鳳求凰
(봉이 황을 구하다)
鳳兮鳳兮歸故鄕 봉이여 봉이여 고향에 돌아왔네
翱遊四海求其凰 그 황을 찾아 사해를 날아다녔지
時未遇兮無所將 지금까지 그 감추어진 곳 찾지 못했는데
何悟今夕升斯堂 오늘 저녁 이 대청에 오르며 깨달을 줄이야
有艶淑女在閨房 곱고 맑은 여인이 규방에 있어도
室邇人遐毒我腸 방은 가까운데 사람은 멀어 나의 간장 타게 하네
何緣交頸爲鴛鴦 어찌하면 목을 서로 꼬는 원앙이 될까...
胡頡頏兮共翱翔 어찌 오르락내리락 함께 날아볼까...
鳳兮鳳兮從我棲 봉아 봉아 나를 따라 보금자리로 가자
得托孳尾永爲妃 꼬리 서로 붙이고 영원히 짝이 되자
交情通體心和諧 정을 나누고 몸을 합치면 마음 잘 어울리는
中夜相從知者誰 한밤중 서로 따르며 알아줄 이 누구일까
雙翼俱起翻高飛 두 날개 모두 일으켜 펄럭이며 높이 나세
無感我思使於悲 더 이상 내가 슬픔을 느끼지 못하도록...
~* 사마상여(司馬相如) *~
* 선수의 향기가 진하게 느껴진다.
독하다!...
이런 詩로 여자를 꼬실 수 있다면 그는 진정한 고수이다.
고수 중의 고수이다.
실제로 사마상여(司馬相如)는 이 詩와 능란한 거문고 연주로, 사천성(四川省)의
대부호 딸인 탁문군(卓文君)을 첫눈에 반하게 만들어 유혹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날 밤 격렬한 운우지정을 나누며 탁문군의 혼을 빼앗은 뒤, 그 길로
둘이 함께 야반도주했다.
중국에서 유명한 러브스토리 '사마상여'와 '탁문군'의 사랑의 전설은 바로 이 詩
봉구황(鳳求凰)으로부터 시작됐다.
사마상여(司馬相如, BC 179~BC 117)는 전한(前漢)시대 유행하던 문학의 한 장르인
부(賦)의 명수로 유명한 중국의 문인이다.
전한(前漢, BC 206~ AD 8년)은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와 대륙 쟁탈
뒤에 세운 황조(皇祖)로, 진(秦)에 이어서 중국을 두 번째로 통일한 중국 황조이다.
'사마상여'는 사천성 성도(成都)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나 주위에 소문이 자자했다.
그때 이웃에 있는 양나라의 효왕이 문장가를 초빙한다는 말을 듣고, 조국을 떠나
양나라로 갔다.
효왕의 지지와 후원을 등에 업은 '사마상여'는 양나라에서 마음껏 글을 쓰며 편안한
생활을 하며 지냈다.
그의 출세작인 자허부(子許賦)는 바로 이 때 쓰여진 것이다.
그러나 효왕이 훙어하자, 그의 입지가 좁아졌다.
잘나가던 문장가에서 하루아침, 실업자로 전락했다.
그의 나이 이미 30대 중반이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고향인 성도로 다시 돌아갔다.
<자허부>가 워낙 유명했던 탓에 유명인사가 된 '사마상여'는 고향에 와서도 인물
대접을 톡톡히 받았다.
여기저기에서 좋은 술과 안주를 준비한 후, 그를 초청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일자리를 찾지 못한 그는 생활에 쪼들리기 시작했다.
이때, 그곳의 대부호인 탁왕손(卓王孫)이 사마상여를 연회에 초대했다.
마침 그 집에는 탁왕손의 귀한 외동딸이 17세에 과부가 되어 친정에 와있었다.
바로 탁문군(卓文君)이다.
멋진 남자가 집에 왔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탁문군'은 문 뒤에 숨어 사마상여의
모습을 훔쳐보면서, 거문고를 연주하는 모습을 몰래 감상 감상했다.
눈치빠른 '사마상여'는 그녀가 몰래 자신을 훔쳐보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그래서 거문고의 연주 곡목을 봉구황으로 정한 뒤, 노래를 읊기 시작했다.
... 바로 위의 詩 <봉구황(鳳求凰)>이다.
詩의 내용을 보면, 노골적으로 '탁문군'을 유혹하는 게 엿보인다.
