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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익필(宋翼弼)의 詩

아라홍련 2014. 6. 22. 20:14

 

 

 

                                主人出不還偶題

                                    (주인이 나가고 돌아오지 않아 그냥 적다)

     

                     寂寂掩空堂                적적해라 문 닫은 빈 집

                     悠悠山日下                아득해라 산중에 지는 해

                     出門又入門                문을 나섰다 다시 들어오고

                     佇立還成坐                우두커니 섰다 도로 자리에

                                                          앉아본다

 

                                                                       ~* 송익필(宋翼弼, 1534~1599) *~

                                            

 

          역사와 고전(古典)을 오랫동안 공부하다 보면,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격동의 세월을

             살다가 뛰어난 재능과 포부, 경륜을 활짝 펴보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진... 그러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들과 맞닥뜨릴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안타까움과 동시에 연민을 느끼곤 한다.

             최치원이 그랬고...

             김시습이 그랬으며...

             김만중이 그랬고...

             또 내가 글 스승으로 생각하는 명미당(明美堂) 이건창(李建昌) 선생이 그렇고...

             매천(梅泉) 황현(黃玹) 또한 그렇다.

             특히 역사적 평가가 서로 다를 때, 더욱 그런 느낌이 들곤 한다.

             ... 바로 위의 詩 主人出入不還偶題를 쓴 구봉(龜峰) 송익필(宋翼弼)이 그런 인물이다.   

 

             강호의 사람들은 구봉 '송익필'이 과거에 급제했으나 서얼이라 벼슬길이 막힌 인물

             이라고 설명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는 초시(初試)에만 한 번 응했을 뿐, 과거를 본 적도 또 급제한 적도 없다.  

             그럼에도 '송익필'은 우리 역사에 확연한 발자국을 남긴 인물이다.

             서얼인 그는 일찌감치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만 몰두해 큰 명성을 얻었다.  

             이는 그의 할머니 감정(甘丁)이 안돈후(安敦厚)의 천첩(賤妾) 소생이었기에 신분이

             미천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또 아버지 송사련(宋祀連)의 무고사건으로 한때 노비로 전락했던 적도 있다. 

             때문에 그는 일찌감치 사로(仕路)를 단념하고 학문에만 몰두했다. 

             구봉(龜峰)은 詩와 文章에 모두 뛰어나 선조 代의 <8대 문장가> 중 한사람으로 꼽혔다.

             워낙 문장으로 이름이 높고, 또 예학(禮學)에도 뛰어나 '이이', '송헌', '정철' 등과 학문을

             주고받는 친구로 지냈다.

             또 김장생(金長生)과 김집(金集) 부자를 제자로 두어 역사적인 인물로 키워냈고, 그의

             문하에서 '정엽'과 서성', '정홍명', '강찬', '김반', '허우' 등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많이 

             배출됐다.

             뿐만 아니라 이이(李珥), 성혼(成渾)과 함께 성리학을 발전시키고, 기호학파(畿湖學派)의

             탄생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     

             특히 예학(禮學)에 밝아서 기호 예학의 초석을 다진 인물로 평가된다. 

             예학은 기호학파의 중심사상이다. 

             만약 그가 본격적으로 사로(仕路)에 나섰다면, 이는 결코 쉽게 이룰 수 있는 업적이 아니다.

             ... 이를 보면 최치원, 김시습, 김만중, 이건창, 황현 같은 역사적 인물들은 본격적으로

             중앙 치에 나선 사대부들과는 확연히 다른 사명과 역할을 가지고 태어나,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구봉(龜峰) 송익필에게는 몇 가지 설명이 따라다닌다.

 

                    아버지 '송사련'의 무고사건 때문에 한때 노비로 전락했던 인물...

              *   조반정 1등 공신 9명을 직.간접으로 제자로 둔 서인(西人) 세력의 구심점...

                    '정여립 사건' 등 역사의 고비마다 논리와 심리를 파고드는 예리한 상소를 통해

                       결국 동인(東人)의 몰락을 가져온 당쟁의 기획자...

                  *   서인과 노론(老論)의 집권 플랜을 설계한 책략가...

                  *   기축옥사(丑獄事)를 뒤에서 주도한 장본인...

 

             ... 이쯤되면 우리는 그가 직접 벼슬길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정쟁(政爭)의 회오리바람

             속에서 적극적으로 핵심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또 정치를 직접 하지는 않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정치적 야망이 강한 인물이었음이 감지

             된다.  

             직접 정치에 참여하지 못한 욕망과 한이, 간접적으로 그의 꿈을 더욱 강력하고 무모하게

             실현시키고 싶었던 것일까?...    

             그는 친구나 제자들을 통해 조정의 대사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많은 

             옥사(獄事)에 직접적으로 관련됐다.

