櫻桃
(앵도)
粲爛朱櫻熟 빨간 앵두가 익어서 찬란하거늘
團圓湛露濡 동글동글한 것이 이슬에 젖어 있네
摘來盤上看 따 와서 소반 위에서 보니
箇箇是明珠 낱낱의 열매가 빛나는 구슬이네
~* 이숭인(李崇仁) *~
* 이숭인(李崇仁, 1347~1392)
고려 말의 詩人이자 대학자이다.
號는 도은(陶隱). 字는 자안(子安).
본관은 성주이며, '길재 대신'으로 불린다.
고려시대 삼은(三隱)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권신인 '이인임'의 조카이자, 포은 '정몽주'의 문하생이었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예의산랑(禮儀散郞), 예문응교(藝文應敎),
문하사인(門下舍人), 숙옹부승(肅雍府丞) 등을 역임했다.
정몽주와 함께 실록을 편수하기도 했다.
원(元)나라 사신을 돌려보낼 것을 청하다가 유배된 적이 있고, 고려 말
정치적 혼란기를 맞아 유배을 가거나 감금되기도 했다.
1392년(공양왕 4년), 이방원(태종)에게 정몽주가 살해되자 그의 일당으로
몰려 다시 유배되었다.
조선이 건국되자 '정도전'의 사주를 받은 '황거정'에 의해 장형으로 살해됐다.
중국이나 우리나라, 유럽까지 정치적 성향이나 당쟁에 따라 무자비하게 숙청
하고 위해를 가하는 것은 똑같다.
권력의 본질이 바로 살벌함과 잔혹성이기 때문이다.
위 詩 '앵도'는 빨갛게 익은 앵두를 보고 도은 '이숭인'이 지은 詩이다.
앵도는 워낙 꽃과 열매가 예뻐 옛부터 많은 시인들의 詩想을 불러일으켰다.
백운거사이자 <동국이상국집>으로 유명한 이규보(李奎報, 1168~1241)도
'앵도' 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天工獨何妙 하늘의 솜씨가 홀로 얼마나 기묘한가
調味適酸甘 맛을 조절하여 시고 닮을 알맞게 하였네
徒爾圓如彈 탄환처럼 생긴 게 부질없으니
難防衆鳥含 뭇 새가 입에 무는 것을 막기 어렵네
기묘하게 조화를 이룬 앵도 과육의 신맛과 단맛에 찬탄하는 시이다.
그 때문에 탄환처럼 생긴 앵도의 모양에도 불구하고 온갖 새의 먹이가
되는 현상을 세밀히 관찰해 쓴 詩이다.
요즘은 봄에 개화한 과목(果木)의 열매가 익어서 입맛을 돋우는 때이다.
이때 가장 화려하고 예쁜 과일이 바로 앵도이다.
예전에는 앵도라고 불렀으나 현재 표준어는 앵두로 바뀌었다.
앵두를 언제부터 먹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허나 중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농업기술 서적 <제민요술(齊民要術)>에
앵두 재배방법이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아주 오래전부터 식용으로
사용한 듯 보인다.
우리나라의 문헌으로는 고려시대의 <포은집(圃隱集)>에 앵두가 등장한다.
신라 때의 인물인 포은 최치원은 당나라 유학시절 앵두나무를 선물로 받고
<사앵도장(謝櫻桃狀)>이라는 글을 썼다.
앵두는 빛이 곱고 맛이 달며 새콤하여 즐겨 먹고 있는데, 화채를 만들거나과편으로 만들어 먹는다.
고려시대 이전부터 심어 온 재래종 앵두는 탐스러운 빛깔에 비해 신맛이 강해
구미를 당기지 못했으나, 요즘에 널리 보급된 개량종은 훨씬 맛이 좋아졌다.
색깔뿐만 아니라 과육과 미감도 빼어나 미식가들에게 인기가 높다.
예전엔 앵두는 임금이나 고위관리들만 먹을 수 있던 과일이었다.
조선 초기에 대제학을 지낸 '성현'이 쓴 <용재총화(傭齋叢話)>에 의하면,
"세종대왕은 앵두를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이 앵두를 좋아해 문종은 세자 시절에 궁 안의 울타리에 손수 앵두나무를
심고, 열매를 따서 부왕께 올리곤 해 세종은 세자의 효심에 크게 탄복했다고
전해진다.
예전에는 주로 앵두편(櫻餠)을 만들거나 앵도숙(櫻桃熟)을 만들어서 먹었다.
앵도숙은 앵두를 약간 삶은 다음, 꿀을 끓여 담근 것을 말한다.
꿀에 잰 앵두를 꿀물에 탄 앵두화채도 즐겨 먹었다.
열매의 붉은 빛깔이 입맛을 돋우는 앵도는 그 선정적인 색감 때문에 고래로
부터 美女의 입술에 비견되어 왔다.
한방에서는 앵두를 청량제로 본다.
독이 없으며 비기(脾氣)를 돕고 안색을 곱게 만든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화성(火性)을 가지고 있기에 너무 많이 먹는 건 좋지 않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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