봉구황(鳳求凰)은... "수컷인 봉(鳳)이 암컷인 황(凰)을 구한다."는 뜻이다.
봉황은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상상의 새이다.
기린, 거북, 용과 함께 사령(四靈), 또는 사서(四瑞)로 불리는 상서로운 새이다.
전반신은 기린을, 후반신은 사슴을, 목은 뱀을, 꼬리는 물고기를, 등은 거북을,
턱은 제비를, 부리는 닭을 닮았다고 한다.
또 깃털에는 공작처럼 오색 무늬가 있고, 소리는 오음에 맞고 우렁차며, 오동나무
에서 산다고 전해진다.
대나무 열매를 먹고, 영천(靈泉)의 물을 마신다고 한다.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 덕이 높은 천자(天子)가 나오면 이 봉황이 나타난다고 하여
궁궐과 어의(御衣)의 여러 장식들에 봉황을 사용했다.
봉황의 수컷을 봉(鳳), 암컷을 황(凰)이라고 부른다.
사마상여의 고향으로 도망친 두사람은 살길이 막막해, 다시 임공현으로 돌아와
주막을 열었다.
대부호의 딸인 탁문군은 주모(酒母)를, 사마상여는 잡일을 하며 힘들게 생계를
이어갔다.
이 소문은 곧 '탁왕손'의 귀에 들어갔다.
그가 노발대발하자 친구가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주막을 거두게 돈을 주라."고
권했다.
탁왕손은 못 이기는 척, 탁문군에게 많은 재산을 넘겨주었다.
그러나 사위와 딸이 집으로 내왕하는 것은 금지시켰다.
다시는 보지 않은 것이다.
그만큼 아버지 입장에서는 야반도주한 두 사람의 행위가 용서하기 힘들었다.
사마상여와 탁문군, 두사람은 주막을 정리한 이후부터 풍족하고 여유로운 생활을
누렸다.
한경제(漢景帝)가 훙어 후, 그의 아들 유철(劉撤)이 한무제(漢武帝)로 즉위하자
'사마상여'의 인생도 달라졌다.
<자허부>를 읽고 감동을 받은 한무제가 '사마상여'를 불러 자신을 위한 글을 짓게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사마상여'의 벼슬길이 훤히 열리게 됐다.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 사마상여의 눈에 다른 여인들이 서서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내인 탁문군이 중국 3대 미인으로 꼽히는 절색이었지만, 세월이 많이 흐르다 보니
사랑에도 심리적인 피로가 몰려온 것이다.
무릉에 있는 화류계에 종사하는 아름다운 여인을 첩으로 들이려고 하자, 탁문군은
그에게 이별을 통보하는 詩를 써서 전했다.
... 바로 어제 소개했던 탁문군의 詩 <백두음(白頭吟)>이다.
詩를 읽고 후회막심한 사마상여는 용서를 비는 글을 두번이나 보낸 뒤에야, 겨우
용서를 받았다.
그리고 두사람은 끝까지 해로한다.
두사람의 사랑 이야기는2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중국에서 최고의 러브스토리로
각광받고 있다.
한데....
몇 년 전, 중국에서는 '사마상여와 탁문군의 사랑은 거짓이다!' 라는 논문이 발표돼
중국이 발칵 뒤집혔다.
2007년, 허난대 교수인 '왕리췬'은 "사마상여는 사랑 때문이 아니라 탁문군 집안의
돈을 보고 의도적으로 접근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전설의 로맨티스트이자 연애계의 거성으로 불리며, 오랜 세월 동안 중국에서
사랑을 받아온 사마상여의 이미지를 여지없이 깨트려버리는 것이었다.
특히, 사마상여의 고향인 성도(成都)와, 탁문군의 고향인 공래(邛來) 사람들은 이
낭만적인 러브 스토리에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왕리췬' 교수의
주장은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이 일로 중국의 인터넷이 한동안 뜨겁게 달구어졌다.
특히 탁문군의 고향 '공래'에선 <왕리췬 타도운동>을 벌일 정도였다.
글쎄...
진실은 어느 것일까?...
이는 '사마상여'와 '탁문군'.... 이 두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이 고전적 사랑의 전설은, 한 외국 미디어가 엄정하게 심사해서
뽑은 <전 세계 10대 클래식 애정 전설>에 당당히 1위로 이름을 올렸다.
사랑의 전설에는 어느 정도 판타지가 필요한 것 같다.
그래야 상처 덩어리인 사랑도 아름답게 기억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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