키고 남원성 전투를 지휘해 함락시켰다.

         그후 조선 정벌군의 조직 개편으로 육군으로 편입돼, 육군 좌군 대장 중 한 명으로 명량해전 ​

         (鳴梁海戰)에 참전해 전투를 지휘하다 부상당했다

         '강항'을 납치해 데려갔으며, 훗날 세키가하라(関ヶ原)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가문을 배신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도와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도쿠가와 가문의

         중신(重臣)이 됐던 인물이다.

               ​

​                             <시코쿠 今治城도도 다까도라(藤堂高虎)의 동상>

 

 

                                   

​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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