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연 작가 블로그 글 중에서 조회수 랭킹 3위에 오른 글은 어떤 글일까?
밑에 글의 제목을 보면 내 블로그 글을 오랫동안 읽어온 방문자들은 아마도 아하! 하며
무릎을 칠 것이다.
조회수 정말 대단했다...
블로그 만들고 초창기에 올린 글이라 벌써 10개월이 지났건만, 아직도 동성애에 관한
별의별 단어가 다 동원돼 블로그에 유입되고, 그 열기가 아직까지 식지 않고 있다.
이 또한 작금의 세태를 반영하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오늘 Naver 블로그 통계를 보니 검색엔진별 유입 2위에 '동성연애 스타'와 '조선시대
동성커플' 등 2개가 나란히 올라가 있다.
이 단어들은 여지껏 본 것 중에서 가장 점잖은 편이다.
그동안 동성애와 관련된 별의별 해괴한 단어들이 다 유입돼 눈쌀을 찌푸리게 했다.
오죽하면 내가 블로그에 <난 동성애자가 아니다(2012. 4. 2)>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려야만
했을까?
그랬더니 조회수가 더 급증했다.
한마디로 난리 브루스였다.
... 생각할수록 황당한 해프닝이다.
이몽(異夢)에 동성애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고 해서 작가를 동성애자로 보는 건 좀
오바 아닌가?...
동성애를 역사적으로 고찰한 블로그 글을 보고 작가를 동성애자로 의심하는 건 너무
경망스럽고 주책스러운 생각 아닌가?....
어떻게 하면 뇌구조가 그렇게 단순할 수 있는지 자못 궁금하다.
그런 생각을 했던 사람은,
반성하라!
반성하라!
반성하라!
여러번 언급했지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조선시대에도, 신선기 시대에도,
구석기 시대에도 모두 일어났던 일이다.
다만, 당신이 몰랐을 뿐이다.
그래서 역사를 제대로 아는 게 중요하다.
역사는 현재의 거울이다.
역사를 잘 알아야 현재와 미래를 지혜롭게 잘 헤쳐나갈 수가 있다.
때문에 소설 이몽(異夢)에서도 조선시대 동성애에 관해 다루었을 뿐이다.
블로그 조회수 3위의 글을 소개한다.
3위와 버금가는 조회수를 기록한 <동성애자가 아니다>라는 글도 이어서 소개할 예정이다.
조선시대의 동성애
(2012.11.7일 글)
저자엔 수강재 최상궁과 수정전 박상궁이 정화수를 떠놓고 은밀히
사랑의 언약을 한 대식(對食) 관계였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두 사람이 팔목 같은 곳에 붕(朋)이란 문신을 새겼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최상궁이 자결한 이후, 박상궁도 대들보에 목을 매 자진했다.
<이몽 2부, 99p>
내시들의 영웅이자 남자 중 남자로 꼽히던 상선이 한때 남색(男色)인 비역을
즐겼다는 사실이 포착됐다.
사이가 소원한 정부인이 악에 받혀 포달을 부리다가 악다구니로 내뱉은 말이
사단이 됐다.
이는 종사관에 의해 즉시 국구에게 보고됐다.
상선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였다.
앙양해진 안동 김씨들이 상선을 급히 빈청으로 불렀다.
그리고 명예를 지킬 것인지, 자리를 지킬 것인지 선택하라고 강요했다.
영의정과 국구는 비역을 덮는 대신, 조용히 노상선으로 물러나라고 회유했다.
그날 밤, 눈빛에 짙은 우수를 담은 상선이 수굿한 달빛을 받으며 애련정
뒷산을 넘었다.
깊은 산중에 자리한 폄우사에서 왕과 내밀히 독대했다.
'폄우'란 '어리석은 짓을 고친다'는 뜻이다.
두 사람은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였다.
간간이 왕과 상선의 애절한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지난 어리석음을 왕에게 속죄하는 상선의 애달픈 울음소리가 내내 애련했다.
다음날, 내시부 뒷산 떡갈나무 아래에서 심장에 단도를 꽂은 상선이 발견됐다.
죽음으로 명예를 지킨 것이다.
소식을 들은 정부인이 곧바로 목을 매 자진했다.
보고를 받던 왕이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내의원이 발칵 뒤집혔다.
북한산 자락에서 파발로부터 상선의 죽음을 전해 듣던 노상선도 그대로
대청에서 마당으로 굴러 떨어졌다.
수장을 잃은 내시부 지붕 위로 검은 매지구름이 어둠처럼 낮게 내려앉았다.
<이몽 2부, 268p>
역사소설 이몽(異夢)에는 동성애 사례가 두 번 언급된다.
한번은 궁녀들끼리의 동성애인 대식(對食), 또 한번은 남색(男色)인 비역이다.
중국 기록에는 환관과 궁녀의 사랑도 대식이란 표현을 쓴게 보인다.
동성애의 역사는 의외로 길다.
