永遇樂
(영우락)
落日鎔金 석양은 금을 녹인 듯하여
暮雲合璧 저녁 구름과 합하여 옥이 된다
人在何處 그대여 어느 곳에 있나
染柳烟濃 버드나무에 번진 안개 자욱하고
吹梅笛怨 매화 피리는 원망의 노래 부른다
春意知幾許 봄 뜻을 얼마나 알고있나
元宵佳節 원소절 즐거운 계절에
融和天氣 천기와 융화하니
次第豈無風雨 순차로 비비람 따위 없을 수 있나
來相召香車寶馬 좋은 수레와 값진 말 불러
謝他酒朋詩侶 술 친구, 글 친구들을 대접하리라
中州盛日 중주 고을의 좋은 날
閨門多暇 규원에는 많은 여가 많아라
記得偏重三五 어린시절 일들 두루 생각나니
鋪翠冠兒 비취관을 늘어쓴 사내들
撚金雪柳 금빛 흰빛 버들가지 비벼붙여
簇帶爭濟楚 가지런하고 아름다운 요대 만들었네
如今憔悴 이제는 그 모습 초췌해져
風鬟霧鬢 머리엔 바람들고 서리마저 내렸다
怕見夜間出去 밤중에 나가기도 두려워
不如向簾兒底下 주렴 향해 그 아래 앉아
聽人笑語 사람들의 웃음소리 듣는 것만 못하네
~* 이청조(李淸照) *~
* 그동안 수옥(漱玉) 이청조의 사(詞)를 소개하며 여러번 언급했지만, '이청조'는
중국 최고의 여류 문학가이다.
비록 여인의 몸이지만, 사(詞牌, 곡조)의 풍격으로 치자면 '주방언이나 '유영'과
견줄만한 인물이다.
가장 세련되고 아름다운 운율과 섬세하면서도 정제된 감성을 잘 표현해낸다.
그녀가 남긴 몇 안 되는 사(詞)와 시(詩), 지극히 적은 문장이라 하더라도 특출나지
않은 게 하나도 없다.
때문에 중국 문학사에서 여류 사인(詞人) 중, 가장 빛을 발했던 인물로 꼽힌다.
위의 사(詞) 영우락(永遇樂)은 원소절(元宵節)을 감상한 노래이다.
'원소절'은 정월 대보름을 뜻한다.
원소절이 풍속을 자리잡게 된 것은 한대(漢代) 초기로 알려져 있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한(漢) 무제(武帝) 때, 한나라 왕실에서는 '태일(太一)'일이라는
神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태일'은 상당히 유명한 신으로 그 지위가 오제(五帝)보다도 높고,
한나라 황제들에게 많은 은덕을 입혔기 때문에 그 제사가 성대했다고 전해진다.
한나라 문제(文帝) 때에도 원소절과 관련된 기록이 전하고 있다.
漢代 초기에 막강 권력을 휘두르던 '여태후'가 죽은 후, 그의 일족이 정변을 일으켜
제위를 찬탈하려는 모의를 꾸몄다.
그러나 이 음모가 유씨 종실의 제왕인 '유낭'의 위에 들어가자 이들은 급히 손을 써서
여씨 일족을 토벌했다.
이로써 위급했던 일촉즉발의 '제여지란(諸呂之亂)은 평정됐다.
이들은 유방(劉邦)의 둘째 아들인 유환(劉桓)을 황제로 옹립했다.
... 그가 바로 문제(文帝)이다.
한 文帝는 즉위한 후에, '제여지란'을 진압한 날인 정월 15일을 기념일로 정한 뒤
원소절(元宵節)이라 이름 붙였다.
이때부터 매년 정월 15일이 되면, 한나라 문제는 궁궐 밖으로 나가 백성들과 함께
원소절을 즐겼다고 전해진다.
원소절에는 각지에서 '위앤사오(元宵)'를 먹고 관등놀이를 하는 풍속이 있다.
원소(元宵)는 찹쌀가루를 반죽하여 둥글게 만들고, 그 속에 소를 넣은 음식을 말한다.
이것은 "온가족이 한자리에 모인 것"을 의미한다.
원소절에 채색 등롱을 구경하는 것은 서기 1세기 한(漢) 명제(明帝) 때 시작됐다.
그 후에 경성과 민간에서는 모두 등불을 장식하는 행사를 했는데, 이것을 등회(燈會)
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밤새도록 거리에서 꽃등을 구경하며 자유롭고 즐겁게 보냈다.
근대에도 중국에서는 원소절 때, 관등놀이가 여전히 성행하고 있다.
또 지방이나 농촌에서는 불꽃놀이와 채고교, 용등춤, 사자춤, 모내기춤과 같은
오락활동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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