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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방문자들이 꾸준히 좋아하는 글 5, 나의 스승

아라홍련 2014. 7. 15. 20:35

 

 

 

 

      내 인생엔... 두 명의 스승이 있다.

      한 분은 글 스승이고, 또 한 분은 인생의 스승이다.

      평생 책을 읽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또 글을 써 온 작가로서 그동안 배우고 연마한 분야가 

      얼마나 많고 다양하겠는가?...

      특히 나의 작업 방식은 철저한 취재와 고증, 기록을 매우 중시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거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엄청난 공부를 필요로 하고, 또 글에 많은 정성이 들어간다.

      그만큼 그동안 내가 학식을 배운 사람들이 광범위하고 많다.

      하지만, 내가 스승이라고 칭할 수 있는 분은 평생 단 두 사람뿐이다.

      내가 '스승'이라고 생각하는 개념은, 단순히 그로부터 뭔가를 배워서가 아니다.

      인생의 등불이 되고... 삶의 표본이 되며... 무엇보다 내가 존경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야만 한다.

 

      만일, 존경심을 갖지 않았다면 그냥 학식을 배운 선생에 불과하다.

      존경을 하려면 무엇보다 내가 중시하는 부분에 있어서, 그가 나보다 훌륭한 점이 더 많아야만

      한다. 

      평생 군자의 도(道)를 실천해 나가려고 애쓰고, 세속에 물들지 않아야 하며, 삶에 대한 통찰력이

      뛰어나고, 무엇보다 그의 전문성을 내가 인정해야만 한다.

      또 오욕칠정(五慾七情)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하고, 의식이 ego에 머물러 있지 않고 super ego

      머물러 있어야 한다.

      이는 그들이 살아온 흔적을 보고, 삶의 궤적을 살펴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 한데, 나는 행복하게도 존경하는 두 분의 스승을 가지고 있다. 

      때로 나는 이 두 명의 스승이 없었다면 지금의 김시연 작가가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곤 한다.

 

      내 글의 스승은 한말의 대학자인 명미당(明美堂) 이건창(李建昌) 선생이시다.

      내가 스승을 선택한 게 아니라, 가르침이 절실할 때 그가 운명처럼 다가왔다.

      잠깐!

      여기서 가만히 한번 생각해보자.

      철종... 봉이... 금이... 이시원...

      이들이 누구인가?

      바로 내 역사소설 이몽(異夢)에 나오는 실존인물들이다.

      내 글 스승인 명미당 이건창 선생은 사기(沙磯) 이시원(李是遠) 선생의 손자가 되신다.

      이들 모두 강화도와 연관이 있다.

      하지만, 나는 강화도에 아무런 연고가 없다.

      그럼에도 내가 방송일을 떠나 문학으로 발걸음을 옮겼을 때, 철종에 대한 취재와 공부를

      이윽고 마치고 마침내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 '글은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 대막막한

      의문과 갈망에 명쾌한 해답을 제시한 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명미당의 가르침이었다.

      그의 가르침 하나하나가 세상 누구에게서도 배울 수 없는 날카롭고, 절실하며, 명쾌한 가르침

      으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그의 책을 통해 그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는 청형(靑熒)한 가르침을 받았다.

      내가 다른 작가들과 달리 글쓰는 방법이나, 글을 다루는 분야, 문장에 있어서 확연한 개성과

      차이가 있는 것는 바로 스승인 명미당의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

 

          현란함이 아닌 울림이 있는 문장을 짓는 이는, 세상일에 어둡고 조롱받는 자여야만 한다.  

          보통사람들이 추구하는 감각적인 것들... 이를테면 음식을 맛보는 것에서도 즐거움을 느낄

          겨를이 없다.

          오로지 외롭게 궁벽한 방에 들어앉아, 고매한 기운 가운데 문장을 고치고 또 고쳐야만

          원하는 글을 얻을 수가다.   

                                                                 <명미당 이건창>

 

      이렇게 무섭고 엄격한 글 스승이 세상 어디에 또 존재하겠는가?...         

      내가 작업하는 방식인 구도자(求道者) 스타일은 온전히 스승 명미당(明美堂)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나는 작업에 몰두하면 시간관념이 사라지고, 세월의 흐름을 잘 인지하지 못한다.

      귀찮아서 공과금 자동이체를 안 했다가, 6개월 간 관리비가 밀려 아파트 게시판에 이름이

      올라간 적이 있을 정도이다.

