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술사학(美術史學)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역사(歷史)와, 오랫동안 미적인 안목을 훈련시킨 예술의 하나인 미술
(美術)이 합쳤으니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전에 블로그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실제로 나는 한때 미술사학에 대해 꽤 심도있는
공부에 심취하기도 했다.
워낙 역사공부를 오랫동안 공부한 데다가 예술적인 안목과 지식까지 지니고 있으니,
다른 이들보다는 훨씬 빠르게 그림 속에 감춰진 이야기들을 빨리 찾아내는 편이다.
그래서 그림을 보면 절로 그림 속에 감춰진 이야기들을 연상해내고, 마치 추리를 하듯
세밀한 분석이 가능해진다.
위의 그림은 간송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국보 제 135호 <혜원 전신첩>의 화첩에 들어있는
풍속화이다.
<쌍검대무(雙劒對舞)>의 전체적인 그림을 보면, 조선 최고의 풍속화가 중 한명으로
꼽히는 혜원 신윤복(申潤福)이 그린 그림인 만큼 역동적이고, 생동감이 넘친다.
당시에는 이렇게 정밀하게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그리 흔치 않았다.
마치 현대미술의 극사실주의(極寫實主義, hyperrealism) 화법을 보는 듯하다.
'하이퍼 리얼리즘'으로 불리는 극사실주의는 1960년대 후반에 미국에서 일어난 새로운
미술 경향의 하나이다.
마치 사진을 찍어놓은 것과 구분이 안 될만큼, 철저한 사실 묘사를 특징으로 한다.
신윤복은 풍속화가(風俗畵家)였기 때문에, 화법에 더욱 정밀을 요했을 것이다.
위의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로 그 특성을 구분해낼 수가 있다.
첫 번째는, 맨 왼쪽에 보이는 테두리에 푸른 천을 댄 고급 돗자리에 앉아 있는 사대부이다.
죽부인(竹婦人)에 등을 기댄 채 여유있는 모습으로 춤판을 감상하는 모습으로 볼 때, 이
연회(宴會)의 주인공인, 조정의 당상관 이상의 고위관리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관직이 높을수록 갓의 크기가 컸다.
이 사람 역시 갓의 둘레가 크고 넓다.
두 번째는, 시계 방향으로 주인공 옆에 앉은 사람이다.
자유롭게 앉아서 흐뭇한 표정으로 춤판을 감상하는 모습을 봐서 연회 주인공의 인척, 즉
동생으로 보인다.
발로 장단을 맞추며, 흐뭇한 표정으로 무희들이 추는 쌍검무를 구경하고 있다.
세 번째는, 인척 옆에 있는 부채를 든 앳된 얼굴의 선비이다.
갓을 쓰고 고급 부채까지 들고 구색을 맞춘 그는, 음악이 시끄럽다고 한쪽 귀를 틀어막고
있는 모습이다.
이를 볼 때, 혼례를 올린지 얼마 되지 않는 연회 주인공의 아들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귀는 왜 틀어막고 있을까?...
답은 무희들의 춤 속에 있다.
검무(劍舞)를 추는 두 무희(舞姬)의 모자와 양손에 쥔 칼, 그리고 치마가 서로 반대 방향으로
휘날리는 걸 볼 때, 아마도 현재 연주되고 있는 음악은 최고 절정 상태인 것으로 보인다.
춤동작이 매우 역동적인 것을 볼 때, 장고를 중심으로 가장 리듬이 빠른 휘모리와 엇모리
장단이 빠르게 연주되고 있는 듯하다.
검무의 순서로 볼 때, 이 장면 이후에는 두 무희가 양손에 쥔 쌍검(雙劍)을 바닥에 던지면서
동시에 바닥에 엎드려 경사를 축하한 뒤, 춤판이 끝날 것이다.
... 이처럼 쌍검무는 모든 행사의 대미를 장식하는 공식행사이다.
관중의 관심을 집중시켜 공연을 절정으로 끌어올리는 연회(宴會)의 핵심이다.
때문에 연주하는 음악도 장단이 크고 빠르며, 한껏 고조될 수밖에 없다.
검무(劍舞)는 처음에는 느린 박자인 진양조와 중모리, 세마치 장단으로 시작해서, 좀 더
빠른 리듬인 중모리와 중중모리를 거쳐, 최종적으로 휘몰이와 엇모리장단 등으로 절정에
이르도록 구성돼 있다.
