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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유(王維)의 詩

아라홍련 2013. 5. 25. 16:58

 

 

 

 

 

                                             酌酒與裴迪                                      

                                          (술따라 배적에게 줌)

             

    酌酒與君君自寬             술따라 그대에게 주노니 그대여 관대하라

    人情翻覆似波瀾             인정이 뒤집힘은 파도 같은 것

    白首相知猶按劍             머리 세도록 알고 지내도 오히려 칼을 들고

    朱門先達笑彈冠             먼저 출세하고 나면 뒷 사람 관 터는 것을 비웃네

    草色全經細雨濕             풀빛은 길을 덮고 가는 비에 젖는데

    花枝欲動春風寒             꽃가지 꽃 피우려니 봄바람이 차다

    世事浮雲何足問             세상일은 뜬 구름 물어봐서 뭐하겠나

    不如高臥且加餐             높이 누워 좋은 음식 즐기는 것만 못하네

 

                                                                                       ~* 왕유(王維) *

 

 

 

      *  왕유(王維, 699~761)

 

          당나라의 詩人이자, 화가.

            字는 마힐(摩詰), 상서우승 벼슬을 했으므로 왕우승(王右丞)이라고도 불린다.

            집으로 <왕우승집(王右丞集)>이 전해진다.

            배적(裴迪716 - ?)은 당나라 시인이자 상서성랑, 촉주자사를 역임했던 문사이다.

            '왕유'와 함께 은거했던 인물이다.

            위의 詩에서 주문(朱門)은 '붉은 칠을 한 대문'을 말하는데, 귀족이나 권세가의

            집을 뜻한다.

            또 탄관(彈冠)은 '갓의 먼지를 털다'는 뜻으로, 친한 사람의 추천으로 관직에

            나갈 준비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찬(加餐)은 음식을 잘 먹는 것을 뜻하는데, '몸을 소중히 하는 것'을 의미한다.

 

            왕유의 자가 '마힐'인 것은 어머니 최씨가 열렬한 불교신자였기 때문이다.

            왕유도 이 영향으로 일찌기 입신하여, '유마힐'을 닮고자 字를 '마힐'로 삼았다.

            그의 이름과 자를 붙이면 불경 '유마경'에 나오는 '유마힐'이 된다.

            왕유가 얼마나 불교에 심취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어려서부터 수재로 칭찬이 높았고, 음악에도 뛰어나서 당나라 현종과 그 형제들의

            모임에 초대돼 '귀족모임'에서 일찌감치 예술가로서의 명성을  떨쳤다.     

            관리채용 시험에도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는데, 여기에는 이런 고사가 전해내려

            온다.

            왕유는 과거시험을 보기 전에 총애를 받던 기왕(岐王)의 도움을 받았다.

            기왕은 왕유에게 슬픈 시를 10수를 짓게한 뒤, 아름다운 옷을 입혀 공주를 만나게

            했다.

            공주는 왕유의 수려한 용모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거기다 왕유가 지은 詩를 읽으며 눈물까지 흘렸다.

            이에 왕유는 공주에게 자신의 詩集을 선물했다.

            책을 본 공주는 "여기에 있는 시는 모두 내가 알고 있는 시다."라며 찬탄했다.

            이후 공주는 왕유를 적극 추천했고, 왕유는 그 해 급제했다.

            그러나 수재인 체하는 것이 화근이 되어 한 때 관직을 사임했다.

            그 후 다시 조정에 기용되어 '안녹사의 난' 때는 급사중(給事中)이란 벼슬에 있었다.

            적에게 포로가 된 '왕유'는 낙양으로 끌려가, 본의 아니게 그들이 세운 정부의 관리가

            되었다.

            난이 평정돼 다시 당나라로 돌아온 '왕유'는 관직을 박탈 당했으나, 만년에는 서우승

            (尙書右丞)이란 고위직에 임명됐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경험한 '왕유'는 인간에 대해 환멸을 느꼈다.

            대신, 아름다운 산수와 자연을 사랑해 시와 그림에 몰두했다.

            그의 詩는 친교가 있던 맹호연을 닮은 데가 있으나, 맹호연의 詩보다 더 날카로운

            표현들이 많다.

            위의 詩를 보아도 인간사를 바라보는 날카로움이 번득인다.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왕유'는 관념적인 '공(空)의 세계'를 동경하는 詩들도 썼다.

 

            왕유(王維)는 화가로도 유명하다. 

            남송화(南宋畵)의 시조로 추앙되는 인물이다. 

            宋代의 대문호 소식(蘇東坡)은 왕유의 詩와 畵의 예술적 경지를 이렇게 압축평가했다. 

 

                    "왕유의 詩를 보면, 시 중에 그림이 있다."

 

            즉 왕유(王維)의 시화(詩畵)는 시중유화(詩中有畫)... 시 속에 그림이 있고,

            화중유시(畫中有詩)... 그림 속에 詩가 있는 '산수수묵화의 대가'라는 뜻이다. 

            唐代의 시선(詩仙)으로 불리는 이백(李白)과, 시성(詩聖) 두보와 함께 '왕유'가

            당시(唐詩) 3대 거장으로 꼽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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