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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제클릭(Bejeklik) 석굴 경교(景敎) 벽화

아라홍련 2014. 6. 4. 03:12

               

 

 

    * 베제클릭(Bejeklidk)

 

          위구르 族의 트루판 무르툭(Murtuk) 계곡 강변의 절벽 위에 있는 석굴(石窟)이다.

          베제크릭(Bejeklik)은 위구르語로 '장식된', 또는 '아름답다.'는 뜻이다. 

          베제클릭 천불동(柏孜克里克千佛洞)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석굴이자

          고대 벽화(壁畵)의 보고(寶庫)이다.

          위의 벽화는 경교(景敎)의 의식을 표현한 그림이다. 

          그렇다면 경교란 무엇인가?...

          경교는 그리스도교 종파의 하나인 네스토리우스(Nestorianism)가 중국에 전래된 이후 

          붙여진 종교의 한 이름이다.

          경교(景敎)가 중국에 전해진 것은 635년(정관 9) 때의 일이었다.

          ​경교(Nestorius)는 소아시아와 시리아에서 생겨난 그리스도교의 작은 종파이다.

          이 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의 독립을 강조한 게 특징이다.

          그 두 본성이 느슨하게 결합된 두 개의 인격이라고 주장한다.

          경교의 주요 경전(經典)인 <서청미시소경(序聽迷詩所經)>과 <세존포세론(世尊布世論)>

          등에 의하면, 경교의 중심사상은 일신론적인 신관(神觀)이다. 

          한마디로, 유일신(唯一神)을 믿는 그리스도교이다. ​

          경교의 찬송문과 예배서에 해당하는 <존경(尊經)>, <경교삼위몽도찬(景敎三威蒙度讚)>은

          엄격하지는 않지만 삼위일체의 교리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경교(Nestorius)는 오늘날까지도 이라크와 시리아, 이란 등지에 남아있는 종교이다. ​

          이쯤 되면 당신은 무슨 생각이 드는가?...

          그리스도교가 아시아에 들어온 게, 우리가 상상했던 것과 달리 상당히 빠르다는 것을 금방

          눈치챘을 것이다. 

​          역사학계에서는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온 게 조선 후기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다르다.

          이미 삼국시대에 그리스도교가 한반도에 들어온 여러 증거가 속속 들어나고 있다. 

 

          또 한가지!

          이는 당신이 그동안 알고 있던 종교에 대한 편협한 사상을 깨트릴 만한 사실이라는 점이다.

          당신은 그동안 이 블로그를 통해서 유대교와 천주교, 개신교, 이슬람교 등이 모두 똑같은

          유일신(唯一神)을 믿는 종교라는 것을 학문적으로 알게 됐다.

          또 불교의 보살사상(菩薩思想) 또한 조로아스터敎의 '샤오쉬얀트' 사상에서 유래됐음을

          이미 밝힌 바 있다. 

          결국 이 모든 종교가 神에 의해 지구에서 인간의 세계가 시작된 후, 가장 먼저 시작된

          종교의 형태인 조로아스터敎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종교학자들이 모든 종교의 뿌리로 조로아스터敎를 꼽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때문에 자신이 믿는 종교만 진리이며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은 무지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일종의 죄악에 다름 아니다.

          당나라 제 2대 황제인 태종(太宗)은 중국에서의 경교의 전파를 허락했다.

          페르시아인 알로펜(Alopen, 阿羅本)을 단장으로 한 네스토리우스派 일행을 수도인 장안

          (長安)에 머물게 한 뒤, 경교의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할 수 있게 했다.

          이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교는, 페르시아에서 왔다는 의미에서 일명 파사교(波斯敎)라고

          불리었다.  

          중국에 있는 경교의 역사와 실태를 증언해주는 귀중한 사료인<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

          敎流行中國碑>에 의하면,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교를 '경교(景敎)'라고 부르게 된 것은

          '그 공덕과 효용이 뛰어나게 밝기 때문'이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비문(碑文)에는 635년에서 781년(덕종 건중 2)까지의 경교의 역사가 자세히 수록돼 있다.