             구봉 송익필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서로 다른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역시 그의 말로는 좋지 않았다.  

             과도한 정치적 개입과 송사가 결국 화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만일, 그가 훌륭한 학자로 남았다면 조선의 역사나 개인의 안녕, 또 그의 가문을 위해서도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1586년(선조 19년)까지 구봉은 고양의 구봉산 아래에서 크게 문호를 벌여놓고 활발하게

             후진을 양성했다.

             그러나 이후부터는 송사에 휘말려 도피생활에 들어갔다.     

             정여립(鄭汝立)과 이발(李撥) 등 동인(東人)이 제거된 <기축옥사>의 막후 조종 인물로

             바로 그가 지목됐기 때문이다.

             이후, 다시 이산해(李山海)의 미움을 받아 아우 '송한필'과 함께 희천으로 유배됐다.

             송익필, 송한필 형제는 당대 대학자인 율곡 이이(李珥)가 "성리학을 가지고 논할 사람은 

             조선에서 '한필'과 '익필' 밖에 없다."고 말할 정도로 학문의 깊이를 인정받았던 인물이다.

             송익필은 1593년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 친구와 문인들의 집을 전전하며 불우한 생활을

             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몇 가지 값진 교훈을 얻을 수가 있다.

             하나는, 과도하게 정치적 편향성을 띠고 정쟁을 만들면, 종국엔 반드시 화가 미친다는

            사실다.

             동서고금의 많은 처세서들이 교훈을 주고 경계시켰던 바로 그 대목이다.

             둘째는, 그가 옳다고 주장했던 많은 정치적 관련 주장들이 과연 정의에 합당했느냐...

             하는 문제점을 들 수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 구봉은 서인 세력의 구심점이자 서인과 노론의 집권 플랜을 계획한 책략가  

             였다.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의 정치적 주장은 옳고 그름 간에 당리당략과 상당한 연관이 있다.

             당쟁이 심화되는 원인과 기초적 구심점을 그의 이론과 사상이 담당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 정적(政敵)을 무자비하게 축출해 많은 옥사(獄事)를 일으킨 인물로 역사에

             기록됐다.​

             끝으로민주와 민생을 외치며 정치인의 꼬리표를 계속 달려고 합집산을 거듭하며 온갖

             술수를 부리는 정치인들이, 과연 진심으로 국가나 국민의 안녕을 위해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우리는 심각하게 고민해봐야만 한다.

             뚜렷한 정치 철학이나 아무런 비젼도 없이, 오로지 개인의 권력욕이나 야망 만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를 하려고 권력에 빌붙어 줄을 서고, 온갖 꼼수를 일삼는 자들이 과연 정치인이란

             이름표를 단 뒤에 제대로 국가와 민생을 위해 정치를 하겠는가... 하는 점을 냉철하게 숙고

             해봐 한다.

             우리나라 정치 역사(歷史)를 살펴볼 때, 이들 대부분은 개인의 부귀영달과 권력욕의 실현,

             패거리의 이익, 자신이 속한 단체나 조직의 사상과 이념, 이익을 실현시키려는 행위에만

             몰두했을 뿐이다.

             정치인으로 승화되지 못하고 정치꾼으로 남은 이들은, 대부분 사리사욕을 채우고 부귀영화

             를 추구하기 위해 권력의 상징인 정치(政治)를 이용했다.

             여기에서 자유로운 정치인은 없다.  

             많은 정치인과 고위 공직자들이 부정부패에 심각하게 오염되고 또한 탐관오리로 기억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

 

             이들은 결코 큰 그림 하에서 국가나 민초(民草)를 먼저 생각하지 않는다.

             개인의 탐욕과 부귀영달 실현, 패거리의 이익을 가장 우선으로 둔다.

             지금 이토록 정국이 계속 혼란스러우며, 정치판이 아수라장이고, 국민이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것은 바로 이런 정치꾼들과 정치꾼 희망자들이 득실대기 때문이다.        

             음흉한 탐욕과 권력에 대한 야망을 숨긴 채 정치에 나서려는 자들이나, 이를 간파하지 못한

             채 부화뇌동하는 자들이나 결국은 같은 종류의 인간이고, 책임 또한 같다고 할 수 있다. 

 

             구봉 송익필의 동생 운곡(雲谷) 송한필(宋翰弼) 또한 형처럼 당대를 대표하는 대단한

             문재이자 대학자였다.

             그러나 과도한 정치 개입과, 사활을 걸었던 아버지 송사련의 무고사건 송사 결과가 끝내

             이들 형제를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과도하게 정치에 개입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말하면 많은 정적들이 '억울한 상황으로

             많이 축출된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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