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블로그에 올렸던 글들을 쭈욱 훑어보다가, 망설임없이 '내가 좋아하는 글 3위'로
이 글을 선정했다.
보고 또 보고, 읽고 또 읽어도 재미지고 유익하며, 볼거리가 많은 글이다.
귀한 그림도 구경하고, 미술사적인 것 외에도 조선시대의 역사와 풍속, 제도, 그리고
다양한 인간들의 삶에 대한 고찰까지 가능한 글이다.
그때... 대체 무슨 열정으로 밤을 새워가며 이렇게 긴 글을 정성스럽게 썼을까?
이 글을 읽으며, '풍속화로 읽는 조선 역사'에 대한 포스팅을 오랫동안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오랫만에 보니 너무 재미있고 유익한 글이라, 언젠가 시간이 되면 다시 이런 글을 포스팅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풍속화로 거침없이 읽는 조선의 역사>...
'내가 좋아하는 글 3위'에 거침없이 올린다.
풍속화로 거침없이 읽는 조선 역사
(2013. 4. 17일의 글)
<신윤복의 유곽쟁웅(遊廓爭雄), 간송미술관 소장>
오랫만에 '그림으로 역사 읽기'를 한번 해보자.
그림 한장으로도 역사에 대한 수많은 정보와 비밀, 당대의 풍속들을 읽어낼 수가 있다.
물론 그림공부와 역사공부를 동시에 제대로 했을 때에 가능한 일이다.
이 그림은 유독 제목이 많다.
유곽쟁웅, 유곽대쾌, 기방의 난투극, 기방 난동기...
한가지 공통점은 이 그림이 유곽(遊廓), 즉 기방(妓房)에서 일어난 싸움이라는 것이다.
한데, 대체 누가 '유곽'이란 단어가 들어간 제목을 만들었을까?
이 풍속화는 그림 제목이 미스테리하다.
유곽(遊廓)은 많은 창녀를 두고 매음 영업을 하는 집을 말한다.
유곽제도는 곧 집창제(集娼制)를 뜻한다.
1585년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오사카 지역에 유곽지대(遊廓地帶)를
만든게 그 시초이다.
우리나라에 공창(公娼)이 진출한 것은 1900년 초였다.
그 이전까지는 관기(官妓)의 개념이었다.
조선시대 전기(前期)까지는, 아예 기방(妓房)이란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TV 드라마나 영화에서 조선시대 전기를 다루며, 기방이 나오게 하는 것은 한마디로
무지의 소치이자 심각한 역사 왜곡이다.
한데, 18세기에 그려진 그림에 '유곽'이란 제목을 붙여놓은 것이다.
이 당시엔 공창을 뜻하는 유곽이란 단어의 개념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이 그림에다 '유곽쟁웅(遊廓爭雄)', '유곽대쾌'란 희한한 제목들을 붙여놨다.
아마도 일제시대에 이 그림을 수집했을 당시, 제목을 이렇게 붙인 것으로 추측된다.
이 풍속화가 여러 개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이 그림의 등장인물은 모두 6명이다.
긴 장죽으로 담배를 피우며 싸움을 재미있게 바라보고 있는 기녀(妓女)...
화려한 빨간 옷에 노란 초립을 쓰고 중간에서 싸움을 뜯어말리고 있는 별감(別監)...
웃통을 벗어젖혔다가 다시 옷을 입으며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서있는 싸움의 승자...
그로부터 얻어맞고 갓이 사라진 채, 정신이 반쯤 나가 입술에 피가 묻어있는 싸움의 패자...
그를 좋은 말로 위로하고 있는 갓쓴 남자인 승자의 친구...
오른쪽에는 친구가 매맞다가 갓과 양태가 분리돼 굴러떨어진 것을 챙기며, 분한 얼굴로
친구를 바라보고 있는 패자의 친구가 보인다.
..... 이 그림엔 이렇게 모두 6명이 등장한다.
풍속화의 대가 신윤복이 이 그림을 그린 것은, 당대에 기방에서 이런 싸움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 그림은 기방 밖에서 손님들이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을 기녀의 기둥서방이자
기방의 운영자인 기부(妓夫)가 싸움을 뜯어말리고 있는 그림이다.