      그때 나는 겨우 한 달이 지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나는 '글의 리듬'매우 중시한다.

      이 또한 스승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심지어 나는 블로그에 올리는 글도 최소한 20회 이상의 퇴고(推敲)를 거듭한다.

      이는 새벽에 블로그를 방문하는 외국에 있는 독자들이 가장 잘 알 것이다.

      글을 올린 뒤 계속 수정작업을 해서 다음 날 보면 글이 조금씩 다르고, 나중에 보면 한층

      매끄럽게 다음어지고 문장이 유려해진다.

                             

           무릇 글을 읽을 때는 반드시 천천히 심구(尋究)하고, 익숙히 사념해야 한다.

           그러면서 씹어보고... 깨물어보고... 삶아 익히기도 하고... 단련하기도 하고...

           당기기도 하고... 떨어뜨리기도 하고... 흔들기도 하고... 끌기도 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 글을 억양(抑揚)하고, 곡절(曲折)하며, 선회(旋會)하고, 반복해 봄에

           소리가 울려 '아름다운 리듬'이 있어야 한다.

           아름다운 리듬이 없는 글은, 서사와 성독이 조화를 이루지 못한 것이다.

                                                                               <명미당 이건창>

 

     스승의 가르침이 온전히 그대로 마음에 와 닿는다.

     내가 '글의 리듬''울림이 있는 문장'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이다. 

     그래서 나는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것을 매우 부담스러워한다.

     스크랩이나 맛집, 여행지를 소개하는 게 아니라, 혼신을 다해 쓰는 글인지라 시간이 워낙 많이

     소요되고 심신이 지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또 한 명의 스승이 있다.

     바로 나의 사부이다.

     전에도 언급했듯, 나의 사부는 스승과 아버지를 뜻하는 사부(師父) 개념이 아니라 '나를

     가르쳐 이끌어 준 사람'이라는 뜻의 사부(師傅)의 개념이다

     사람들은 나의 스승이라고 하니까 호호 백발 할아버지인 줄 아는데, 사부는 나보다 나이가 젊다.

     그래서 사부(師父)보다는,사부(師傅)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작가가 나이가 적지 않은데, 작가의 스승이 나이가 더 젊다고 하면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들이 

     많다.

     사부는 나의 오랜 주치의이자 젊은시절부터 한학(漢學)과 고전(古典)을 많이 공부하고, 오랫동안

     경서를 연구한 전문가이다.

     특히 인간의 신체와 심리에 대해 오랫동안 공부하고 많은 임상경험을 가진데다가, 한학에까지 

     일가견이 있어 보통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이다.

     이 혼탁한 세상에서 그런 인격자(人格者)를 만나기란 매우 드문 일이다.

     그래서 나는 사부를 만난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하며,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

 

     한데, 내 스승의 스승이 또 대단한 유학자(儒學者)이다.

     '대단한'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내 사부 같은 제자를 길러냈고, 그로부터 절대적인 존경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사부의 사부를 우연히 두 번 뵌 적이 있는데, 보기만 해도 평생 한학자로서 세속에 물들지 

     않고 고매하게 살아온 흔적이 역력했다.

     돈, 권력, 명성, 부귀영달, 애욕과 정염을 추구하고 집착하는 이 오탁악세에서 그렇게 청정하게

     살아온 흔적이 뚜렷한 분을 보는 일은 '희귀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사부와 그의 스승... 이 두사람은 마치 부자지간 같았다.

     사람들은 결국 같은 종류의 사람끼리 모이고... 가르치고... 또 배우는 것이다.

     ... 그것은 어쩌면, 운명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나의 무지막지하게 공부하고 일하는 작업방식은, 사부에게도 걱정거리이다.

     나는 밤을 새우고 일할 때나 공부할 때, 사부에게 미안지심이 들곤 한다.

     물론 사부는 인터넷도 안 하고, 휴대폰도 사용 안 하며, 자동차 운전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혹여 그가 어쩌다가 내 블로그를 들어와 포스팅 시간을 보았다가, 늘 밤샘작업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까 봐 항상 저어하며 전전긍긍하는 마음이 있다. 

     심려를 끼치는 게 여간 미안하고 조심스러운 게 아니다.

     독자와 블로그 방문자들의 무언의 압력(?)에 개의치 않고, 포스팅하는 걸 줄이고 밤을 새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게, 지금 내게 가장 시급한 당면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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