寧越道中
(영월도중)
五日長關三日越 닷새 거리 긴 고개를 사흘에 넘어서자
哀辭唱斷魯陵雲 단종릉 구름 속에서 슬픈 노래도 끊어지네
妾身亦是王孫女 이 몸 또한 왕손의 여식이라서
此地鵑聲不忍聞 여기 두견새 울음은 차마 듣지 못하겠네
~* 이옥봉(李玉峰) *~
* 옥봉(玉峰)에게도 과연,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을까?...
워낙 비련의 상징이다 보니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있다...
그녀도 남편 '조원'과 분명 행복하게 지냈던 때가 있었다.
아마도 그녀 인생에서 가장 편안하고 행복했던 때는, 이 詩 <영월도중>을 쓸 때였을
것이다.
위의 詩는 '옥봉'이 삼척 부사(三陟 府使)로 부임하는 '조원'을 따라 삼척으로 내려갈 때,
영월을 지나가다가 지은 詩이다.
영월(寧越)... 하면 당신은 무슨 생각이 나는가?
바로 노산군(魯山君, 단종)이 삼촌인 세조에 의해 위리안치(圍籬安置)됐다가 참살당한
곳이다.
문학적 감성이 충만한 '옥봉'은 영월을 지나면서, 접동새의 구슬픈 소리를 듣고는 잠시
감회에 젖어 역사의 슬픔을 생각했을 것이다.
접동새는 두견새의 방언이다.
접동새의 구슬픈 울음소리를 듣던 '옥봉'은 어린 단종이 삼촌에 의해 왕위에서 강제로
쫓겨나 노산군으로 강등돼 영월에서 참혹하게 살았던 수난과 참사가 문득 생각나 아마도
슬픔에 젖었던 듯싶다.
위의 詩는 여류시인이 지은 詩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맑고 강건한 시풍이 특징이다.
씩씩하고 힘차며, 처량하면서도 또 아름답고, 비분강개한 심정이 마치 충신절사(忠臣節士)
의 詩를 읽는 느낌이다.
'허균'이 왜 '옥봉'의 詩를 "여자의 화장 냄새가 안 나고 청건(淸健), 청장(淸壯)하다."고
높이 평가했는지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앞서 언급했듯, 옥봉(玉峰)은 왕실의 후예이다.
조선 중기인 16세기 후반,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충북 옥천 군수를 지냈고, 임진왜란 때는 의병장을 지낸 이봉지(李逢之)이다.
비록 첩의 딸이었지만 아버지는 고위관리였고, 집안은 왕실의 일원이었다.
똑똑한 '옥봉'은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다.
어려서부터 글과 詩를 배웠는데, 일찌기 글재주가 뛰어나 그녀가 지은 詩는 늘 칭찬과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서녀(庶女)인지라 정실의 자리는 갈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를 따라 한양에 올라가서 시인이나 묵객(墨客)들과 어울리며 문재(文才)를
자랑했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젊은 선비를 알게 돼 한눈에 반했으니, 바로 조원(趙瑗)이다.
이 만남이 그녀의 삶을 비련의 주인공으로 인도한 계기가 됐다.
그렇다면 조원(趙瑗)은 대체 누구일까?...
'조원'은 남명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공부해 20대에 과거에 급제한 인재이다.
삼사(三司)의 하나인 사간원(司諫院)의 정언(正言)을 지냈고, 시와 문장이 뛰어나기로
당대에 소문이 자자했던 인물이다.
삼사는 홍문관(弘文館), 사헌부(司憲府)와 더불어 언론관에 해당하는 삼사의 요직이다.
이를 볼 때 '조원'의 성품은 매우 강직하고 청렴하며, 매사 철저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삼사의 관원들은 최종 과거인 임금 앞에서 시험을 보는 전시(殿試) 합격자들 중, 성적이
가장 우수한 사람들만 등용되는 관직이다.
특히 학식과 인망이 두터운 사람들로만 뽑아 일명 청요직(淸要職)이라고 부른다.
훗날 정삼품(正三品)의 당상관으로 임금을 보필하는 승지(承旨)의 자리에까지 올랐을
정도의 인재였다.
똑똑한 '옥봉'은 그런 '조원'이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이왕 첩살이를 할 것이라면 그런 남자의 소실이 되고 싶었을 것이 여반장이다.
조원의 강직함은, '옥봉'이 소실이 되겠다고 자청했을 때 단호히 거절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때는 사대부가 첩실을 두는 행위가 흠절(欠節)이 아닌, 거의 일반화됐던 시대이다.
당시, '조원'은 이미 혼인을 한 상태였다.
그의 거절에 '옥봉'의 아버지도 담판에 나섰지만, '조원'은 끝내 첩을 두지 않겠다고 거절
했다.
그러나 딸의 간곡함을 안스럽게 생각한 '이봉지'는, 이번엔 '조원'의 장인인 '이준민'을
찾아갔다.
그리고 옥봉이 '조원'의 소실이 되도록 도와달라고 당부했다.
조원의 장인 '이준민'은 사위에게 "첩을 거부하는 것은 장부답지 않은 처사"라며 나무랐다.
딸의 시앗이 될 여인을 소개하며 사위에게 첩으로 들이라고 권유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조원'은 하는 수없이 다시는 詩를 쓰지 않겠다는 '옥봉'의 약속을 받아들인 뒤, 소실로
맞이했다.
아마도 시인이나 묵객들과 어울이며 구설에 오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의 성품과 직위를 생각하면 일면 이해 안 가는 바도 아니다.
그러다가 하필 필화사건이 나서 '조원'이 격노해 '옥봉'을 내친 것이다.
'조원'의 직책과 청렴한 성품을 살펴볼 때, 고위관리의 소실이 파주목사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공기관의 형사업무에 관여한 행위를 그로서는 용서할 수 없었을 것으로 추축된다.
우리는 이 詩 <영월도중(寧越道中)>을 통해 한가지 비밀을 찾아낼 수가 있다.
'옥봉'은 '조원'에게 "다시는 詩를 쓰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고 소실이 됐지만, 남편 몰래
계속 詩를 썼다는 사실이다.
이 시가 바로 조원의 소실로 있을 때, 삼척부사로 임명돼 삼척으로 향하는 남편의 뒤를
따라가던 도중에 영월을 지나갈 때 지은 시이기 때문이다.
다만 '조원'의 눈에 띄지 않아 문제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사랑하는 님이 삼척 부사(三陟 府使)로 발령이 나서 정실을 제치고 따라가는 '옥봉'...
본처의 눈치를 보지 않고도 마음껏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시간과 공간을 온전히 보낼 수
있는 자유와 기쁨...
아마도 이 때가 '옥봉'에겐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을 듯싶다.
바로 화양연화(花樣年華)!
꽃과 같이 가장 아름다운 한 때...
인생을 살면서 가장 즐겁고 행복했던 시절...
삼척에서의 몇 년간이 '옥봉'에게는 분명 '화양연화'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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