재미있지 않은가?...
지금도 화류계에서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상황이니 말이다.
힘깨나 쓴다는 남자들... 싸움 시작하기 전, 상의부터 벗어던지는 것조차 어쩜 지금과
저리도 똑같은지 절로 피식 웃음이 터져나온다.
수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세상 돌아가는 이치나 삶의 방법, 하는 짓들이 시종여일(始終如一)
하다는 증거이다.
그래서 역사(歷史)는 과거가 아니다.
현재진행형이다.
역사에서 읽어 낸 교훈은 수천 년 전이건, 수백 년 전이건, 지금 이 시대에도 유효하다.
역사공부가 중요한 이유이다.
이 그림에서 중요하게 살펴 볼 사람은 바로 기녀의 기둥서방인 별감(別監)이다.
바로 조선시대 화류계의 주역들이다.
옷차림부터 먼저 살펴보자!
일단 옷차림이 더없이 화려하고 사치스럽다.
조선 후기 유행하던 남자들의 복식을 주도한 사람들이 바로 별감들이다.
대전별감 만 입을 수 있는 홍의(紅衣) 안에 푸른색과 갈색의 누비옷을 껴입었다.
화려한 노란 초립을 썼는데, 상투는 '편월상투'이다.
편월(片月)은 음력 초닷새와 스무닷새 때 뜨는 조각달을 말한다.
별감은 보통 남자들처럼 상투를 그냥 뭉치는 게 아니라, 머리카락을 낱낱이 펴고 빗질을
해서 조각달처럼 보이게 모양을 냈다.
엄청나게 시간과 공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다.
거기다 상투가 풀어지지 말라고 꽂는 동곳도 사치를 한다.
주로 고급 보석인 밀화동곳을 사용해 상투를 만들었다.
밀화(蜜花)는 꿀이 엉긴 것 같이 보이는 노란색 보석 호박(琥珀)을 말한다.
망건도 당대에 최고급으로 치는 이마가 훤히 보일 정도로 곱게 짠 '평양망건'을 썼으며,
장신구로는 바느질 솜씨가 세련된 괴불주머니와 약주머니, 향주머니를 달았다.
그리고 그 위에 칼집이 있는 작은 칼인 장도(粧刀)를 달았다.
신발은 최고급 가죽신을 신었다.
별감의 호사스런 옷차림은 혜원 신윤복이 그린 기방과 관련된 다른 풍속화에서도
여지없이 나타난다.
<주사거배(酒肆擧盃), 혜원전신첩, 국보 135호, 간송미술관 소장>
<야금모행(夜禁冒行), 혜원전신첩, 국보 135호, 간송미술관 소장>
기방이나 기녀와 관련된 그림을 보면, 어김없이 기부인 별감의 모습이 나온다. 기부(妓夫)인 별감의 옷차림이 사대부를 능가할 정도로 더할 수 없이 화려하고 사치스럽다. 초립 아래로는 방한구인 털가죽으로 만든 '풍뎅이'를 쓰고 있다.
동침을 원하자 별감이 늙은 사대부에게 자신의 정인인 기녀를 딸려보내는 장면이다.
사대부의 지체가 상당히 높다는 것은, 갓을 보면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갓의 크기와 신분의 고하(高下)가 비례했다.
신분이 높을수록 갓의 둘레도 컸다.
화려한 옷차림을 한 별감의 초립도 양반의 갓 앞에서는 초라해 보일 정도이다.
기부는 손님이 자신이 맡고 있는 기녀와의 잠자리를 원하면 군소리없이 양보해야만 한다.
'야금모행'은 한마디로, 기부(妓夫)가 성매매를 중개하고 있는 장면이다.
남자들... 술 먹고 2차 가는 짓, 수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어찌 저리 똑같은가?
지금은 세상이 바뀌어 여자들 또한 저런 짓을 하다가 뉴스나 기사에 간간히 나오기도 한다.
술김에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이상한 짓 하다가 문제 생기면, 인생 한방에 훅 가는 수가 있다.