          종교의 이름을 경교(景敎)라고​ 하거나, 성령을 '현풍'(玄風), 교당을 '사'(寺), 수도사를 '승

          僧), 사도를 '승가'(僧伽), 천부를 '천존'(天尊)으로 번역한 건, 중국 전통종교와의 연결성을

          추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경교가 중국의 문화적 전통에 적응하려 했던 흔적은, 여러 기록에서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

          당(唐) 초기에 황제와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발전했던 경교는, 당 말기에 이르러서는 쇠퇴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약 400여 년 동안 거의 소멸됐던 경교는, 원(元)나라 때 일시적으로 다시 부흥기를

          맞는다. 

          이때, 네스토리우스派는 경교라는 명칭 대신 '야리가온'(也里可溫)이라고 불렸다.

          이는 '복음을 섬기는 자'란 뜻을 지닌 몽골어 '아르카운'(Arkaun)을 음역한 것이다.

          이를 볼 때, 당나라 뿐만 아니라 몽고에도 그리스도교가 전파된 것을 알 수 있다.​

                      ​

          당(唐)나라는 한반도의 삼국, 그중에서도 특히 통일신라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학자들이 우리나라에도 일찍이 경교(景敎)가 전래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몽골과 고려의 교류를 통해 몽골인들 사이에 유행했던 '야리가온 신앙'이

          고려인들에게 전래되었을 가능성 또한 충분하다.  

          실제로 이런 추측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몇 가지 자료들이 발굴됐다. 

          바로 1956년 경주 불국사에서 출토된 돌십자가와, 전라남도 해남의 대흥사에 소장돼 있는

          동제 십자가, 그리고 마리아상과 비슷하다는 관음상 등이 경교의 우리나라 전래 가능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특히 소아시아에서 중국에 이르는 요충지마다 경교가 전파돼 있었고, 통일 신라인들 역시

          당나라나 서역 상인들과의 교류가 활발했기 때문에, 경교의 한반도 유입설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역사와 고고학, 종교학을 제대로 공부하면... 당신의 상상력을 훨씬 뛰어넘는 정보를 습득

          할 수 있다.  

 

          종교학자와 고고학자, 그리고 일부 역사가들은 한국과 기독교 문명간 만남의 역사는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것처럼 200년이 아닌, 1200년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삼국시대에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공존했다면... 또 불상과 예수상이 한곳에 모셔졌다면...

          이는 한마디로 Surprise이다!

          지금 각 종교의 광신도들끼리 타 종교를 인정하지 않고, 박해하며, 서로를 공격하고, 자신의

          삶도 제대로 살지 못하면서 전교(傳敎)를 한다고 떼를 지어 돌아다니는 것과 비교하면, 정말

          충격적인 일이다.  ​

          종교를 대하는 당시의 태도가 21세기인 현대인들보다 훨씬 더 포용적이고, 더 자유로우며, 

          또 진보적이기 때문이다.​                                                                   

                                       

                             경주 불국사에서 출토된 돌십자가 (24.5×24×9cm)

                             7∼8세기, 통일신라시대(숭실대학교 부설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좌로부터) 경주에서 출토된 철제 십자문장식 2점(좌: 5.8×5.6cm, 우: 2.4×3.2cm.

            7∼8세기, 통일신라시대 (숭실대학교 부설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오른쪽은 발해의 솔빈부 아브리코스 절터에서 출토된 십자가.

                                          ​

                                              <통일 신라시대의 성모마리아상.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고대 기독교의 한반도 전파를 시사하는 증거로는 위의 유물말고도 몇 가지 관련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보면, 7세기 말의 고승 (慧通)에 관한 글이 나온다.