그래서 주인공인 아버지나 인척은 흥에 겨워 쌍검대무를 감상하고 있지만, 춤판이 낯선
어린 아들은 시끄럽다고 귀를 틀어막고 있는 것이다.
네 번째는, 장죽을 물고 있는 기녀(妓女)와 또 한명의 기녀이다.
두명인 이유는 주인공과 그 인척을 접대하는 기녀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교방(敎坊)에서 파견나온 이패기생들이다.
교방은... 기녀들을 중심으로 하여 가무(歌舞)를 관장하던 기관이다.
두 기녀는 매춘을 전문으로 하는 삼패기생이 아닌, 예인(藝人)으로 인정받던 이패기생,
일명 은근짜로 불리던 기녀들이다.
왜일까?...
모든 기녀의 로망이자 일패기생인 옥당기생(玉堂妓生)들은 궁궐에 소집돼 숙식을 하며,
일과 공연을 동시에 하는 침선비(針線婢) 생활을 하고 있다.
일명 상방기생(尙房妓生), 또는 양반기생으로 불리던 기녀들이다.의녀(醫女, 약방기생)와 침선비(針線婢), 다모(茶母) 등은 모두 관비(官婢)로 전국에서
차출된 기녀 출신이다.
또 매춘 전문인 삼패기생은 가무를 일절 못하도록 교방에서 규정하고 있다.
이들은 술시중과 매춘이 주업인 유녀(遊女)들이다.
때문에 그림에 보이는 기녀들은 예인이면서, 은근슬쩍 삼패기생처럼 매춘도 하는 은근짜
(隱君子)들, 즉 이패기생이라고 볼 수 있다.
또 그림을 보면, 현대보다 더 파격적인 모습도 보인다.
조선시대는 철저한 계급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천민 신분인 기녀들이 아무렇지 않게 장죽을
물고 사대부들 앞에서도 스스럼없이 맞담배를 피우곤 했다.
사대부들이 기녀들을 예인으로서 그만큼 대우를 해준 것이다.
지금처럼 명품에 중독돼 매춘만 일삼는 화류계 여자들과는 수준과 품격에 있어 상당한
차이가 있다.
다섯 번째는, 검은 갓이 아닌 즉 노란 초립을 쓴 남자이다.
양반인 사대부들은 말총으로 만든 검은색 고급 갓을 썼다.
황색 갓은 양반이 쓰는 갓이 아니다.
쇠털로 만든 평민이 쓰는 벙거지이다.
또 갓의 크기가 사대부들에 비해 많이 작다.
이는 신윤복의 풍속화 <쌍검대무>에서, 이 남자의 신분이 평민임을 암시하는 중요한 단서
이다.
특히 무릎을 세운 다리 사이로 호주머니가 살짝 드러나 있다.
일명 '줌치'이다.
또 시선이 무희들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 주인공을 바라보고 있다.
이를 볼 때, 남자는 기녀와 무희들을 데리고 온 이 공연의 주관자이자 인솔자임이 분명하다.
또 기방의 운영자이자 기녀들의 기둥서방인 기부(妓夫), 즉 별감일 가능성도 높다.
신윤복은 이를 암시하기 위해 호주머니를 보이게 그리고, 남자의 시선을 연회 공연비를
지출할 연회 주인공 쪽을 보도록 그림을 그렸다.
이는 또 쌍검대무가 이 공연의 막바지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섯 번째는, 상단 오른쪽에 있는 어린 노비이다.
관례 전인 앳된 얼굴의 어린 종은 긴 담뱃대를 들고 대기하고 있는 중이다.
이는 아마도 왼쪽에 있는 주인공 동생인 사대부가 집에서 데리고 온 노비로 추측된다.
일곱 번째는, 쌍검무를 추고 있는 무희(舞姬)들이다.
이들은 공작 깃털을 단 벙거지를 쓰고, 군복을 입은 채 양손에 칼을 쥐고 검무(劍舞)를
추고 있다.
중요한 사실은, 검무를 출 때는 꼭 군복을 입었다는 것이다.
기록을 보면 국방의 요충지인 평안도나 함경도 쪽의 기녀들은 평소에도 고위관리들을
영접할 때나 공연을 할 때, 심지어 말을 탈 때도 반드시 군복을 입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검무의 시초는 조선시대 <현종실록>에 기록돼 있다.
신라시대 화랑인 '관창'이 황산벌에서 죽은 뒤, 그를 추모하기 위해 남자들이 그의 얼굴을
본뜬 가면을 쓰고 칼춤을 추기 시작한 게 검무의 시작이었다고 언급돼 있다.
