蜀葵花
(접시꽃)
寂寞荒田側 적막한 묵정밭 옆
繁花壓柔枝 번잡한 꽃 여린 가지 누르네
香經梅雨歇 향기는 초여름 비 개니 가버리고
影帶麥風欹 그림자만 보리 익는 바람에 기울었네
車馬誰見賞 수레와 말 탄 누가 보고 감상하리
蜂蝶徒相窺 벌과 나비만 와서 서로 볼뿐
自慙生地賤 난 곳이 천함을 부끄러워하며
堪恨人棄遺 사람에게 버림받은 한을 견디네
~* 최치원(崔致遠) *~
* 접시꽃은 중국이 원산지인 아욱과의 여러해살이 풀이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2세기 경의 문헌에 이미 접시꽃이 등장한다.
이는 지금으로부터 약 2,500여 년 전부터 이 꽃이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집트에서는 접시꽃의 다양한 효능 때문에 허브 종류로 키워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접시꽃은 유럽을 거쳐 미국으로 전파됐고, 영국인들은 지금도 접시꽃을 즐겨
심는다.
일명 '촉규화(蜀葵花)'라고 불리는데, 녹음이 우거지는 7월경 꽃이 피기 시작해서
9월까지도 간다.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꽃이 접시처럼 넓게 생겼다.
한방에서는 촉규화 씨를 촉규자(蜀葵子), 백색 꽃은 백규화(白葵花), 적색 꽃은
적규화(赤葵花)라고 부른다.
이 詩 '촉규화'는 '최치원'이 중국 유학시절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지은 시이다.
자신의 신분이 왕족이 아닌 육두품(六頭品)인 데다가, 외국인으로서 차별을 받는다는
한(恨)을 담은 詩로 유명하다.
육두품은 왕족 다음으로 높은 신분 계층이다.
난 곳이 천한 곳임을 부끄러워 하며(自慙生地賤)
사람에게 버림받은 한을 참고 견디네(堪恨人棄遺)
바로 이 부분이 자신이 신라 출신이라 차별을 받는다고 한탄하는 부분이다.
이 詩에서 '묵정밭'은 농사를 짓지않고 버려두어 거칠어진 밭인 휴경지(休耕地)를
뜻한다.
앞서 최치원의 詩 2 '범해(泛海)'에서 소개했듯, 고운(孤雲) 최치원은 12세 때에
당나라로 조기유학을 가서 18세에 빈공과에 합격한 뒤, 관리생활을 하며 17년간
당나라에 머물렀다.
'황소의 난' 때 관군 사령관인 '고변'의 비서관이 되어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쓴 뒤, 위민관과 문장가로 당나라에서 문명(文名)을 드날렸다.
29세 때 청운(靑雲)의 꿈을 안고 신라로 귀국한 '최치원'은 문란하고 부패한 정치를
보며 개혁을 시도했다.
신라 말기의 정국은 '최치원'의 표현대로 '惡中 惡'이었다.
이에 '최치원'은 폐쇄적 신분제도인 골품제의 개혁을 주창하며 국정쇄신을 위해
<시무 10조>를 신라 제 51대 왕인 진성여왕(眞聖女王)에게 올렸으나, 개혁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 일로 왕족들의 반발을 사게 돼 따돌림을 받는 계기가 됐다.
진골들의 왕위 쟁탈전과 농민반란, 호족들의 권력싸움 등 부패한 정치와 권력싸움에
신물이 난 '최치원'은 과감히 관직을 버리고 도성을 떠났다.
그리고 남쪽지방으로 유랑생활을 하다가, 만년엔 가족을 이끌고 해인사(海印寺)에
은거했다.
신라를 대표하는 유명 학자 임에도 생몰년도 중에서 졸(卒)한 시기가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만큼 세속과 정치에 신물을 내며 완전한 은둔생활을 택한 뒤, 저술활동에만 매진
했다.
통일신라 말년 때의 대학자이자 대문장가로 영원히 이름을 남기게 된 이유이다.
앞서 최치원의 詩 2 '범해(泛海)'에서 언급했듯, 최근 한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
국가주석은 '최치원'의 시를 인용하며 한국에 대한 친밀감을 표시했다.
그만큼 '최치원'은 지금도 중국에서 인정받는 인물이다.
'최치원'이 해인사에서 저술한 <법장화상전>은 중국 화엄종으로부터 큰 호평을
받았다.
송대(宋代)에 들어서는 외국인이 집필한 전기임에도 불구하고 대장경(大藏經)에
실리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중국은 왜 '최치원'을 잊지 못할까?...
한마디로 그는 '단순한 문화 수용자'가 아니라 '재 창조자'였기 때문이다.
'최치원'은 국제 경쟁력을 갖춘 선구적 지식인이었다.
이는 유.불.선 모두에 이해가 깊었던 그의 광대한 시각 및 관점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중국이 '최치원'을 기리고 기억하는 이유이다.
이 詩에서 '매우(梅雨)'는 매실 익는 계절에 내리는 초여름의 비를 말한다.
또 '맥풍(麥風)'은 보리 익는 계절에 부는 바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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