           그 속에 혜통이 "마귀와 외도(外道)를 모두 서울에서 멀리 했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여기에서 '외도'란... 바로 불교(佛敎) 이외의 다른 종교를 뜻한다.

           당시 혜통이 새롭게 접한 다른 종교란 경교(景敎)일 가능성이 높다.

           왜일까?...

           승려 '혜통'은 일찍이 중국 당나라에 들어가 밀교(密敎)의 조사(祖師)를 스승으로 섬겼다.

           그는 스승의 천거로 당나라 제 3대 황제인 고종(高宗)의 딸의 병을 주술로 치유시킨 바

           있다. ​

           이 때문에 혜통은 고종의 신임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한데 고종 누구인가?...

           태종의 아들 고종은 경교를 정식으로 받아들인 후, 당나라에서 경교를 중흥시킨 바로 그

           장본인이다. 

           중국의 모든 주에 경교사(景敎舍)를 짓게 할 정도로, 경교에 심취했던 황제였다.

           이런 고종과 친분관계를 맺고 있는 혜통으로서는 경교와 자연스럽게 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그 내막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혜통(慧通)이 말하는 외도(外道)란... 바로 경교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외도를 "서울에서 멀리했다."는 것은, 경교가 이미 신라 안에 들어와 있었다는 것을 의미

           한다.         ​

​           또 위의 사진에서 보듯, 경주에서는 성모상(聖母像)을 닮은 통일 신라시대의 조각상이

           발견되기도 했다.

           위에서 밝힌 여러 논제들은 현재 계에서 조심스럽게 논의되고 있는 중이다.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것들과 너무 다르기 때문에 학문적인 정립을 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삼국유사> 중에는 구약성서(舊約聖書)에 나오는 전설이나 신화와 유사한 점들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경교와 관련된 국내 유물과 기록 외에도, 한반도 주변에서 발견된 유물과 기록들은 고대

           동방기독교의 신라 전파를 일률적으로 방증하고 있다. ​

 

           통일신라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던 발해(渤海)에서는, 실제로 기독교 유물이 여러 점

           발견됐다.

           발해의 솔빈부 아브리코스 절터에서 십자가가 출토되고, 한때 수도였던 동경 용원부

           (現 훈춘)에서는 삼존불의 왼쪽 협시보살이 십자가를 목에 걸고 있는 상(像)이 발견됐다. 

           또 1926년에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한반도와 인접한 중국 만주지방의 안산(鞍山) 부근

           에서도, 요대(遼代) 성종 때(11세기 초)의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로 만든 7점의 십자가가 

           출토됐다.

           또 동방박사의 아기 예수 경배도를 방불케 하는 암각화도 발견됐다.

           문헌기록에 의하면, 이곳에는 상당수의 경교 신자들이 살고 있었다.

           이때가 바로 고려 초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이 지역에는 그 이전부터 이미 경교가 유행하고 있었음을 여러 기록들이 증명하고 있다.

           기독교 동전사(東傳史) 연구의 권위자인 골든(E.A.Goldon) 1910년 代에 한국에서 약

           4년간 머물렀다.

           그리고 전국의 사찰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마지막 1년은 금강산 장안사(長安寺)에서 체류했다.

           이때(1917년), 그녀는 절 안에 당나라 때 중국에서 경교가 유행한 내용을 기록한 그 유명한 ​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流行中國碑)>(781년 건립)의 모조비(模造碑)를 세웠다.

           ... 이는 아마도 고대 동방기독교(경교)의 한반도 전파를 상징하는 뜻에서였을 것이다.

 

                                     ​

                                   <당나라의 수도 장안이었던 서안(西安)에서 1930년대에​

                                     찍은 대진사의 유적. 왼쪽에 보이는 큰 비(碑)가 바로

                                     대진경교유행중국비이다.>

                                                                               

                                               

                                                                 

                                                      대진경교유행중국비.  

                                           ​   중국의 국보급 문화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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