歸園田居 二
(전원에 돌아와서 2)
野外罕人事 들 밖에는 사람과의 일도 없고
窮巷寡輪鞅 좁은 골목엔 거마의 출입도 드물다
白日掩荊扉 대낮에도 사립대문 닫고
虛室絕塵想 빈 방에서는 세상 생각 전혀 없다
時復墟里人 때때로 빈 고을 사람 돌아오고
披草共來往 풀을 헤치고 서로 오고간다
相見無雜言 서로 만나면 잡된 말 하지 않고
但道桑麻長 뽕나무나 삼나무의 성장에 대서만 말한다
我土日已長 뽕나무, 삼나무는 이미 자라나고
我土日已廣 우리의 땅도 날마다 넓어진다
常恐霜霰至 항상 두려운건 서리나 우박 내려
零落同草莽 잡초 덤불 처럼 시들까 걱정이네
~* 도연명(陶淵明, 365~427) *~
* 농사꾼이 된 도연명
도잠(陶潛, 도연명의 이름)은 심양(尋陽)의 시상(柴桑) 사람이다.
지금의 구강(九江)이다.
그의 증조부는 동진(東晋)의 대사마(大司馬)를 지냈고, 조부는 무창 태수를
지냈다.
대대로 벼슬을 한 집안이다.
도연명은 29세 때 벼슬길에 나섰다.
한동안 벼슬살이를 하다가 천성에 맞지않아 건위참군(建衛參軍)을 끝으로
그만두었다.
그 후 집안이 어려워지자 친지의 천거로 405년 41세 때, 팽택 현령(彭澤 縣令)에
임명됐다.
당시 팽택현은 강주 심양군(尋陽郡)에 속했다.
현재는 호구현(湖口縣) 동남쪽 30리 되는 곳으로 파양호가 양자강으로 들어가는
곳이다.
한데 현령으로 부임한 지 불과 80일 만에, 태수를 보좌하는 나이 어린 하급 관리가
팽택현에 와서 위엄을 부리며 의관을 정제한 후 인사를 올려야 한다고말 하자
도연명은,
다섯 말의 녹봉 때문에 향리의 일개 관리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
이렇게 말하면서 바로 현령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여산 서남쪽 시상현(柴桑縣)으로
돌아왔다.
따뜻한 성품 못지않게 기개 또한 대단했던 모양이다.
그때 지은 詩가 바로 <귀거래사(歸去來辭)>이다.
그러니까 도연명의 전원생활은 그의 고향인 여산 아래의 시상현에서의 생활을
말한다.
훗날 그는 저작랑(著作郞)에 다시 임명됐다.
하지만 끝내 취임하지 않고, 다시는 벼슬길에 나서지 않은 채 은자(隱者)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사바세계를 떠나는 날까지 농사를 짓고, 술과 국화 등 풍류를 즐기며 지냈다.
도연명은 낙천주의자였고, 성품이 고상했으며, 풍부한 상상력도 가지고 있었다.
그의 詩가 담박하고 고상하며, 삶에 대한 깊은 고찰을 통해 읽는 이들에게 많은
혜훈(惠訓)을 주어 오랫동안 많은 사랑을 받는 것은, 전원생활을 하면서 세속의 때가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담백한 시풍은 맑고 깨끗한 영혼의 소유자였기에 가능했다.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꾼으로 살면서 집필도 열심히 해서 많으 시를 남겼다.
특히 '전원에 돌아와서'와 '음주' 등 연작시가 많다.
<도연명집(陶淵明集)> 8권이 남아있다.
위의 詩를 읽어보면, 도연명은 농사꾼이 다 돼 있다.
대화의 소재는 오직 뽕나무와 삼나무 뿐이다.
잡된 말은 마주치는 사람끼리도 서로 섞지 않는다.
농사를 열심히 지어 농토는 점점 넓어지고 있고, 혹여 날씨로 인해 농사를 망칠까
걱정하고 있다.
완전한 농사꾼으로 변모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도연명의 詩 '귀원전거(歸園田居)'는 연작시이다.
책에 따라서는 시제가 '귀전원거(歸田園居)'로 나와있는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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