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성만(聲聲慢)
尋尋覓覓 찾고 찾고 또 찾지만
冷冷淸淸 냉랭함과 스산함 뿐
悽悽慘慘戚戚 처량한 이 내 신세 외로움만 쌓이네
乍暖還寒時候 잠깐 따뜻하다 금새 추워지니
最難將息 몸 편히 보존키 어렵구나
三杯兩盞淡酒 두 잔 석 잔 맑은 술 마시지만
敵他 슬픔 어이 감당할까.
晩來風急 저물수록 바람만 매서워라
雁過也 기러기 날아갈 적에
正傷心 이 내 맘 더욱 가슴 아픈 건
却是舊時相識 옛 시절 알았던 기러기라 그런가
滿地黃花堆積 온 땅에 국화꽃 시들어 쌓이니
憔悴損 너무도 초췌히 변했구나
如今有誰堪摘 이제 누가 너를 딸지
守著窓兒 창가에 지켜 앉아
獨自生得黑 홀로 어이 저문 날을 보낼까
梧桐更兼細雨 오동잎에 가랑비 내리더니
到黃昏 황혼이 되어도
點點滴滴 두둑두둑, 두둑두둑...
者此際 이런 정경 앞에 서있는 이 내 마음을
一個愁字了得 어찌 '愁'자 하나로 다 형용할 수 있을까
~* 이청조 *~
* 이청조(李淸照, 1084~1151(?))
중국 문학사상 최고의 여류시인...
술을 남자보다 더 사랑했던 여인...
재색을 겸비한 뛰어난 美女 詩人...
'이청조'는 후대에 이렇게 불리는 宋代의 대표적 여류 사인(詞人)이다.
號는 이안거사(易安居士). 수옥(漱玉), 산동성 지난(濟南) 사람이다.
이청조의 부모 모두 시문에 능했다고 전해진다.
아버지 이격비(李格非)는 예부원외랑까지 오른 저명한 학자이자
산문가이다.
소식(蘇軾)을 비롯한 당대의 학자, 문인들과 활발히 교유했다.
어머니 王氏 또한 장원(壯元) 출신인 '왕공진'의 손녀이다.
명문가 출신인 이청조의 文才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셈이다.
이청조는 18살 때, 당시 고위관리이던 '조광지'의 아들 '조명성'과 혼인한다.
'조명성'은 금석학을 공부하던 태학생(太學生)이었다.
두 사람은 뜻이 맞아 금슬지락(琴瑟之樂)했고, 이청조는 남편과 함께
금석과 서화를 모으고 연구하며 행복하게 살았다.
한데 42살 때, 金나라가 침입해 북송이 멸망하는 '정강의 변'이 일어난다.
두 사람은 전란을 피해 그동안 모았던 귀한 금석서화들을 챙겨서 개봉에서
남경으로 피난을 간다.
이 와중에 서적과 재물을 잃고, 4년 후에는 남편마저 병으로 세상을 뜨자
이청조는 혼자 쓸쓸히 남게 된다.
전란을 피해 남방을 유랑하며 고초를 겪던 이청조는 50세 때 '장여주'에게
재가했다.
그러나 무슨 연유인지 100일도 채우지 못한 채, 이혼한다.
일설에는 돈을 보고 접근한 '장여주'가 혼인 후, 나이 많은 '이청조'를
학대한 것이 원인이라는 얘기도 있다.
이청조는 '장여주'가 공금을 횡령하고 뇌물로 관직을 샀다고 소송을 했다.
이 일로 그녀는 남편을 소송했다는 죄명으로 9일간 감옥에 갇히는 비참한
지경에까지 이른다.
이후, 강남을 유랑하며 혼자 외롭게 살던 이청조는 60 대에 곡절 많은
생을 마감한다.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겪어서 그런지 술을 남자 이상으로 사랑했다.
주시(酒詩)로 불리는 여몽룡(如夢令)의 연작시를 33수나 썼다.
그밖에도 많은 걸작들을 남겼다.
말년에 이르러 전란으로 남방을 유랑하며 간난신고, 외로움과 치열하게
싸운 인생여정 때문인지, 詩 또한 그녀의 삶처럼 애닯고 애련하기만 하다.
위의 詩 성성만(聲聲慢)은 '이청조'의 대표작이자 말년의 작품이다.
그래서 삶의 처연함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이청조는 7편의 수필과 6권의 詩集을 냈으나 모두 사라지고, 현재 몇십 편의
詩만 전해 내려온다.
주로 송대에 유행했던 서정적인 운문(韻文)으로 음률에 맞추어 노래로 불리는
사(詞)를 지었다.
'이청조'의 詩는 여성 특유의 예리함과 강렬한 어법 구사로 유명하다.
그녀가 말년에 겪은 험난한 인생은, 후대에 영원히 남을 아름다운 詩로 승화돼
보석처럼 형형한 빛을 발하며 宋代의 문예사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중국이 자랑하는 중국 문학사상 최고의 여류시인이다.
<이청조의 탄생지인 지난(濟南)에 있는 이청조(李淸照) 기념관>
호
* 이 글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