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오늘은 충무공 탄신일(誕辰日)...

아라홍련 2014. 4. 28. 19:59

 

        오늘은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탄신일(誕辰日)이다.

          탐욕과 부정부패, 시궁창처럼 오염돼 온통 악취를 풍기는 이 나라를 보면서, 충무공의

          생신을 맞는 감회는 남다르다.

          일신상의 안위를 초탈해 자신에게는 한없이 냉엄하고, 부정부패와 탐관오리(貪官汚吏)

          그리고 당파에는 한없이 준엄했던 진정한 의인(義人) 충무공의 삶이 더욱 의미를 갖는다.

                              

          개인의 안위는 무시한 채 오로지 민초와 나라만 걱정했던 충무공(忠武公)...

          부하들을 엄격함과 자애로움으로 다뤄 관엄(寬嚴)함으로 존경받았던 지휘관...​

          그러나, ​

          조정에 머물며 오직 당리당략과 당파싸움으로 백성과 민초의 안위를 무시했던 고위 관리들...

          王의 위신과 군왕의 의무를 일찌감치 저버린 조선의 왕 선조(宣祖)...

          성격장애와 컴플렉스, 무능함으로 유능한 인재들을 미워하고 교묘하게 괴롭힌 조선의 군왕...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풍전등촉(風前燈燭)이었던 환란의 시대나, 지금 우리가 처한 이 나라의

          처지가 거의 비슷한 것 같아 처연한 심정마저 든다. 

 ​

          최근, 1593년에 충무공 이순신이 순찰사(巡察使) 김성일에게 보낸 편지가 발굴돼 공개됐다.

          1593년은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이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발발 때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경상도 연안에 투입됐다.

          왜구를 여러 차례 패퇴시켜 웅포(雄浦), 즉 지금의 경남 진해에서 7차례나 큰 승리를 거둔

          직후이다. 

​                                    

           

​             <이 편지는 경북 안동 김성일 종가에서 소장하던 것으로, 이후 한국학중앙연구원

​              입수해 자료화했다.>

          당시 경남지역 군비태세를 관할하던 경상우도 순찰사 김성일(金誠一)은 이순신에게

          "화공을 사용해 왜구를 소탕하라."고 요청하는 편지 한 통을 보냈다.

          이에 이순신은 4월 1일 답장을 보내 수군 지휘관으로서 자신의 판단을 정중히, 그러나

          명확히 밝혔다. 

     ​

              애초 생각은 진해(鎭海)가 부산으로 가는 길목이어서, 흉악한 적들이 요새를 지키고​

​              나오지 않고 있는데, 명나라 군사가 남하하는 날 수군을 거느리고 곧장 부산으로 가면

              필시 후방을 돌봐야 하는 걱정이 들 것이므로 그때 이를 불로 공격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요즘 형세는 명군이 오랫동안 지체하고 있으니, 만약 저들이 배를 불사르더라도

              배만 없앨 뿐이고, 왜구는 잠시 멈추는 것입니다. 

              영감께서 알려주신 계책이 이러하니 어찌 시행될 수 있겠습니까?

          .... 이번에 새롭게 발굴된 이순신의 편지 내용 중 일부분이다. 

          명장 이순신은 순찰사 김성일의 적절하지 못한 명령에, 최정방 지휘관으로서 이 명령이

          부적절함을 정중하게 예의를 지키면서 지적했다.

          즉 명나라 군대의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는 화공(火攻)을 쓰더라도 왜구를 소탕할 수가

          없으므로, 김성일의 계획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리라고 판단해 그의 명령에 정중히 반론을

          제기한 것이다.

          김성일은 1590년, 통신부사(通信副使)가 되어,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실정을 살피고 이듬해 돌아왔다.

          이때 서인(西人)인 황윤길은 일본의 침략을 경고했으나, 동인(東人)인 그는 일본의 침략

          우려가 없다고 보고해, 당시의 동인정권은 그의 견해를 채택했다.

          그러나 2년 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잘못 보고한 책임으로 처벌이 논의됐다.

          하지만 같은 동인인 유성룡(​柳成龍)의 변호로 경상우도 초유사(招諭使)에 임명됐다.  

          이순신은 편지에서 김성일에게 이런 내용도 써서 보냈다.

                           

              팔방 가운데 호남이 조금 완전하지만, 도내 장정들은 모두 바다와 육지의 전투에

              나아가고, 노약자들도 수송하는 일에 피폐해 있습니다.

              석 달의 봄날이 이미 지나고, 남쪽의 이랑은 적막하니, 변란을 겪은 곳보다 더욱

              심각합니다. 

              백성은 군대와 식량을 하늘로 여기고 있으니 큰 후환이 있을 것이며, 회복할 수

              있는 대책도 희박한 것입니다.

              매우 걱정되는 일입니다.

              가까운 시일에 경내로 돌아가서 각 함선의 군사들은 씨 뿌리기에 진력하게 하고,   ​

              명나라 군사들의 소식을 듣는 대로 즉시 바다에 내려가기를 꾀하고자 합니다. 

      ​​    글에는 그 사람의 인생관과 가치관, 우주관, 성격, 인성, 인격, 정의관이 적나라하게

          모두 드러난다.

​          새롭게 발굴돼 공개된 이 편지에서 충무공 이순신은 현장 지휘관으로서, 적절하지 못한

          명령을 내린 상급자에게 용기있게 자신의 소신을 정중하되, 명확이 밝히고 있다.            

          이는 오로지 전란 중에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낭길에 매달린 백성의 고충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편지를 읽어보면 전쟁 중에도 농사를 지어 부족한 식량을 확보하려는 충무공의 지략과

          철저함이 엿보인다.

          충무공 이순신이 남긴 편지나 글들을 읽어보면, 곳곳에서 나라를 위한 충정과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절절하다.

          진정한 의인(義人)이다!...  

          이 시대의 부패한 탐관오리들과는 결코 비교할 수 없는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난세의

          영웅이다. 

          이 편지는 이순신 장군이 쓴 편지 원본(原本)이 아니다.

          김성일 집안 사람으로 추정되는 이가 옮겨 적은 전사본(轉寫本)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알려진 적 없는 희귀본이다. 

          이번에 처음으로 공개됐다.​

                        

          그렇다면 충무공 이순신의 리더십은 과연 무엇일까?...

          바로 유학의 근본인 오덕(五德, 仁義禮智信)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인(仁)을 근본으로 한 충효정신(忠孝精神)과 유비무환 정신, 뜻을 관철하려는 추진력,

          또 위기를 극복하는 지혜(智慧) 등이 바로 이순신의 미덕으로 꼽힌다.

          돈과 권력, 극단적인 이기심에 젖어 썩을대로 썩은 지금 우리나라의 위정자들을 보면서

          424년 전 충무공이 쓴 편지 한장이 사람들에게 갚은 감동과 함께 경종을 울리고 있다.

 

             *  이 글은 저작권의 보호를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