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산책)
苦忘亂抽書 괴로움 잊고 어지러이 책 뽑았다가
散漫還復整 도로 정리하려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데
曜靈忽西頹 갑자기 햇살이 서쪽에서 지고
江光搖林影 강물이 숲그림자를 흔든다.
扶筇下中庭 지팡이 의지해 뜰로 내려가
嬌首望雲嶺 머리들어 멀리 구름낀 고개를 본다
漠漠炊烟生 막막히 밥짓는 연기 피어나고
蕭蕭原野冷 쓸쓸한 들판은 차가워 지는데
田家近秋穫 밭 가까운 집들은 가을걷이 가까워져
喜色動臼井 즐거운 기색 가득 방아가 돌아간다.
鴉還天機熟 갈가마귀 돌아오니 가을이 깊었구나
鷺立風標迵 백로가 우아하게 지나네
我生獨何爲 나의 삶, 홀로 무엇을 하려했던가
宿願久相梗 오랜 바람은 늘 막혀 있다.
無人語此懷 이 마음 말로 표현하기 힘들어
搖琴彈夜靜 밤 고요한데 거문고 탄다.
~* 이황(李滉) *~
* 이황(李滉, 1501~1570)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
字는 경호(景浩), 號는 퇴계(退溪)이다.
이동설(理動說),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등 주리론적(主理論的) 사상을 형성하여
주자성리학을 심화, 발전시켰다.
조선 후기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인물이다.
1527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이듬해인 1528년에 사마시에 급제
했다.
1534년엔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부정자로 등용된 후 박사, 전적, 지평 등을 거쳐 세자
시강원 문학과 충청도 어사 등을 역임한 후, 1543년 성균관사성이 됐다.
1548년, 풍기군수 재임 중 전임군수 '주세붕'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 서적
(書籍), 학전(學田)을 내려줄 것을 임금에게 청하여 실현했다.
이것이 바로 조선시대 사액서원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1552년엔 성균관 대사성으로 임명되었다.
1560년, 낙향해 고향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한 뒤,
그로부터 7년간 독서와 수양, 저술에 전념하며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도산서당(陶山書堂)과 도산서원(陶山書院)을 같은 곳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많은 이들이 이를 혼동하고 있지만, 이 둘은 같은 장소가 아니다.
'도산서당'은 퇴계 '이황'이 생전에 고향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학문을 닦던 곳이고,
'도산서원'은 퇴계 작고 이후, 제자들이 힘을 모아 도산서당 곁에 세운 서원을 말한다.
1568년엔 대제학과 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은 뒤, <중용>과 <대학>에 기초해서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와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했다.
조선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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