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興
(봄 흥취)
春雨細不滴 봄비 가늘어 빗물 떨어지지 않더니
夜中微有聲 밤중에 약한 소리 들린다
雪盡南溪漲 눈이 녹으니 남쪽 계곡물 불겠고
草芽多少生 풀은 얼마간 생겨나겠지
~* 정몽주(鄭夢周) *~
* 정몽주(1337~1392)
고려말의 충신이자 성리학자.
號는 포은(圃隱)이다.
고려 인종, 의종 때 추밀원지주사를 지낸 '정습명'의 후손이다.
성균관 박사로 1367년엔 대사성(大司成)을, 또 1375년엔 우문관 대제학 등을
역임했다.
대사성이란 성균관의 으뜸벼슬을 말한다.
정3품의 관직으로 유학(儒學)에 관한 일을 총괄하는 직책이다.
우문관(右文館)은 고려 때 임금이 학사(學士)들과 경서(經書)를 강론하던 곳으로,
고려 말기에 문덕전(文德殿)의 이름을 고쳐서 우문관으로 불렀다.
정몽주의 스승인 이색(李穡, 1328~1396)은 정몽주를 우리나라 성리학(性理學)의
창시자로 꼽았다.
포은(圃隱)은 고려 때 과거의 삼장인 초장, 중장, 종장에서 모두 장원을 차지했던
뛰어난 인물이다.
이는 천재(天才)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색의 문하에서 다섯살 아래인 정도전(鄭道傳)과 함께 수학했으나, 훗날 정치적견해가 달라 서로 칼을 겨누는 악연이 됐다.
스승 '이색'은 정몽주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학문에서 어느 누구보다 부지런했고, 가장 뛰어났으며, 그의 논설은
어떤 말이든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
후배인 '정도전' 또한 정몽주를 이렇게 평가했다.
여러 생도가 각기 학업을 연수하여 사람마다 이견이 있었는데, 선생은
그 물음에 따라 명확히 설명하되, 털끝만큼도 차이가 나지 않았다.
... 이렇게 평가하며 존경의 마음을 아낌없이 표현했다.
정몽주와 정도전은 서로 많은 영향을 주며 '마음을 같이한 벗'인 동심애(同心愛)의
맹세를 나누었다.
그러나 정치적 견해를 달리한 역사의 선택은 끝내 서로에게 칼 끝을 겨누는 적이
되게 만들었다.
정치와 권력에는 우정, 언약, 의리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극명히 보여준 한
예이다.
명나라의 철영위 요구에 전쟁을 주장하는 '최영'파와, 외교적 방법으로 해결하자는
'이성계'파가 대립했을 때, 정몽주는 '이성계'파와 의견을 함께 했다.
또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가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할 때도
이들은 뜻을 같이 했다.
공양왕을 세운 공로로 두사람은 승진도 하고, 공신에 함께 오르기도 했다.
허나 이성계를 왕으로 세우려는 움직임에 대해서는 분명히 반대의 뜻을 나타냈다.
더이상 '이성계'나 '정도전' 과는 같은 길을 갈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고려를 개혁해야 한다는 생각도 같았고, 왕을 폐할 수도 있다는 급진적인 성향도
같았지만, 고려 왕조(高麗 王朝)는 지켜야 한다는 게 '정몽주'의 신념이었다.
그래서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꿈꾸는' 이성계'나 '정도전' 과는 정적(政敵)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후에 태종)은 정몽주의 심중을 정확히 알기 위해 술상을
마주하고 마음을 떠보기 위해 詩 하나를 읊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 년까지 누리리라.
역성혁명에 뜻을 함께 하자는 이방원의 詩에 담긴 뜻을 눈치챈 '정몽주'는 자신의
단호한 마음을 담아 답가(答歌)를 읊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의 뜻을 확인한 이방원은 가신인 조용규를 보내 정몽주를 참살했다.
정몽주가 죽은 뒤 13년이 지난 1405년, 조선 제 3대 왕이 된 이방원은 정몽주를
영의정에 추증하고, 익양부원군에 추봉했다.
문충(文忠) 이라는 시호도 내렸다.
정적이던 정몽주의 충정을 높이 기려 충절의 표상으로 삼은 것이다.
이후, 정몽주의 충절(忠節)은 '선죽교에 뿌린 피가 지워지지 않는다.'는 전설로
남았다.
그리고 그의 학문과 이념은 조선의 사림파(士林派)에게 고스란히 이어졌다.
이방원의 손에 죽었으나, 그로 인해 영원히 불멸의 전설로 남게 된 정몽주!...
역사(歷史)의 아이러니란 바로 이런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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