卜算子
(복산자)
我住長江頭 나는 장강 상류에 살고
君住長江尾 그대 장강 하류에 사네
日日思君不見君 매일 그대 생각해도 그대 보지 못하고
共飲長江水 함께 장강물만 마시네
水幾時休 이 강물 언제 멈출까
此恨何時已 이 한은 언제 끝나나
只願君心似我心 다만 그대 마음 내 마음과 비슷하기를 바랄 뿐
定不負 부디 등 돌리지 마세
相思意 서로 생각하는 마음
~* 이지의(李之儀, 1038~1117) *~
* 내 블로그를 오랫동안 방문한 독자들은 사패(詞牌)에 대해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
평생 살아가며 사패의 존재와, 또 詩와 사패의 차이를 아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제대로 번역된 아름다운 사패를 많이 감상할 수 있는 건 일종의 행운이다.
그런 면에서 김시연 작가의 블로그를 열심히 방문하는 독자들은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당신은 사패... 하면 누가 제일 먼저 생각나는가?
당연히 송대(宋代)의 여류사인(女流詞人) 수옥 이청조(李淸照)가 생각날 것이다.
또 이백과 소동파, 백거이 등 유명한 시인들도 사패를 썼음을 이미 알고 있다.
중국에서는 詩보다 오히려 사패(詞牌)의 문학성을 더 우위에 두는 경향이 있다.
내가 인정하는 강호(江湖)의 고수(高手)가 오랫만에 아름다운 사패를 블로그에 올렸다.
번역이 퍽 마음에 든다...
역자(譯者)가 한문만 알고 문학성이 없을 경우, 이렇게 음율을 맞춰 아름답고 깔끔하게
번역하지 못한다.
의역(意譯) 한답시고, 훌륭한 詩나 사패를 마치 삼류 유행가 가사처럼 허접하게 번역해
놓은걸 보면 한마디로 기함할 지경이다.
분노가 치민다.
하지만 내가 인정하는 강호의 고수는 원뜻과 가까운 직역(直譯)을 원칙으로 한다.
나는 고수의 번역이 원시(原詩)의 감성이나 문학성과 가장 근접하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많은 사패를 읽었지만, 이 사패는 유독 마음을 끈다.
사패에서 전해지는 그리움이 순수하고 애절하다...
또 순정함이 아름답게 마음을 움직여 감동을 준다...
詩 하나, 사패 하나가 이렇게 인간의 영혼과 마음을 움직이고 정화시킬 수 있는 건
문학과 예술만이 갖는 고유하고 신성한 특징이다.
사패는 형식부터가 일반적인 한시보다 훨씬 다양하고 세련됐다.
그동안 여러번 언급했지만 보통 사(詞)로 불리우는 사패(詞牌)는 악곡, 즉 곡조에다가
가사를 붙인 것이다.
악부(樂府)에 가사로 쓰이던 게 민간에서 유행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곡자사(曲子詞)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훗날 이를 다시 사(詞)라고 줄여서 불렀다.
송나라 때부터 대유행하기 시작해 중국 문학의 한 장르로 당당히 자리잡았다.
그러나 사패 초기의 작품은 중당(中唐)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땐 사패를 詩의 하나로 보았다.
그렇다면 사패를 詩가 아닌 하나의 문학적 쟝르로 인식하게 된 건 언제부터일까?...
바로 당말(唐末)부터 오대(五代) 이후이다.
'오대'란... 당나라 멸망 후, 약 50년간 중국의 화북 지방에 일어났던 다섯 왕조를 말한다.
즉 당나라와 송나라와의 과도기에 중원(中原)에 흥망했던 후량(907~923), 후당(923~936),
후진(936~946), 후한(947~950), 후주(951~960)... 이렇게 다섯 왕조를 이른다.
사(詞)의 작풍은 보통 완약, 호방, 전아, 영물 등 여러 파로 나뉘는데, 詩에서 표현하기
부족한 섬세한 미감(美感)이나 솔직한 감정을 독백 형식으로 읊는 게 특징이다.
때문에 한시보다 사패가 감정이입이 더 잘되고, 무엇보다 감성을 뒤흔드는 매력이 있다.
나는 詩보다 사패(詞牌)를 훨씬 더 좋아한다.
사패는 악부시(樂府詩)에 들어간다.
그렇다면 악부시란 무엇인가?...
일종의 곡조(曲調)에 달린 가사를 말한다.
사패(詞牌)와 같은 개념이다.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주(周)나라 때의 시경(詩經)도 악부에 들어가고, 후대의 사패나
곡(曲)도 모두 악부시에 포함된다.
악부(樂府)는 한문의 의미에서 보듯, 서한(西漢) 무제(武帝)가 세웠던 음악 전문 관서
(官署)로, 최초의 공식적인 음악 담당 관청을 말한다.
그렇다면, 당시 악부(樂府)에서는 무슨 일을 했을까?...
악부에서 하는 일은 민간에서 전래되는 시가(詩歌)를 수집하여 여기에다 곡을 붙이고,
또 악보를 제작하여 악공(樂工)들을 훈련시키는 일을 담당했다.
악부(樂府)에서 한 일은 대략 다음과 같은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제사 및 궁정 향연에 쓰일 음악을 만들었다.
둘째, 군가(軍歌)를 만들었다.
셋째, 민간에서 수집된 곡조에 가사 붙이는 일을 했다.
사패 제목인 복산자(卜算子)는 송사(宋詞), 즉 송나라 사패의 한 형식이다.
때문에 같은 제목에 여러 사패가 존재한다.
이는 다른 사패들도 마찬가지이다.
당나라의 낙빈왕(駱賓王)은 詩를 쓸 때 숫자를 쓰는 것을 좋아해 사람들이 그를 복산자
(卜算子) 라고 불렀다.
이후에 사인(詞人) 들이 사패의 이름에 <복산자>를 사용하기 시작해, 하나의 형식으로
자리잡게 됐다.
복산자는 쌍조사십사자(雙調四十四字)이며, 측운(仄韻)이다.
사(詞)와 노래인 곡(曲)으로 당나라와 송나라 때 유행했다.
위의 사패를 쓴 이지의(李之儀)는 이청조와 마찬가지로 북송(北宋)의 사인(詞人)이다.
자(字)는 단숙(端淑)이고, 호(號)는 고계거사(姑溪居士)이다.
창주 무체, 現 산동성 무체현(無棣縣) 사람이다.
소동파, 황정견, 진관 등 당대의 쟁쟁한 문인들과 교유를 했던 인물이다.
'이지의'는 "사(詞)를 쓸 때 안수(晏殊)와 구양수(歐陽脩)를 배우라."고 권유했다.
특히 그는 어진이의부진(語盡而意不盡), 의진이정부진(意盡而情不盡)을 주장했다.
'말은 다하더라도 뜻은 다하지 않고, 뜻을 다 드러내더라도 정은 다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 참으로 의미가 심장한 말이다.
교류했던 인물들을 봐도 그렇고, 주장한 바를 봐도 그렇고, '이지의' 역시 당대에 널리
이름을 떨쳤던 훌륭했던 사인(詞人)임이 느껴진다.
이지의(李之儀)는 조의대부(朝議大夫)를 끝으로 벼슬을 마쳤다.
통판(通判)을 역임했기 때문에 일명 '이통판(李通判)'으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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