그러나 고려말까지 전승되던 검무는 조선에 들어서면서 중기까지 일시 단절됐다.
그러다가 18세기 때, 경남 밀양 출신 기생인 운심(雲心)이 춤꾼으로 명성이 자자해지면서,
궁중무용으로 채택됐다.
이후, 기녀들이 추는 춤으로 자리잡게 됐다.
또 춤추는 두 무희가 쥐고 있는 칼이 두 이(二) 字와 여덟 팔(八) 字를 나타내고 있다.
이 또한 우연이 아니다.
주역(周易)적으로 볼 때 이(二)는... 우주 만물의 근원인 양(陽)과 음(陰)을 말한다.
또 팔(八)은... 삼라만상인 팔괘(八卦)를 의미한다.
혜원 신윤복은 그림을 그릴 때 아무 이유없이 그려넣는 경우가 결코 없다.
그림 하나하나... 행동과 표정, 몸짓 하나하나에 다 의미가 있고 값진 정보가 숨겨져 있다.
이를 해석할 수 있어야지만, 비로소 "그림을 감상한다."고 말할 수가 있다.
여덟 번째는, 하단 맨 왼쪽에 있는 사선(紗扇)을 쥔 남자이다.
'사선'이란... 손수건 크기의 사(紗) 조각 양쪽에 자루를 대어 만든 것을 말한다.
보통 부채보다 크고 네모진 모양인데, 벼슬아치가 외출할 때 얼굴을 가리던 제구(諸具)이다.
악공들과 같은 위치에 앉은 것으로 볼 때, 또 갓의 크기로 볼 때 중인(中人) 계급으로 볼 수
있다.
또 앉아있는 위치로 볼 때 방금 도착한듯 보인다.
연회 주인공인 고위관리가 소속된 기관의 부하로 짐작된다.
끝으로, 맨 하단에 있는 6명의 악공(樂工)들이다.
이들 또한 신분이 중인(中人)이다.
악기의 구성을 볼 때, 삼현육각(三絃六角)으로 편성돼 있다.
삼현육각이란... 조선시대의 인형극과 무용, 탈춤, 가면극 등 민속놀이에서 향악(鄕樂)의
기본적인 악기 편성을 말한다.
즉 향피리 2인, 젓대1인, 해금 1인, 북 1인, 장고 1인... 이렇게 6명으로 구성돼 있다.
혜원 신윤복의 그림 뿐만 아니라, 단원 김홍도(金弘道)의 풍속화에서도 동일한 악기
편성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악단의 현재 연주상태를 보면, 맨 오른쪽에서부터 북과 장고를 치는 사람이 보인다.
그 옆으로 젓대를 부는 사람이 있으며, 또다시 왼쪽으로 등만 보이는 향피리를 불고 있는
악공 중 맨 왼쪽엔 해금(奚琴)을 연주하는 사람이 앉아있다.
한데, 악공들의 시선은 오른쪽에서 두 번째 앉아 장고를 치고 있는 사람에게 집중돼 있다.
그림으로 악단이 연주하는 음악의 진행을 살펴보면... 해금은 잠시 쉬고 있고, 향피리를 부는
두 사람은 신나게 연주를 하고 있는 중이다.
또 젓대를 부는 사람은 장고와 북의 장단에 맞추어 간간히 반주음을 넣고 있는 상황이다.
이를 볼 때, 향피리를 부는 두 사람이 빠른 리듬으로 음악을 주도하고 있고, 간간히 북과
젓대가 양념을 가미하듯 음악의 흥을 돋구고 있으며, 장고가 격정적인 연주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한데, 악단의 맨 오른쪽에서 북을 치고 있는 사람은 다른 악공들과는 약간 떨어져 앉아있다.
또 그의 북 한가운데에는 태극무늬가 선명히 보이고, 다른 악공이 연주하는 것을 살펴보고
있다.
이를 볼 때, 맨 오른쪽에 다른 악공들과 자리를 띄어 앉아있는 남자는 이 공연단의 리더임을알 수가 있다.
... 이처럼 <쌍검대무>를 그린 그림 한 장에는 엄청난 정보와 의미들이 담겨져 있다.
또 전체적인 그림을 보면 양반(兩班)과 상민(常民), 그리고 중인(中人)으로는 문인(文人)과
예인(藝人), 또 기녀들 같은 천민이 골고루 분포돼 있다.
이는 조선 후기 사회의 각 계급을 대표하는 상징성(象徵性)을 표현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림도... 역사도... 인생도... 꼭 아는 만큼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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