원시시대 동성애의 흔적이 지금도 벽화의 그림으로 남아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神)들의 세계는 물론, 수천 년 전에도 동성애는 존재했다.
역사적 기록에 남은 동성애는 구약성서의 창세기, 즉 유태인과 이집트, 중동지역을
포함하는 지역과 고대 그리스 시대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창세기에 나오는 '소돔'이라는 도시는 성적으로 음풍하고 문란한 도시였다.
이성간의 성이 문란한 것을 넘어 동성간의 성적 접촉까지 있었다.
소돔(sodom)의 원뜻은 수간(獸姦)이다.
지금도 남색(男色)을 Sodomy라고 부른다.
성문화가 얼마나 문란했으면 야훼가 아브라함에게 "이곳에 죄없는 사람이 10명만 있어도
멸하지 않겠다."고 했을까?...
그러나 소돔은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위대한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은 록사네, 스타테이 라는 여인들과 결혼도 하고 정부까지
있었지만, 진정 사랑한 연인은 동성인 헤파이스티온이었다.
또 카이사르는 동방을 처음 방문했을 때, 비티니아 왕 니코메데스와 동성애 관계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에게는 평생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따라다녔다.
많은 유부녀들과 연애를 즐긴 사실이 있는 것을 볼 때, 카이사르는 양성애자로 추측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그의 연인이자 조수인 살라이도 유명한 동성 커플이다.
살라이는 다빈치가 죽는 순간까지 30여 년을 지극정성으로 그의 곁을 지켰다.
세계의 명화 '모나리자'는 다빈치가 살라이에게 준 마지막 선물이다.
최근엔 이탈리아 문화유산위원회의 '실바노 빈체티' 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연구팀에 의해
모나리자의 모델이 피렌체 상인의 아내 '리자 게라르디니'가 아니라 다빈치의 연인 '살라이'
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대식을(對食) 뜻하는 레즈비언은 '레스보스의 섬사람'이란 의미이다.
인류 최초의 여류시인이자 그리스의 유명한 서정시인 사포(Sappho)...
뮤즈(Muse)는 본래 9명인데, 플라톤(Platon)의 강력한 주장으로 10번 째 뮤즈로 등극할
정도로 아름답고 절등한 시인이었다.
소아시아 근처 에올리에 군도의 레스보스 섬은 음악의 아버지 '테르판도로스'의 섬이자
서정시의 양대 선구자인 사포와 알카이오스가 태어난 곳이다.
사포가 활동하던 BC 6세기의 레스보스 섬은 예술과 함께 여성들의 동성애가 성행했다.
결국 '사포'와 '레스보스' 섬은 여성들의 동성애로 불멸의 이름을 남겼다.
우리나라 역사는 어떨까?...
공식적인 기록을 통해서도 동성애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신라 때는 제36대 왕인 혜공왕과 화랑이 꼽힌다.
일제 때 일본 학자들 주장이긴 하나, 조선시대 실학자 이익(李瀷)이 <성호사설(星湖僿說)>
에서 "화랑에서 남색의 행위는 부정할 수 없다"고 기록한 것을 볼 때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
고려 때는 제7대 목종과 제31대 왕인 공민왕이 동성애를 즐긴 것으로 기록에 나와 있다.
조선시대 동성애 스캔들은 단연 순빈 봉씨이다.
세종의 며느리이자 세자(문종)의 부인이었던 세자빈 봉씨는 시중을 드는 궁녀와 동성애를
즐기다 발각돼 폐출됐다.
한 소설을 보면 순빈 봉씨가 궁궐에서 쫓겨나 아버지 봉여(奉礪)에 의해 살해당하고
'봉여'는 자살했다고 나와있는데, 이는 엄연한 역사왜곡이다.
봉여는 1436년(세종 18년) 음력 7월 12일에 지병으로 먼저 졸하고, 순빈 봉씨는 10월 26일에
폐출 당했으므로 어불성설이다.
조선시대에는 궁녀와 궁녀끼리의 대식 관계가 은밀히 유행했다.
대식(對食)이란, 말 그대로 '서로 마주보며 밥을 먹는다'는 뜻이다.
승은(承恩)을 입기엔 너무 먼 궁녀들이 함께 방을 쓰며 외로움을 달래다가 서로 연정을
느끼게 되면서 일어난 일이다.
이들은 서로의 손목이나 엉덩이에 붕(朋)자를 새겨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다.
허나... 은애옥(恩愛獄)에 어찌 영원한 사랑이 존재하겠는가?
'영원'과 '불멸'은 신(神)의 몫이다!
인간의 것이 아니다.
순빈 봉씨의 동성애 스캔들이 터진 것도 동성애 삼각관계로 인한 질투와 시기 때문에
시모인 소헌왕후에게 알려졌고, 결국 세종의 분노를 사서 폐출됐다.
역사를 알면 소설이 다시 보인다.
이몽(異夢)에서 역사의 진실을 찾아내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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