색욕을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들, 반드시 명심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기부(妓夫), 이들은 과연 누구일까?...
별감은 액정서(掖庭署) 소속의 하급 관리이다.
그러나 홍의를 입는 대전별감(大殿別監)의 경우는 상황이 다르다.
고위관리들조차 함부로 무시하지 못한다.
왕의 바로 옆에서 왕명을 받드는, 임금에게 직속으로 소속된 관리이기 때문이다.
이들 외에도 왕비에게 딸린 왕비전 별감, 세자에게 달린 세자궁 별감이 있지만, 끗발은
당연히 대전별감이 가장 세다.
이 대전별감이 바로 홍의를 입은 기방의 운영자이자 고객, 그리고 기녀의 기둥서방이다.
한데, 기부는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각 전(殿)의 별감이나 포도청의 포교, 승정원의 사령(使令), 의금부의 나장(羅將), 또는
궁방이나 왕실 외척의 겸인(傔人, 청지기), 그리고 무사만이 기부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 말기 대원군이 집권하면서부터는, 공정한 직무를 수행하게 하기 위해서
의금부 나장과 승정원 사령은 관기(官妓)의 기부가 될 수 없도록 규정했다.
이를 보면, 사람이 아닌 국가 소속의 재물로 인정하는 기녀들을 관리하기 위해 일정한
신분에 속한 사람들을 국가에서 제도적으로 기부(妓夫)로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백과사전이나 인터넷 블로그 글들 중에 기부가 기녀처럼 천민이었다고 나오는데, 이건
잘못된 엉터리 정보이다.
점잖은 양반들은 기방을 함부로 드나들지 않았다.
과거에 합격해 입신양명하려면, 세평(世評)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훗날 고위 보직을 받을 때, 젊은 시절에 기방을 드나든 게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을
빌미가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고위관리가 되면, 집이나 풍광 좋은 곳으로 기생과 악사들을 불러서 풍류를
즐기곤 했다.
그러나 무반(武班)은 예외였다.
기방을 아무리 드나들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무반들이 거의 대부분 거치는 포도청 같은 경우, 세속의 물정을 잘 알아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서 무반가(武班家)에서는 자식이 기방에 드나드는 것을 특별히 금하지 않았다.
때문에 기방엔 무반가의 혈기 넘치는 사내들이 무시로 드나들었고, 그러다보니 기방에서
싸움 그칠 날이 없었던 것이다.
이렇듯, 손님들끼리의 싸움을 뜯어말리는 것 또한 기부인 별감의 주요임무 중 하나였다.
양반이라도 기방을 드나들려면 일정한 규칙에 따라야만 했다.
기방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인사이다.
미리 와 있던 선입객(先入客)들에게 "평안호(平安呼)!" 하고 인사를 해야만 한다.
선입객과 그렇게 서로 인사를 나눈 뒤에는, 이번에는 기생에게 인사를 건네야 한다.
"무사한가?"
그러면, 기생은 "평안합시오?" 하고 답한다.
이런 절차를 거쳐야지만 먼저 기방에 와 있던 다른 손님들과 자연스럽게 합석할 수 있다.
기방에는 이런 예를 갖춘 규칙이 나름 엄격하게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손님들끼리 성향이 서로 맞지 않거나 인사가 흡족하지 않을 경우, 위의 그림인
'유곽쟁웅'처럼 기방 밖에서 웃통을 벗어젖힌 채 맞짱을 뜨게 되고, 이를 뜯어말리는 것
또한 기부(妓夫)인 별감의 몫이었다.
그나저나, '야금모행'을 볼 때마다 생각이 난다.
기부인 별감은 情人인 기녀(妓女)를 돈받고 손님에게 딸려보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림을 보면, 별감이나 기녀나 표정이 너무 거침없다.
오히려 기녀는 장죽을 입에 문 채, 담배만 팍팍 피우며 아예 초탈한 표정이다.
기부와 기녀 사이에도 과연 '사랑'이라는 이름의 공식이 존재하긴 했을까?
문득, 그것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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