歸田園居 四
(전원에 돌아와서 4)
久去山澤遊 오랜만에 산과 못에 가 노닐며
浪莽林野娛 넓은숲과 들판을 마냥 즐기네
時携子姪輩 자식과 조카들 손목을 잡고
披榛步荒墟 가시덤불 헤쳐 황폐한 마을로 가네
徘徊丘壟間 언덕위 구릉을 이리저리 돌아보니
依依昔人居 옛 사람의 거처가 어렴풋하여라
井竈有遺處 우물과 부엌 터는 흔적만 남고
桑竹殘朽株 뽕나무와 대나무도 그루터기뿐
借問採薪者 나무하는 사람에게 물어보나니
此人皆焉如 여기 있던사람들 다 어떻게 되었오
薪者向我言 나무하는 이가 나에게 하는 말이
死沒無復餘 다 세상 떠나서 남은 이가 없다오
一世異朝市 한 세대에 세상 바뀐다 하더니
此語眞不虛 이 말은 참으로 빈말이 아니네
人生似幻化 인생은 환상인 양 변하여 가니
終當歸空無 끝내는 공과 무로 다시 가누나
~* 도연명(陶淵明, 365~427) *~
* 도연명의 전원생활은 그야말로 농사짓는 농사꾼의 삶이었다.
때문에 생활 속에서 묻어나는 평담한 자연주의 전원시(田園詩)를 많이 남겼다.
도연명은 팽택 현령 자리를 박차고 나오면서 "쌀 다섯 말에 소인배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고 일갈한 뒤,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오랫동안 꿈꾸던 전원생활을 시작했다.
농사가 호구지책이라 힘든 생활이었지만, 그는 22년 간 끝내 세속으로 돌아오지
않고 농사꾼으로 살면서 주옥같은 시를 많이 남겼다.
특히 허욕과 세속의 때를 벗고 자연을 벗삼아 청담한 삶을 살다보니, 삶에 대한
통찰력과 성찰이 뛰어나 詩를 읽는 이들에게 참된 혜훈(惠訓)을 전해준다.
그러나 그의 생전에 그의 詩는 별로 크게 인정받지 못했다.
그렇다면 '도연명'의 詩는 언제부터 인정을 받기 시작했을까?...
그가 죽고 난 100여 년 후부터이다.
양나라 소명태자(昭明太子, 501~531)의 문선(文選) 30권 중에, 무려 9편에
달하는 <도연명 전집>을 엮으면서 도연명의 평담(平淡)한 전원 자연시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소명태자는 중국 남북조 시대 인물로, 그 유명한 양무제의 장남인 황태자이다.
그 후, 수(隋)와 당(唐)을 거치면서 도연명의 詩와 부(賦)의 주석서가 쏟아졌다.
특히, 도연명의 자연주의 전원시는 성, 중당(盛,中唐) 시절, 왕맹위유(왕유,
맹호연, 위응물, 유종원)로 이어지는 전원 자연파 시인그룹의 태두가 되었다.
또 중국의 천재시인이자 최고 문장가 '소동파'가 도연명의 詩를 높이 평가하면서
담백한 시풍이 더욱 인정을 받게 됐다.
그의 유명한 연작시인 <귀전원거(歸田園居)>는 오늘날 읽어도 전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시공을 초월하는 철학과 감동을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